‘생각대로 됐군. 저쪽 팀이 가는 길은 최소 3시간은 걸리는 길. 그에 반해 여기는 보스방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길이지.’
시간이 더 걸리는 대신 나타나는 몬스터의 난이도가 낮은 길.
지금 걸어가는 길은 짧은 대신 몬스터의 난이도가 아주 높았다.
‘하나하나가 중간 보스급 이상이라.’
전투를 앞두고 느껴지는 고양감.
흑진주 속에서 키득거리며 저주하는 요정의 소리가 들리곤 했지만, 룬은 아무렇지 않게 거대한 좀비 해파리. ‘사악한 좀비 젤리 피쉬’ 일곱 마리 앞에 섰다.
‘조금은…… 즐겁네.’
애초에 팀을 나눈 이유가, 듀라한과 룬만 강력한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잘 피해있어라, 백야.”
“삐약!”
잘도 말을 알아듣고 빠르게 날개짓하는 새였다.
퍼석.
좀비 해파리가 던전 바닥의 암석을 촉수로 감아 부식시켜 부수며, 5미터는 넘는 몸체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그리고는 룬을 향해 빠른 속도로 또 다른 촉수를 날렸다.
팅!
어느 새 룬의 손에는 장인대회 우승 상품이었던 ‘무엇이든 막는 방패’가 들려 촉수를 튕겨냈다.
“듀라한, 시간이 금이야. 얼른 끝내버리자.”
철컹!
포권을 취한 듀라한이 앞으로 달려갔고, 룬은 방패에 새까만 힘을 두르곤 공중에 몸을 띄웠다.
‘간만에 힘을 감추지 않아도 되니, 재미있겠는걸.’
수십, 수백 가닥의 해파리 촉수가 룬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룬은 한 끝 차이로 그를 전부 피했다.
‘더.’
팡!
그가 던진 방패가 세로로 빠르게 돌며 해파리의 머리를 갈랐다.
물풍선 터지는 소리가 나며 거대한 촉수가 허우적거리더니 질퍽하게 쓰러졌다.
‘더 빠르게.’
부메랑처럼 돌아온 방패를 쏘아내듯 손에서 던져내자, 속도와 회전이 더 빨라졌다.
쐐애액!
퍽! 퍼벅!
살아있는 것처럼 방패가 촉수들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날아다니며 뒤통수와 몸체를 긁었다.
무른 살점이 튀고, 해파리는 귀를 괴롭히는 고주파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 키이이익! 키치치칙!
피 대신 물러터진 액체만 줄줄 흘리는 걸 보며, 룬은 무감정한 눈으로 손을 까딱, 움직였다.
그 즉시 듀라한이 내달려 날아온 방패를 잡아들었다.
쾅!
충직한 기사는 온 몸으로 거대한 해파리의 촉수에 몸을 부딪치며 시선을 분산시켰다.
촉수에 닿기만 해도 강한 부식과 산성액으로 갑옷이 녹아야 했지만, 방패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듀라한. 그놈 여기로 보내.”
룬의 지시에 듀라한이 주변을 훑고는, 부식액을 퍼부어대는 해파리를 텅! 하고 방패로 밀어 넣었다.
정확히 룬이 원한 위치였다.
되더라고
‘부식액은 조심해야겠어. 해츨링의 비늘이라 너무 약해.’
조심스러운 생각과 달리, 동작은 호쾌했다.
손 안에 기운을 모은 룬은 물의 인장을 이용해 주변의 물을 끌어 모았다.
룬의 의지대로 내달리던 급류가 해파리들을 향해 해일처럼 덮쳐들었다.
쿠르륵! 촤아악!
순식간에 해파리를 휘감은 물은 세탁이라도 하듯 그대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연습하긴 딱 좋군. 본 모습으로도 싸워볼까.’
룬의 손짓은 회오리 속에서 해파리들끼리 부딪고 비벼지며, 서로가 서로를 녹이는 기괴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지직, 지지지직!!
살이 찢기는 소리가 징그럽게 울렸다.
이내 거대 일곱 마리의 해파리를 하나의 형체처럼 회오리 속에서 뭉쳐졌다.
순식간에 찢기고 녹아내린 살점은 이내 곤죽이 되었다.
‘애들한테 이런 장면은 보여줄 수는 없지.’
룬은 절명시킨 몬스터의 잔해를 담담하게 내려다보았다.
‘얻을 부산물이나 몬스터 재료 양이 줄어드는 것만 아니었어도, 깔끔하게 어둠에 먹히고 끝내는 건데.’
땅에 내려선 룬은 마력석과 쓸모 있는 재료, 몬스터 사체 등을 주머니에 담았다.
그리고 본체화를 하고 꼬리를 툭툭 흔들며 몸을 가볍게 풀었다.
“뀨우.”
[인간형 싸움 연습은 이정도면 됐고, 형님네들 오기 전에 다시 해 볼까.]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약 십여 분.
입구로 갔다 다시 들어오는 시간까지 하면 약 20여 분.
그들은 자리를 비우면 몬스터가 다시 생성되는 통로구조를 이용해,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처치했다.
그렇게 2시간이 넘게 흐르자, 작은 창이 떠올랐다.
<워터 몬스터 슬레이어 업적 획득!>
- 물 속성 몬스터를 수 없이 죽인 자. 눈 감고도 물속 몬스터를 처치할 정도의 실력자에게 주어지는 업적.
- 물 속성 생물체의 분해, 해체 작업 시의 숙련도 증가.
“뀨?”
‘이건 또 뭐야.’
오랜만에 보는 업적 알림창에 룬이 미간을 구겼다.
앞발에 검은 어둠으로 된 단도를 생성해 막 메갈로돈을 처리한 참이었다.
대충 내용을 확인한 룬은 그 창을 적당히 치웠다.
‘슬슬 나가볼까. 저쪽도 정리 되었을 시간이니.’
그간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 쌓여왔던 답답함이 시원하게 해소된 룬은 개운한 얼굴이었다.
그는 슬슬 꼬리까지 흔들며 한층 즐거운 듯 전음을 보냈다.
“뀨뀨.”
[슬슬 가자, 듀라한.]
철그럭!
클린 마법을 사용해 몸에 남은 전투의 흔적을 지우고 다시 인간용 폴리모프 팔찌를 꼈다.
출구로 나가자, 페르디키온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뛰어왔다.
“룬! 무사했나. 별 일은 없었던거냐?”
“응.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걸. 형은?”
여유롭게 웃어 보이는 룬에게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보다 몬스터들 수준은 높지 않더군. 덕분에 흑미가 활약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모두 함께 싸웠던 녀석들이 이 던전의 중간 보스 격이었던 모양이더군.”
룬의 계획대로였다.
애초에 요정을 통해 던전 내의 강한 몬스터를 룬이 들어간 통로에만 몰려나오도록 설계했다.
입구로 나갔다가 또 다른 중간 보스급 몬스터가 새로 나올 즈음 다시 들어가 해치우기를 수차례.
덕분에 <저주받은 던전>의 강력한 몬스터들은 룬과 듀라한이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어차피 저주받은 던전이 정화되고 나면 본래의 파도의 던전으로 돌아가니, 원래 난이도를 확인할 방법도 없지.’
빠르게 잘 해치울수록 중간 보스들에게 얻는 전리품과 보상도 쏠쏠했다.
룬은 다시 얻기 힘든 재료들로 빵빵하게 채운 주머니를 생각하곤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흑미도 열심히 싸웠어요! 룬 님한테 도움이 된다구 해서요.”
“그래, 덕분에 기여도 많이 챙겼겠네. 잘했어.”
‘매혹 능력도 꽤 많이 올랐겠군.’
가볍게 머리를 손으로 토닥여주자 흑미가 귀를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나저나…… 아멜리아랑 페르디키온은 의외로 별 말 없네.’
페르디키온은 물론이거니와 아멜리아는 약간 뒤에서 조용한 미소를 띠며 라멜과 서있을 뿐이었다.
“아멜리아랑 형님하고도 잘 다녔어?”
함께 잘 다녔냐는 듯 물었지만, 둘 사이에 싸움 같은 건 없었는지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다.
대답은 흑미한테 먼저 나왔다.
“으웅, 그럴 새도 없었어요. 흑미가 젤 많이 해치웠지만요, 언니랑 페르디키온 님이 진짜 무시무시하게 강했거든요! 빨리 룬 님에게 가야한다면서 가로막는 몬스터들 순식간에 꽥! 다 혼내주구, 불에 굽고 물에 다 쓸어 보냈어요.”
두 손으로 목을 꽉 잡는 시늉까지 하며 말하는 흑미였다.
솔직히 말하면 안 보는 사이 싸우진 않을까 고민했다.
흑미가 보는 앞에서 참아 누르긴 하겠지만, 둘의 성격은 극과 극이었으니까.
‘기우였나?’
아주 중요한 걸 그냥 넘긴 것처럼 마음에 갈고리 같은 물음표가 걸렸다.
문득, 멋쩍어진 페르디키온과 수줍어하는 아멜리아의 얼굴을 본 룬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오히려 저쪽에서 날 생각했던 건가.’
어린 아이를 보호하자는 의무감과는 달랐다.
룬을 향한 걱정과 정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속이 영 간지러웠다.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느꼈더라도 쓸데없다 여겼던 무언가가 슬그머니 온기를 남겼다.
그것이 너무 생소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되레 얼굴 근육이 굳을 정도였다.
“룬?”
페르디키온이 물어오고, 아멜리아도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응. 가야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그는 자신의 동요를 차분히 눌렀다.
조금 더 걸어가니 안쪽으로 새까만 가시가 잔뜩 돋은 통로 앞에 도달했다.
주변을 휘 둘러본 룬은 주머니에서 싱싱한 사과를 꺼내 가시 돋친 곳으로 던졌다.
콰작!
가시가 단숨에 길어지더니, 사과가 수십 개의 가시에 꽂혀 바스라지고, 즙은 쭉 빨려 말라비틀어졌다.
“히엑!”
“뭐, 뭐 저런…… 게, 다 있어.”
귀를 뾰족하게 세우며 놀란 흑미와 눈살을 찌푸린 아멜리아와 달리 페르디키온과 룬은 예상했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페르디키온이야 던전을 다녀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고, 룬 역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는 데 능숙했다.
‘멀긴 하지만 끝이 보이는군.’
검푸른 색에 은은하게 어린 반짝임.
던전의 마지막 방, 최종 보스가 있을 터였다.
주머니에서 사과를 다시 꺼낸 룬이 이번에는 눈을 감고 홀의 마력구조를 감지했다.
‘텔레포테이션.’
슈륵!
손 안에 있던 무게감이 사라지고, 건너편에 무사히 이동된 사과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이, 이동마법이…… 던전에서, 가, 가능해?”
본래 던전에서는 독특한 마력 파장 탓에 이동마법이 듣지 않았다.
이는 마음대로 날고 있는 새 위에서 뛰어 원하는 곳에 착지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가능한 건 나뿐일 거야. 말 하기 좀 민망하지만, 한때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 탈출해 보려고 이동마법을 엄청 연습했었거든.”
“그게…… 말이 되는 것이냐?”
페르디키온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던전을 이룬 마력 대부분이 물과 어둠, 저주와 관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다룰 수 있는 마력으로 구성된 던전.
요정이 길을 만들거나 치울 때 느껴진 감각.
마력 실뜨기를 통해 구조를 직접 짜는 능력을 결합한 복합적인 결과물이었다.
‘다중 속성을 조합할 수 있게 된 것도 도움이 됐지.’
다만 이걸 하나하나 다 설명해 주기에는 번거로웠다.
그래서 한마디로 일축했다.
“되더라고.”
“…….”
할 말을 잃은 페르디키온이 그를 보다가, 하. 하고 웃어보였다.
“대단하군, 아우님. 솔직히 질투가 날 지경이다.”
그 나름의 칭찬이었다.
심술처럼 손으로 룬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더니, 등을 철썩 때렸다.
“아야.”
“그래, 그 능력으로 우리 모두를 건너가게 할 수 있는 거냐.”
“한꺼번에 가는 건 무리지만 몇 번 나눠서 하면 돼.”
“저요! 흑미가 1번 할래요!”
백야를 안고 뛰어온 흑미가 냉큼 룬에게 다가왔다.
아멜리아도 은근히 흑미 뒤에 조심스럽게 섰고, 페르디키온은 말은 안하지만 당연히 저를 먼저 선택할 거란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룬은, 심플하게 기준을 말해주었다.
“가장 마력이 적고 질량이 적은 순으로 시작할게.”
“와아! 그럼 백야랑 흑미가 첫 번째예요!”
금세 시무룩해진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와 달리, 흑미와 백야는 신이 난 얼굴로 웃었다.
딱히 사감이 있어서 나눈 게 아니라 부담이 적은 기준으로 나눴으므로, 룬은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이동마법을 사용했다.
모든 일행이 건너오고, 물이 바닥에 잔잔하게 깔린 방에 섰다.
검게 칠해진 밤하늘처럼 사위가 어두웠다.
“우우. 이상한 냄새 나요.”
코를 쥔 흑미가 투덜거린 순간.
찔걱, 치르르르.
어두침침한 동공을 누비는 질척거림.
일행 모두가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드문드문 털과 껍질이 덕지덕지 붙은 두족류의 몸이 천장에 붙은 채 일행의 머리 위에 있었다.
문어처럼 생긴 머리에 박힌 어둑한 눈이 마치 개미를 내려다보는 듯, 기괴한 시선을 그들을 훑었다.
“자이언트 데빌 크라켄이군.”
페르디키온이 본체화를 고민하며 전투 준비에 들어가려는 그때.
“쉿.”
룬이 어둠을 주변에 깔았다.
은닉 효과가 뛰어난 마법이었기에 모두의 모습이 어둠 속에 완전히 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