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242)

크라켄이 발을 뻗어 일행이 있던 자리를 문질러댔으나, 그들은 기척을 죽이고 자리를 옮긴 채였다.

페르디키온이 입을 뻐끔거렸다.

‘룬. 뭘 어쩌려는 것이냐?’

‘혹시나 해서 준비한 게 있어.’

속 모를 얼굴을 한 룬이 빙긋 웃어보였다.

어둠과 침묵 속에서 다들 조용히 기다리자, 룬이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쑤욱!

쿵!

튀어나온 건 화려한 무늬가 조각된 거대한 항아리였다.

갑자기 큰 소리와 함께 나타난 거대 항아리를 본 크라켄은 빠르게 몸을 물렸다.

‘어! 이거, 제드 아저씨한테 받아왔던 항아리!’

흑미가 입모양으로 뻐끔거렸다.

혹여 소리라도 낼까 룬이 다시 한 번 검지를 세워 입술 위에 올렸다.

이어, 그를 따라오라는 듯 손을 세워 신호하고는 항아리 뒤로 몸을 숨겼다.

엉겁결에 일행들도 줄줄이 따라 숨었다.

갑옷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듀라한이 살금살금 들어온 걸 마지막으로 모든 일행이 모였다.

‘어쩔 셈인 거냐?’

‘보면 알거야.’

페르디키온이 입을 벙긋 거리며 묻고, 룬 역시 입술을 몇 번 움직여 대답했다.

가로로 길게 누운 항아리 안에는 반짝이는 마력석까지 가득했다.

아름다운 마력석의 빛은 갑자기 사라진 룬 일행을 경계하며 촉수를 흔들던 크라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크르르르.

기괴한 소리를 흘린 크라켄이 마력석의 오묘한 빛을 눈에 담았다.

룬은 항아리와 바닥 부분에 몸을 붙이고 상황을 살폈다.

‘잘 되어야 할 텐데.’

항아리 속에는 룬이 주워 담았던 몬스터의 사체 따위가 들어있었다.

그것들은 일렁이는 마력석의 빛과 함께 마치 살아있는 정어리 미끼처럼 바닷물에 흔들렸다.

자이언트 데빌 크라켄은 처음에 보았던 일행과, 항아리를 두고 무엇을 우선할지 고민하는 듯 천장에서 꿈지럭거렸다.

크라켄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치르르릇.

주르륵!

크라켄의 기둥 같은 다리가 항아리 입구를 감싸기 시작했다.

어둠의 인장

“으…….”

진동이 전해지자, 아멜리아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크라켄은 항아리 안을 보곤 탐욕스럽게 큰 머리를 흔들더니, 그 안으로 주르륵 빨려 들어갔다.

“됐어. 뚜껑 닫아, 듀라한.”

룬의 명령에 따라 듀라한은 즉시 뛰어나가 항아리 뚜껑을 닫았다.

탕!

쾅! 쾅!

콰직!

덜컹덜컹!

뚜껑과 항아리 입구 사이에 끼어 미처 들어가지 못한 크라켄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툭툭 떨어진 다리가 항아리 살점 두툼한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와……. 룬, 항아리에 쏙 들어갈 거 알고 있었……어?”

아멜리아가 신기한 듯 물었다.

분명 해양 몬스터를 제대로 본 적 없이 자랐을 아멜리아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신이 눈치 챈 사실이 맞을까, 하는 기대를 품은 눈치였다.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해 주었다.

“응. 문어와 오징어의 특성을 가진 녀석이라, 반짝이는 것과 이런 항아리처럼 들어가기 좋은 곳을 보면 사족을 못 쓴다더라구.”

이런 성질 때문에 크라켄이 바다 위에 있는 거대함선 안에 몸을 밀어 넣으려다 배를 침몰 시키는 사고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이걸 통발 낚시라고도 하던가. 입만 열면 밉살스러운 제드지만, 물건 성능만큼은 확실하군.’

한번 닫히면 뚜껑 중앙 마법석에 일정 이상 마력이 들어가야만 열리도록 만든 ‘봉인 항아리’.

제드에게 주문했던 그대로, 거대한 봉인 항아리는 크라켄을 제대로 가뒀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깨질 테지만.

당연히 룬은 대비를 했다.

‘항아리 안에는 ‘어둠에 물든 행복한 향기 상자’를 넣어뒀지.’

상자 안에는 근육을 이완시키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마취제와 최면용 풀을 잔뜩 넣어뒀었다.

지금쯤 항아리 안에 들어선 크라켄은 힘을 잃고 헤롱거리고 있을 터.

‘게다가 향기 상자를 이용한 자는 나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져. 한 번 사용한 것으로 큰 효과는 보지 못하겠지만, 나를 해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엔 충분할 거야.’

아멜리아는 영 걱정되는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이, 이걸로 끝? 모, 몸부림……친다거나. 해치우지, 아, 않아도 돼?”

“괜찮아. 이젠 벗어날 기운은 없을 거라서.”

무려 레드 드래곤 족인 페르디키온에게조차 레몬 사탕 하나로 효과를 본 아티팩트였다.

벌써부터 취해 늘어졌는지, 항아리 안에서 간헐적으로 퉁퉁 거리던 소리가 조용했다.

룬은 즉시 항아리 바닥에 손을 대고 옹기 너머 크라켄이 품은 어둠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좋아. 이걸로 어둠 일족의 힘은 거의 다 모았군.’

룬은 여유롭게 회수를 끝내고 만족스러워 했다.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에 다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페르디키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룬, 설마 보스가 크라켄인 걸 알고 있었던 것이냐?”

“그럴 리가. 내가 예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미심쩍은 눈치로 물어오는 페르디키온에게 룬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형 기억나? 전에 내가 스크롤 만들어 준거. 사실 마력 잉크로 쓰려고 크리스티나한테 크라켄의 먹물을 부탁했었어. 그런데, 원래 심해 필드에 다니는 녀석이었다는 데 없어졌다더라고.”

먹물을 구해주기로 했던 크리스티나와의 대화를 떠올린 룬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물의 지역 필드를 정화하며 다닐 때는 몬스터화 된 정어리나 도다리 같은 어류, 어패류 같은 거였어. 그나마 몬스터다웠던 건 레비아탄 하나뿐이었지. 그럼, 다른 몬스터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항아리를 퉁퉁 쳐대는 진동과 소리가 조용해졌다.

룬은 씨익 웃었다.

“어쩌면, 변질된 <저주받은 던전>과 관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혹시나 해서 심해의 몬스터에 대해 크리스티나에게 들었는데, 크라켄은 항아리 같은 곳에 숨는 성질이 있다 걸 듣고 준비해 둔거야.”

‘사실은 전승 지식으로 확인한거지만.’

만약 던전에도 없다면 광증이 걸린 아멜리아의 부모.

즉 블루 드래곤의 피어에 위협을 느끼고 아주 멀리 도망갔거나, 또 다른 가설을 생각해 볼 셈이었다.

페르디키온이 당돌한 아우의 말에 미간을 구겼다.

“꼭 크라켄에게 맞춘 것처럼 만들어진 덫이었다만.”

“그야, 크라켄이 아니어도 거대한 몬스터를 넣을 수 있는 항아리니까 언제고 쓸 수 있잖아.”

어둠을 다루는 룬의 능력.

거대 몬스터들이라면 혹할만한 덫.

룬은 이 두 가지 능력을 어떤 상황에서도 써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막상 던전에 와 보니, 크라켄뿐 아니라, 다른 심해 몬스터들도 ‘요정의 길’에 끌려들어와 있었지만.‘

하지만, 굳이 그 사실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한데, 페르디키온은 묘하게 서운한 눈치로 불퉁하게 말했다.

“미리 언급이라도 했다면, 나도 도왔을 것이다.”

“뭐…… 굳이 이야기 하나 싶기도 해서…….”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리고 추궁 섞인 시선이 룬을 집요하게 따라왔다.

‘저거 또 삐졌잖아. 항아리 덫에 대해 너무 깊게 파고들어 질문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다만.’

엄밀히 말해 크리스티나가 크라켄 같은 위험한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 의도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라는 경고에 가까웠다.

하지만 룬은 반대로 그녀의 이야기를 이용해 크라켄을 사로잡을 항아리 덫을 만들었다.

크리스티나가 룬이 한 행동을 보면 고개를 흔들며 말 안 듣는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도 형이라고 날 도우고 싶었던 것 같은데, 다독여 주긴 해야겠군.’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인 룬은 항아리를 퉁퉁 두드리고는 주머니에서 두꺼운 밧줄을 꺼냈다.

“듀라한, 항아리 챙겨가자.”

철컥!

고개를 끄덕인 듀라한이 투박하게 생긴 장갑 낀 손으로 솜씨 좋게 거대한 항아리에 밧줄을 묶었다.

마법으로 강도를 높인 질긴 밧줄은 거대한 항아리 여기저기에 튼튼하게 감겼고, 마지막으로 듀라한의 등에 고정되었다.

번뜩!

형광 녹색으로 번쩍인 눈이 어지간한 여관 건물 3층은 됨직한 항아리를 들고 일어섰다.

“우와아! 듀라한, 힘 엄청 세!”

흑미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젖혀 하늘까지 솟은 항아리를 올려다보았다.

듬직한 덩치와 괴력을 가진 듀라한.

하지만, 항아리가 워낙 크고 묵직해 보여 룬 역시 못내 신경이 쓰였다.

‘경량화 마법을 걸어둔 항아리지만 크라켄의 무게가 만만하진 않겠지. 조금 미안한걸.’

뇌 기능이 정지해 회생 불가능한 뇌사 상태였던 레비아탄과는 달리, 혼수상태의 크라켄은 살아있는 생명체.

아쉽게도 아공간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다행히 듀라한은 항아리를 지고 걷는 데 어려움 없어보였지만 못내 마음이 쓰였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자. 가져가기만 하면 마력 요리 재료로 연구할 테니, 크리스티나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지.’

룬은 주변의 자잘한 어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몸속에서 어둠의 힘이 서로를 반겼다.

힘은 퍼즐처럼 이어지고, 조화로운 검보라색 흐름은 완성된 법칙이 되었다.

그리고, 모인 어둠은 하나의 문양을 이루어 룬 앞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우으. 룬 님, 저 뭔가 이상해요.”

철컹!

흑미와 듀라한 앞에 보라색 마력으로 된 문양이 떠올랐다.

실크처럼 둘러진 권능의 힘이 축복처럼 둘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를 지켜본 아멜리아가 탄성을 터트렸다.

“룬……. 그, 그거. 네, 어둠의 인장……이야?”

룬의 손 안에 피어나기 시작한 어둠의 인장.

검은색과 보라색이 얽힌 기묘한 문양에서 조용한 어둠이 소리를 삼키며 떠올랐다.

문장에서 스며 나온 어둠에 의해 새로운 밤이 탄생하는 모양새였다.

룬은 손 안에 인장을 쥐었다.

그때였다.

“앗, 내 꼬리!”

눈을 반짝 뜬 흑미가 고개를 돌려보자, 두 개의 꼬리가 살랑이고 있었다.

듀라한의 변화는 좀 더 조용하고 묵직하게 일어났다.

덩치가 더 커지고, 기세가 더욱 강맹해진 그는 일개 기사가 아닌, 군단을 이끌 군단장처럼 보였다.

“삐약!”

성장한 흑미와 강해진 듀라한 주변을 맴돌며 백야가 신기한 듯 날아다녔다.

“우왓! 흑미 꼬리 두 개 됐다아!”

풍성한 제 까만 꼬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빈 흑미가 기분 좋게 외쳤다.

듀라한은 풍채가 늠름해지고 우울해 보였던 녹빛의 안광에 위엄이 깃들었다.

아멜리아와 페르디키온이 감탄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다, 다들…… 정말 축하해.”

“주인 된 자가 성장하면 권속들 역시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잘 되었구나, 룬.”

진심으로 기뻐하며 작게 손뼉까지 친 아멜리아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히 치하하는 페르디키온에게 룬은 짧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다들 도와준 덕분이야. 고마워.”

이어서, 룬은 아멜리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 네 차례야, 아멜리아.”

창을 쥔 아멜리아가 결심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어둠을 룬이 거둔 지금, <저주받은 던전>을 <파도의 던전>으로 되돌릴 순간이었다.

심호흡하고 앞으로 나서는 아멜리아에게 룬이 따로 챙겼던 보석을 건넸다.

“자. 이게 도움이 될 거야.”

“……예, 예쁘다. 이렇게 크고…… 맑은 색의 진주는 처, 처음이야.”

반짝임이 별 같았다. 감탄하며 진주를 바라보는 인어에게,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백야의 눈물로 코팅해서 그럴 거야.”

눈을 동그랗게 든 아멜리아에게 룬은 간단히 설명했다.

”불사조의 눈물은 모든 독을 없애고 부정한 것을 태워 사라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거든.”

“삐약!”

제 이야기를 한 걸 알아들었는지 백야가 하얀 날개 하나를 들어보였다.

그제야 조심스럽게 진주를 받아든 아멜리아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랬구나……. 고마워, 룬. 백야.”

손바닥에 다 담기지 않는 커다란 진주알을 양 손에 쥔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화하라.”

파앗!

맑은 흰 빛이 언령을 타고 심해 속을 달려 나갔다.

마치 개벽의 순간을 목도한 기분으로, 룬은 은은하게 퍼져가는 빛의 물결을 지켜보았다.

눈 부셨던 빛은 곱고 부드럽게 퍼져나가 던전, 심해 곳곳의 신음하는 몬스터와 생물들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보드라운 빛과 온기가 한 소녀의 언령대로 모두를 이끌었다.

광증에 시달리던 생명들. 썩어가던 바다와 돌. 산호초.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눈으로 온순해지고 깨끗해진 바다가 죽어가는 어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자임에도 저주와 한으로 움직이던 어떤 이들은 그제야 몸을 누이고 안식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어린 물의 여왕을 떠올리고 평안에 감사했다.

‘대단하네.’

그야말로, 물의 일족 장로의 모습이었다.

서서히 빛이 가라앉자 인어가 눈을 떴다.

흐린 눈으로 비틀거리자 라멜이 조용히 다가와 쓰러지려는 아멜리아의 몸을 받쳤다.

“수고했어.”

“언니 진짜 이뻤어요! 너무너무 멋있구, 여왕 같았어요!”

지켜보던 룬과 흑미가 한 마디씩 하자, 페르디키온도 팔짱을 끼고 말을 얹었다.

“마음먹으면 할 수 있었군. 장로다운 일.”

그 나름의 칭찬이었다.

싫을 건 없지

룬 역시 페르디키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간 품고 있던 어둠을 정화하기 위해 몇 백 년을 수련한 거나 마찬가지였지.’

아멜리아는 본의 아니게 목숨을 걸고 수백 년 간 폐관수련을 한 셈이었다.

예상치 못한 칭찬에 놀란 아멜리아가 숨을 고르며 조용히 웃음을 띄웠다.

“다들…… 고마워.”

그녀의 시선이 일행 한 명 한 명을 담아냈다.

그리고 어딘가 후련한 듯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그때, 아멜리아 앞에 작은 빛이 반짝였다.

그녀에게 던전을 깬 보상으로 주어진 ‘기억의 조각’이었다.

눈을 뜨고 그를 본 소녀가 손 안에 조각을 담았다.

“느껴져. 나, 아주…… 오래전부터 여길 알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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