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이 아련히 흔들렸다.
인어의 하얀 손이 조심스럽게 빛을 더듬었다.
떨림은 있지만 더듬지 않는 말투에는 그녀의 확신이 담겨있었다.
“여길 와 본 적 있다는 거야?”
“응…… 아마도.”
룬의 물음에 아멜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인어의 대답에 룬은 의문을 가졌다.
아멜리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저주받은 해역이었던 물의 레어.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잠들거나 없었기에 아멜리아가 살아남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던전은 달랐다.
광기에 젖은 몬스터뿐인 장소. 있는 건 미쳐버린 몬스터 소굴이었다.
이런 곳에서 내상을 입고 허약해져있던 어린 해츨링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순간, 작은 조각이 반짝이며 아멜리아와 공명했다.
“이, 이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푸른 인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래도 저 조각이 아멜리아에게 뭔가 보여주고 있는 모양인데.’
룬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아멜리아는 눈을 감고 기억의 조각이 보여주는 환상 속을 유영했다.
어둠과 저주가 없는, 시원하고 투명한 물결무늬가 새겨진 바다.
물색 천장 아래에 하얀 제단이 있었다.
‘아멜리아.’
귓가에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기억.
어딘가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따뜻하고, 슬퍼 보이는. 하지만 상냥한.
‘우리는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해야 할 일을 감내하기로 결정했단다.’
‘독과, 저주를 함께 삼키는 것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널 지킬 방법.’
한 남자의 씁쓸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네게 힘든 책임을 지게 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 아멜리아.’
두 개의 손이 알 표면을 쓸어주는 다정함과 슬픔 속에서, 가만히 속삭인 두 인어는 불길하게 뭉친 덩어리를 흡수했다.
“안 돼요…….”
인어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사랑한다면서 나를…… 어둠과 함께 버린 줄…… 알았단 말예요…….”
알에서 깨어났을 때, 심해 속에 홀로 버려져 있던 기억뿐인 그녀였다.
늘 배가 고팠고, 외로웠다.
우는 법조차 모르던 아이에게, 고독은 너무 버거웠고 독처럼 번져가는 아픔은 태어나 처음으로 알게 된 감각이었다.
“사랑해서……였어요?”
머리로 어쩔 수 없는 사정이리라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못내 의심하고 불안해하던 것들이 있다.
하지만 기억의 조각에서 본 아멜리아의 부모의 감정.
슬픔, 아픔. 사랑. 그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섞인 것들이 아멜리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지켜주고…… 싶었, 군요. 엄마, 아빠.”
심장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녀의 존재가 과거의 부모에게 독을 삼키게 만든 원인이라는 사실이.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지만…… 도망치지, 않을게요.’
예전의 그녀였다면, 차라리 쓸모없이 살아만 있는 자신을 버리지 그러셨냐며 원망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룬을 만나고, 흑미와 백야. 듀라한과 페르디키온을 만난 그녀는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졌으니까.
이 삶에서 만난 소중한 것들과 행복하고 싶어졌으니까.
‘이제는…… 내가, 엄마, 아빠를 지킬게요. 내게…… 너무나 소중하니까.’
눈물 흘리던 아멜리아가 희미한 웃음을 띄웠다.
파앗!
아멜리아가 태어나기 전 기억을 전한 반짝임은 그녀의 손끝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언니, 울어요?”
“으응, 괜찮아.”
애틋하고 처연한 시선이 흑미에게 머물더니 이내 따뜻한 빛을 품었다.
“이제…… 정말, 괜찮……아.”
진실을 알게 된 덕일까.
아멜리아는 쿡쿡 쑤신 심장과 달리, 마음속에 늘 담아두었던 눈물이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인어는 눈물 맺힌 얼굴로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그를 본 흑미는 눈을 깜빡이고는 아멜리아를 한 차례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엄청 잘 해왔을 거예요, 아멜리아 언니.”
아멜리아는 흑미의 따뜻한 체온과 말에 위로 받은 기분이 들었다.
***
아멜리아가 진정된 후, 다른 이들도 보상을 확인했다.
흑미와 페르디키온은 바다의 힘이 깃든 심해석과 진주가 박힌 팔찌였다.
“물의 일족을 도운 자의 증명, 수호 팔찌래요.”
“나 역시 같은 거다. 아무래도, 공통적으로 받는 보상인 모양이군.”
자연스럽게 일행의 눈이 룬을 향했다.
룬 앞에 떠 있는 것은 오묘한 푸른빛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보주였다.
룬의 눈앞에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물의 보주>
상태 : 룬 이클립스(Lune Eclipse) 귀속
물을 다스리는 자의 증명. 사용자의 명에 따라 물을 변화시킨다.
어둠과 저주에 잠긴 <저주받은 던전>을 <파도의 던전>으로 되돌리며 추가적인 능력이 부여됨.
- 어둠이 있는 곳에서 사용 시, 효력 상승
- 불행과 저주, 독, 천재지변 등 재난을 감지.
- 물의 정령과 계약 시 계약 가능한 정령보다 한 단계 상위 정령과 계약 가능.
사용 조건 :
물의 인장을 소유한 자
물의 최상급 정령과 계약한 자
‘이거, 아무리 봐도 엄청 좋은 걸 얻었는데?’
능력치에 감탄한 룬이 가만히 물의 보주를 보고 있자, 페르디키온이 룬의 아티팩트를 감정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물의 보주를 확인한 페르디키온이 눈썹을 좁혔다.
“룬, 이건 꽤 높은 등급의 아티팩트다. 사용조건은 한정적이다만 평범한 감지 능력이 아닌 예지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물건이로군.”
감정을 마친 페르디키온이 보주에서 눈을 떼었다.
“물을 변화시킨다는 건 일반적인 시냇물을 바닷물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걸 제한 없이 쓸 수 있는 건 희귀하지. 축하한다.”
“그랬구나. 확인해 줘서 고마워, 형.”
‘기왕이면 무기였으면 했지만…… 이쪽이 더 좋으니까.’
어쨌든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물의 보주는 물론, 최종 보스 몬스터였던 크라켄도 산 채로 손에 넣었다.
게다가 중간 홀에서 모두와 함께 싸우고 난 뒤 챙긴 부산물과 몬스터 사체들.
듀라한과 룬 둘이 3시간 가까이 중간 보스를 해치우며 얻은 보상과 자재들 역시 상당했다.
히죽.
3시간 동안 빡빡하게 건진 것들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와! 룬 님 진짜 좋은 거 나왔나 봐요!”
“삣!”
백야와 흑미가 주변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뭐…… 싫을 건 없지.”
그는 목 안으로 헛기침을 삼키며 표정을 수습했다.
이제 던전을 나가려던 순간.
“삐잇! 삐삣! 삐약?”
백야가 날개를 파닥이며 하얀 제단 위에 앉았다.
약간 왼쪽에 내려앉은 하얀새는 마치 오른편에 누군가 있는 듯 시선을 고정한 채 지저귀었다.
페르디키온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놈은 대체 뭐 하는 거냐?”
“글쎄…….”
룬이라고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삐약…… 삣. 뺙!?”
백야의 머리 위에 솟은 깃 3개가 파랗게 물들더니 눈빛이 차분하게 바뀌었다.
통통한 새의 몸이 고상한 시선으로 일행 하나하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우아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앗.
룬은 본능적으로, 백야가 아닌 무언가의 기운을 느꼈다.
경계 어린 눈으로 주시하자, 백야의 눈이 잠시 푸른빛을 내더니 이내 사라졌다.
“뺫?!!”
백야의 깃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새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몸을 파득거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울었다.
“삐이?”
몇 번인가 눈을 끔뻑인 새는 유유히 날아 룬의 어깨 위에 앉았다.
흑미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백야야, 너 괜찮아?”
“삐얏!”
날개 하나를 가뿐하게 들어 보인 새는 이내 기분 좋은 눈으로 흥겹게 꼬리 깃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나가 백야는 본질을 보는 새라고 했지.’
그동안 잊고 있던 말이었다.
하지만 좀 전의 상황이 크리스티나의 이야기와 겹쳐진 건 우연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동물에게도 귀신 보는 영안이 뜨이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
그는 고민에 빠졌다.
함께 목격한 일행들과 의견을 나눠볼지.
그리고 돌아가서 크리스티나와 직접 의논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
‘이런 걸로 고민을 하게 된 걸 보면…… 나도 좀 변했나.’
좋은 녀석들이었다.
나이를 떠나, 각자의 어려운 순간들을 잘 버텨온.
‘해볼까.’
룬은 던전을 나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파도의 던전>은 태초의 물의 정령왕이 태어나고 소멸한 요람이라고 크리스티나가 말해준 적이 있었어. 어쩌면 백야에게 방금 그 혼이 깃들었던 거 아닐까?”
“이미 죽은 자가 현재에 무슨 영향을 끼친다고. 그런 걸더러 미신이라 하는 거다. 그런 헛소리에 기대지 마라.”
잠시 그의 얼굴을 본 룬은 페르디키온의 속내를 짐작해보았다.
‘생각해보면 저 녀석이야말로 어머니를 보고 싶어 했을 것 같은데.’
생각에 잠긴 룬이 얌전히 있자, 페르디키온이 슬쩍 룬의 눈치를 보았다.
‘룬 녀석. 말은 안 해도 죽은 부모가 그리운 건가.’
어린 의동생을 살펴주고 싶었던 페르디키온은 답답함에 미간을 구겼지만 말을 꾹 참았다.
그리고 룬은 페르디키온을 보며 에휴. 하고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저 녀석 또 어머니 생각이 난 모양인데, 그래도 지가 형이라고 꾹 참는 모양이네.’
둘은 똑같이 재차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런 둘을 보며 아멜리아가 쿡쿡 웃음소리를 냈다.
“흑미야.”
“네?”
“형제는 참 좋은…… 것 같아. 흑미, 아멜리아 언니 동생……할래?”
“히히. 좋아요, 아멜리아 언니!”
흑미가 환하게 웃으며 두 꼬리를 번갈아 살랑거렸다.
어리광부리듯 인어의 손을 잡고 폴짝거리는 흑미를 보는 아멜리아.
그녀의 눈은 던전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잠시 뒤, 그들은 맑아진 물의 레어로 나왔다.
“와아!”
심해를 유영하는 물고기.
모래 안으로 쏙 파고드는 납작 게.
과묵하게 입을 닫고 있는 심해 조개.
말미잘과 산호초 사이사이를 누비는 해파리. 색색의 플랑크톤 등.
신비로운 바다 속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이게…… 진짜, 물의 레어였, 구나.”
- 끼르릇!
감탄한 아멜리아가 중얼거렸고, 듀라한 역시 잠시 바다를 둘러보았다.
새까만 어둠 대신 바다 세계의 시린 푸르스름함이 은은하게 퍼져있는 세상.
돌고래 정령 라멜이 고향에 온 것처럼, 반투명한 빛을 흘리며 물의 레어를 반갑게 가로질렀다.
룬 역시 바뀐 주변을 둘러본 후,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그럼, 의뢰를 마쳤으니 우린 이제 가 볼게.”
잘했어
물의 일족이 룬에게 의뢰한 일을 끝내고 어둠의 인장까지 완성했으니, 이젠 크리스티나의 레어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같이 갈래? 크리스티나가 맛있는 밥을 만들어 줄 텐데.”
가만히 고개를 흔든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괘, 괜찮아……. 부모님도 편찮으시고, 나는 물의 레어……를 지켜야, 하니까. 대신, 이라기는 그렇지만…….”
잠시 뜸을 들인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호, 혹시…… 마지막에 나에게 준 진주…… 더 부탁해도 될……까?”
묻지 않아도 어디에 쓸지는 뻔했다.
분명 부식이 진행되어 상한 그녀의 부모를 돌보기 위한 것일 터.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백야.”
“삐?”
“뭐해? 울어.”
눈을 끔뻑이던 백야가 ‘삐루…… 삐루루.’ 하고 잘도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잘했어.”
다른 일행들이 돌아갈 채비를 하는 동안, 룬은 시간을 들여 진주에 백야의 눈물을 코팅했다.
잘도 울어준 백야에게는 상으로 ‘버터와 꿀을 발라구운 감자칩’ 상이 주어졌다.
상당량의 진주와 남은 마력 음식까지 모두 건네자, 아멜리아가 어찌 할 바를 몰라 입을 뻥긋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