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242)

“이, 이렇게 많이 줄…… 줄은. 모, 몰랐어.”

“별 말을 다. 마력이 깃든 음식이니, 네가 먹든 블루 드래곤 내외분이 드시든 도움이 될 거야. 부디 쾌차하시길 바라.”

“룬…….”

아멜리아의 눈가가 여전히 발갛게 부어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후련해 보였다.

문득, 룬은 흑진주 속 요정이 심해의 레어를 어둠으로 물들어 차지하라며 부추겼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말에 넘어가 물의 레어를 가졌으면, 물의 일족은 물론 나를 아는 자들의 신뢰도 잃었을 거야. 분명 물의 보주도 얻지 못했겠지.’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물의 일족 터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미 어둠 일족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물의 레어 고유의 던전까지 <저주받은 던전>으로 변할 정도다.

분명 물의 힘은 사라지고, 그 대신 어둠에 먹힌 저주받은 자리만 남았을 터였다.

‘하긴, 요정 녀석은 내가 어둠 일족 힘만 다루는 줄 알고 그런 제안을 했던 거겠지만.’

단순히 생각해도 모든 속성을 다룰 줄 아는 룬에게 이는 득보다 실이 너무 큰 제안이었다.

물의 보주도 잃고, 신뢰도 잃고.

물의 인장을 기껏 얻어놓고, 물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태를 초래했을 터.

무엇보다 룬이 영 내키지 않았다.

‘아멜리아한테 영 못할 짓이지. 그건.’

신수였던 자존심이 있지, 이런 식의 갈취는 룬이 싫어하는 일이었다.

대신, 룬은 물의 일족의 장로가 될 아멜리아를 돕고, 은혜를 입혔다.

푸른 인어는 배신을 모르는 아이였던 점도 결정에 한몫했다.

‘믿을 만한 녀석이란 거지.’

심해에 홀로 버려진 힘든 환경에서, 몸을 좀 먹히는 어둠을 품고서도 꽤 괜찮은 성정으로 자랐다.

아멜리아는 부정하지만 생각보다 저력이 있었다.

‘물의 일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두고 차기 물의 일족 장로가 내 편인 걸로 충분해.’

심지어 룬은 골드 드래곤의 장로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 터를 잡고 있는 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고룡의 수호와 호의를 독차지하고 있는데, 관리할 마음도 없는 심해에 굳이 레어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정말 물의 힘이 필요하다면, 그 때마다 아멜리아의 도움을 구하면 될 일이었다.

‘그게 나한테도 이익이고, 물의 일족도 다시 살리는 길이지. 이런 방법을 두고 굳이 요정 녀석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고.’

룬의 이런 속내를 모르는 아멜리아는 갑자기 품에 진주와 먹을 것들을 한가득 안고 선한 미소를 지었다.

“다, 다음에…… 또 만나. 룬.”

“그래. 너도 잘 지내.”

둘은 악수로 인사를 나눴다.

‘자, 그럼 나를 골탕 먹이려 든 괘씸한 요정을 성불시킬 차례군.’

씨익.

그는 원한 가진 귀객들 상대라면 이골이 난 자.

손 안대고 성불시킬 방법은 이미 정해 둔 그였다.

***

마력 열쇠로 만든 통로를 지나오자, 멀리서 하얗고 동그란 빛이 빙빙 맴돌며 일행을 반겼다.

[(*´꒳`*)]

라이는 주변을 뽀르르 맴돌며 빛의 꼬리로 그림을 그려대었다.

계속 언제 돌아올지 모를 그들을 기다린 모양새였다.

페르디키온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룬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티나 님이 많이 염려되셨나 보군.”

“응. 그러게.”

[ ₍₍ ◝(・ω・)◟ ⁾⁾ ]

몇 걸음 남았지만, 라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속내를 알아줬다고 여겼는지 라이가 또 다른 빛의 그림을 그렸다.

“히힛. 라이! 환영인사 고마워!”

“삐이약!”

백야와 흑미는 즉각적으로 반응했지만 룬은 눈을 가늘게 하고 지그시 쳐다보았다.

‘저 그림이 인사라고?’

라이의 저 그림이 인사인지 아닌지 룬은 확신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흑미가 그걸 바로 캐치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듣고 보니 덩실거리며 춤 같은 걸 추는 모습과 비슷해 보이기는 했다.

[ ಠ _ಠ ]

모든 일행이 통로를 빠져나오자, 이내 바뀐 표정을 그려 보인 라이가 듀라한을 빤히 주시했다.

정확히는, 흑진주가 감춰져있는 갑옷 가슴께를.

[ ಠ _ಠ+ ]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라이는 요정의 존재를 느끼고 심기 불편해 하고 있었다.

룬은 그가 노리던 상황임을 알고 모른 척 말을 얹었다.

“눈치챘어? 하긴, 크리스티나의 허락 없이 이런 녀석을 레어에 두면 안 되겠지. 우린 여기 있을 테니 크리스티나 좀 데려와 줘. 라이.”

[ ( ̄(エ) ̄)ノ ]

천진한 목소리로 부탁하자 라이가 대답 대신 그림을 남기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불안감이 깃든 날카로운 요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려? 버려? 나? 아니지?]

“글쎄, 여긴 내 레어가 아니라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룬은 적당한 너스레를 떨며 양 손을 들어보였다.

사실 잘 모르겠다고 대꾸했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크리스티나가 이 녀석을 순순히 용납할 리 없지.’

손 안 대고 코 풀기가 이런 것이리라.

이 영악한 블랙 드래곤의 해츨링의 속내를 직감한 요정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거, 거짓, 거짓말! 거짓말! 해츨링 나빠! 저주……!]

“내 레어에서 저급한 기운을 퍼트리는 건 그만둬주겠니?”

부르르 떨던 요정은 또다시 룬에게 상스러운 단어를 던져대려다 멈칫했다.

크리스티나가 라이와 함께 워프홀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표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히, 히이익.]

벌벌 떠는 게 느껴질 정도로 겁먹은 요정과 달리 룬은 한 손을 들어 흔들며 인사했다.

“다녀왔어, 크리스티나.”

“평안하셨습니까. 크리스티나 님.”

“어서 오렴, 룬, 페르디키온. 다들 고생했구나.”

봄과 여름의 햇살이 주는 온기가 담긴 골드 드래곤의 눈이 그들을 하나하나 담아냈다.

크리스티나는 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포옹해 주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살핀 크리스티나가 천천히 일어나 듀라한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럼…… 듀라한. 내게 그 사악한 것을 꺼내어 주렴.”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까지 부드럽지는 않았다.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는지, 한마디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만 있던 요정이 발작하듯 부르짖었다.

[보, 보내지 마! 건들지 마!]

듀라한이 흑진주를 들어 잠시 들여다보더니, 이내 크리스티나에게 내밀었다.

빛의 마력이 느껴지자 흑진주는 발악하듯 웅웅, 거리며 외쳤다.

[악! 아악! 이거 싫어! 살려줘! 살려줘!]

“정말 시끄럽구나……. 아이들이 놀래잖니.”

룬은 크리스티나의 목소리에 내심 소름이 돋았다.

기감이 민감한 그가 살짝 긴장할 정도로 서슬 퍼런 기색이 온화한 목소리 아래 깔려있었다.

철그렁!

그 순간, 제지하려는 듯 듀라한이 크리스티나의 손에 쥐인 구슬을 위에서 살짝 잡았다.

정적이 흘렀다.

둘의 시선이 교환되는 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후후, 그리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단다. 누구든 집주인이라면 안전장치를 해 두기 마련 아니겠니.”

차분하고 친절한 말과 달리 언제든 비수를 꺼내어 꽂을 것만 같은 서늘함이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자연스럽게 구슬을 가져가더니, 다른 손으로 빛의 마력이 담긴 가느다란 실 바늘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온기 하나 없는 가는 바늘로 구슬을 찔렀다.

파직!

가벼운 소음이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제야 크리스티나가 생긋 웃으며 룬에게 구슬을 넘겨주었다.

“자, 이제 이 구슬은 가지고 있어도 괜찮아. 다들 배고프지는 않니? 돌아오면 맛있는 걸 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단다.”

흑진주를 다시 룬에게 돌려주는 크리스티나는 평소의 상냥한 모습 그대로였다.

흑미가 먼저 손을 번쩍 들었다.

“네! 흑미 배고파요!”

“고마워 크리스티나. 안 그래도 좀 출출해.”

분위기를 쇄신시킬 좋은 타이밍이었으므로, 룬 역시 흑미의 말을 거들어주었다.

크리스티나는 몸을 돌리며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그래. 다들 짐을 정리하고 응접실로 오렴.”

[(*´꒳`*)]

라이가 크리스티나의 머리카락을 사르륵 흔들며 맴돌더니 그녀의 이동마법과 함께 사라졌다.

굳어있던 페르디키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무서운 분이시군.”

“그러게…….”

표정을 보지 못한 룬조차 뒷목이 서늘했으니 직접 목도한 녀석이야 오죽하겠나 싶었다.

‘크리스티나가 아군이라서 다행이지.’

룬은 손 안에 놓인 구슬을 쥐고 흔들어보았다.

소리는커녕, 기척조차 없다.

‘죽었나……?’

본래 룬의 계획은 요정과 상극인 빛 속성을 지닌 크리스티나가 이 요정이란 녀석을 빛의 힘으로 성불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봐선 죽은 것도 산 것도 모를 상태였다.

룬은 시범삼아 아공간 주머니에 흑진주를 넣어보았다.

쏙 들어갔다.

정상적인 생명체는 넣을 수 없으니, 레비아탄 때처럼 최소 가사 상태거나 진짜로 죽은 게 틀림없었다.

‘이건 모르는 게 약이겠지.’

그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룬 님, 얼른 밥 먹으러 가요.”

“삐잇.”

다행히 겉보기로는 특이한 점이 없었기에, 흑미는 상황을 가볍게 넘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를 빼고, 룬 역시 고된 임무를 수행하고 온 참이라 배가 고팠다.

“그래, 가자.”

페르디키온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결정이었다.

듀라한은 크라켄이 담긴 항아리와 함께 검은 방에 남고, 다른 이들은 응접실로 이동했다.

그들을 반긴 향신료와 바비큐 냄새, 수제 젤리와 사탕, 버터 쿠키와 레몬 얼그레이 쿠키, 컵케이크가 수북하게 쌓인 접시들을 마주하고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특히, 식탁 가운데 3단 초코 퐁듀 분수에서 풍기는 달큰한 냄새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축제를 떠올리게 했다.

“신난다! 크리스티나 님 최고예요!”

“뺙!”

그 와중에 백야는 자기랑 똑같이 생긴 새 케이크를 보며 제 몸과 케이크를 번갈아 살폈다.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간 슈가 귀 부분에 얹혀진 양 케이크를 탐낸 흑미가 눈을 빛냈다.

“많이들 먹으렴.”

“사양 않고,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룬은 듀라한에게 맛을 알려줄 것들을 미리 골라 접시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얼굴만 한 커스터드 팬 빵을 하나 집어 들고 흑미 얼굴이 그려진 부분을 바라보았다.

“이거…….”

“알아보겠니?”

크리스티나가 기쁜 얼굴로 미소지었다.

편할대로 하렴

“눈썰미가 좋구나. 일전의 네 그림, 무척 기뻤어. 계속 보다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만들어봤단다.”

‘내가 준 스크롤에 대한 보답인가 보군.’

그가 준 건 그림이 아니라 마법 스크롤이었지만, 그는 재차 겸손을 되새겼다.

마치 스크롤 염료처럼 마법이 담겨있는 흑미의 얼굴이 그려진 커스터드 팬 빵.

눈을 한 차례 깜빡인 룬은 끝 부분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동작이 멈췄다.

“?”

그의 코앞 수 센티미터. 손가락만큼 작고 단순하게 생긴 흑미가 나타났다.

흑미는 치맛자락을 양 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곤 꽃을 들고 몇 초간 춤을 추고는 금세 사라졌다.

“환상 마법?”

“정답이야.”

볼을 우물거리며 답을 말하는 룬에게 크리스티나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잘 썼네.’

심지어 실력도 굉장했다.

마력을 잘 흡수하고 보존하는 재질이 아닌 빵에다 할 정도의 실력이라니.

‘따라잡고 싶은데, 아득하군.’

하기야 룬의 원래 삶인 천년의 시간보다 최소 2천 년은 더 오래 산 그녀였다.

룬은 초코 커스터드 크림이 가득 들어간 듀라한 팬 빵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앙증맞은 사이즈의 듀라한 그림이 튀어나와 양쪽 어깨를 풀더니 위엄 있게 팔짱을 척 끼고는 또 사라졌다.

‘상당한 수준이라 보는 맛이 있어. 이런 경지에 이르려면 나 역시 수련을 게을리 해선 안 되겠지.’

내심 감탄하고 있자니 크리스티나가 기대감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답을 잊었네.’

“재미있다. 신기하기도 하구.”

룬의 호평을 받고서야 그녀는 활짝 웃었다.

“후훗. 이래봬도 꽤 공들였단다.”

“응. 솔직히 감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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