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맛도 파근한 단맛이 부담스럽지 않게 돌아 맛있었다.
담백한 계란과 바닐라 맛.
간간히 느껴지는 버터향. 절로 식욕을 돋웠다.
룬은 얇은 피에 돼지 통구이 살을 얹고 깔끔한 맛의 채소를 집었다.
마무리로 매콤한 소스와 새콤한데 고소한, 특이한 향이 나는 노란 소스를 얹어 한 입에 넣으니 절로 콧숨이 흘러나왔다.
“흐음.”
볼이 한껏 빵빵해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쫄깃하고 바삭한 껍질의 훈연 향과, 촉촉한 육즙이 입안에 팡팡 터져 나오는 살코기.
감칠맛을 살리는 아삭한 야채와 소스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조합을 바꿔 땅콩소스를 얹자 고소하고 달콤한 맛으로 변했다.
질릴 틈 없는 즐거움은 중독적이기까지 했다.
마음이 느슨해지자 그제야 여유가 생기며 조금씩 피로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슬슬 잘 때가 되긴 했지.’
예상은 했지만, 이 노곤함이 주는 멍한 느낌은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얻은 힘을 소화하기 위한 필요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
그는 잠들기 전 해야 할 일을 목록으로 정리했다.
‘항아리도 잘 써먹었겠다, 제드에게 한동안 연락 안 될 거라고 말은 해둬야겠군. 그리고…….’
“룬 님!”
“?”
갑자기 흑미가 룬 옆으로 도도도 다가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이거 보세요!”
딱 봐도 룬이 그려진 빵이었다.
보나마나 그를 닮은 간단한 그림이 튀어나와 몇 초간 움직이고 말겠거니, 하며 보았다.
흑미가 빵을 크게 베어 물자, 예상대로 유난히 작고 캐주얼하게 생긴 룬이 털푸덕 앉아 있다가 눈을 비비적거리더니 하품을 했다.
- 뀨아!
“…….”
엄청 조그마한 제 모습을 보는 것도 속이 근질근질한데, 자다 깨서 하품하는 소리에 룬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귀엽지? 네가 들어간 빵은 좀 더 신경 써 봤단다.”
‘이런 거 안 해줘도 된다고.’
마음의 소리는 그 혼자만의 메아리가 되어 사라졌다.
그도 알고 있다.
여기서 어떤 반응을 보이든, 오히려 약점을 잡히게 되리라는 걸.
그는 최대한 근엄하고 무표정한 표정을 지으며 태연하게 포크를 들었다.
“뭐, 별거 아니네.”
이렇게 다른 녀석들의 빵과 다를 게 없다고 묻어가려 했건만.
아무것도 모르는 흑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 아니에요! 이것도 보세요.”
‘하나가 더 있다고?!’
이제 보니 반대쪽 손에 빵이 하나 더 들려있었다.
크리스티나가 무슨 생각인지, 룬 그림빵을 한 종류 더 만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녀석이 더욱 경악스러웠다.
- 꺄우! 꺄우우!
작은 룬이 방싯거리면서 두 앞발을 잼잼 거리며 꺄르르 거리는 모습이라니.
심지어 젤리모양까지 구현된 고화질을 자랑했다.
‘아니야! 난 이런 소리, 아니 이런 짓 한 적 없다고!’
그가 귀여워 보이는 걸 조금 이용한 적은 있지만, 이건 아니었다.
저 순진무구한 꺄륵은 크리스티나의 실수가 틀림없었다.
굳어버린 그에게 흑미의 말이 들렸다.
“히히. 룬 님도 이런 시절이 있었네요!”
페르디키온도 말을 거들었다.
“하긴, 아우님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귀여웠지. 솔직히 지금보다 더 잘 먹고 클 필요가 있어. 몸집이 평균적인 해츨링보다 작은 편이니.”
“…….”
첫인사 때 노려보던 건방진 모습을 기억하는데 입 싹 닦고 귀엽다고 하다니.
‘저 거짓말쟁이가?’
페르디키온을 보는 룬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붉은 머리의 화룡족 소년은 룬 빵을 골라 먹으며 “꺄우! 꺄우우!” 하고 방싯 거리는 그림을 흐뭇하게 감상할 뿐이었다.
“그래. 나는 아직도 종종 처음 이 아이를 봤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떠오른단다. 지금도 귀엽고 기특하지만, 10년 전의 룬은 귀엽다 못해 사랑스럽기까지 했거든. 조그마해서는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어.”
“흠, 그 마음 이해합니다. 크리스티나 님.”
“맞아요! 솔직히, 룬 님 원래 모습은 흑미보다 쪼금 큰 정도밖에 안 되는데. 요즘 일부러 잘 안 보여주는 거 같아요.”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한소리 하려다 속으로 조금 뜨끔한 룬이 아무 말 없이 주스를 삼켰다.
‘눈치 빠른 녀석.’
흑미가 처음 깨어났을 때, 대형견 다루듯 그를 꽉 끌어안았던 날부터 어지간하면 흑미 앞에서는 인간형의 모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흑미 힘이 강했다고. 내가 아무리 해츨링이라지만, 무슨 힘이 그렇게 세?’
작정하고 뿌리칠 생각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속 알맹이는 다 큰 성인인 그가 어린 흑미에게 힘을 쓸 수는 없는 일.
결국 모두의 맞장구를 하나하나 대응하기보단 침묵을 택하고 있던 룬은 포크를 쥔 주먹을 꽉 쥐었다.
“후훗. 룬은 뒤뚱거리면서 다니는 해츨링이면서, 요리를 해보고 싶어하는 모습도 귀여웠단다.”
“아우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은 녀석이긴 합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긴 하죠.”
“맞아요. 룬 님 맨날 표정 이-렇게 무심해 보이는데 생각에 빠져있으면 또 멍한 표정 짓거든요!”
안 되겠다.
계속 속으로 삭이고 있었더니, 이건 점점 더 룬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흥이 오르고 있었다.
“그게 뭐 특별하다고. 다들 어린 시절 즈음이야 있잖아.”
‘좋아. 이렇게 태연하게 넘긴다.’
다소 퉁명스럽게 나온 말과 함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작은 레드 드래곤 해츨링 모습으로 불 뿜는 페르디키온의 빵을 우물거렸다.
나만 어린 시절 있는 거 아니다. 너희들도 다 어린 시절이 있을 텐데?
그런 의미로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조그마한 모습으로 의연하게 그런 말을 해 봐야, 다른 이들의 눈에는 꼬마가 의젓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푸훗!”
“크흠. 큼. 뭐, 그래. 아우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들은 ‘안다, 알아.’라는 의미가 담긴 흐뭇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말로 직접 꺼내지 않는 게 다행이긴 했다.
‘이 분위기 어쩌냐.’
룬이 눈을 데룩 굴렸다.
궁리하던 그는 어리숙하게 버티기보단 흐름을 바꿀 만한 주제를 골라 던졌다.
“그런데, 이 그림빵은 정말 어떻게 만들었어? 목소리를 넣은 게 특히 신기한데.”
“실은, 오래전에 그린 드래곤과 함께 얻은 아티팩트를 사용했단다.”
“그린 드래곤이라면…… 리즈에입니까?”
페르디키온의 말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가 있기 전, 전대 그린 드래곤 장로 후보였던 자였지. 이제는 잊혀진.”
“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듯 미간을 좁힌 페르디키온이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룬은 그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그자로군. 전쟁 도주자.’
불명예스러운 명칭이나, 그럴 만한 자였다.
크리스티나의 지식에서 읽어낸 바로는 그랬다.
‘천마전쟁 당시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다며 거부한 젊은 그린 드래곤이랬나.’
예나 지금이나 비겁자에겐 자비가 없는 법.
룬 역시 그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식사하면서 편하게 이야기 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또 다른 이야기로 흘러갔다.
룬은 식기가 치워질 즈음, 입을 열었다.
“나, 아무래도 조만간 수면기에 들어갈 것 같아.”
“그렇구나. 겨우 10년 잠들고 깨어난데다, 어둠 일족의 힘을 회수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응. 그래서, 그 전에 할 일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데, 새벽 수련을 쉬어도 될까.”
“물론이지. 편할대로 하렴.”
대화를 듣고 있던 흑미가 가벼운 칭얼거림을 섞으며 졸랐다.
“히잉. 룬 님 또 쿨쿨 자요? 나도 함께 잘래요.”
“그래라.”
해츨링의 수면기는 가진 힘을 내면에 다듬는 과정이고, 지닌 힘을 무의식적으로 흘려내는 상태.
본체가 마계 장미인 흑미가 넘쳐나오는 룬의 힘을 흡수해야 그 역시 편했다.
다만 페르디키온은 조금 아쉬운 눈치였다.
“오래 잘 것 같으냐?”
“잘 모르겠어. 왜?”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페르디키온이 제법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내 나이가 곧 800살이 넘지 않나. 천년에 가까워 졌으니 슬슬 성년식을 대비해야 해. 너는 내 의형제니 가능하다면, 내가 드래곤으로서 완전한 성년이 될 때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
해츨링의 수면기는 짧게 10년 정도로 끝날 수도 있지만 몇 백 년 단위로 늘어날 수도 있다.
시기가 어긋나면 페르디키온의 성년식이 다 지나고 깨어날지도 몰랐다.
정확히 천년을 채워야 드래곤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니까.
이미 힘과 자격을 갖춘 그라면 900살이 될 즈음 성장의 기미가 나타날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수면기를 줄여 보려고 생각한 방법이 있어. 나도 오래 잠들어 있을 생각은 없거든.”
그러자 페르디키온의 얼굴이 만족스럽게 변했다. 그는 룬의 대답이 꽤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역시, 내 아우다. 기특한 녀석.”
페르디키온은 룬이 그를 위해 수면기를 줄이려 한다고 여겼다.
룬은 그 기류를 읽었고, 아주 틀린 건 아니기에 딱히 정정하지 않았다.
‘해츨링이 성체 드래곤이 되려면 주어진 과업을 달성해야 되던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외부로 나가야 한다면, 룬 역시 바깥 세상 나들이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페르디키온의 요청인데다 내가 드래곤이 될 때를 대비한다 하면 크리스티나도 승낙해 줄 가능성이 높아.’
속으로 계산을 마친 룬이 대답했다.
좋은 경험이긴 했어
“응. 늦지 않게 깨도록 할게.”
“당연하다. 이 몸이 드래곤이 되는데 내 아우가 없다는 게 말이 되겠냐? 그렇다고 일부러 일찍 깨라는 건 아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푹 자고 와라. 룬.”
‘앞뒤가 다른 이야기 같다만…… 뭐 그래. 무슨 기분인지는 알겠다.’
마침 흑미가 백야와 함께 듀라한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며 빵을 고르기 위해 떨어졌다.
그때, 페르디키온이 뭔가 할 말이 있는지 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 환상 속에서 말이다.”
“?”
룬이 궁금한 눈으로 보자 뭔가 갈등하던 붉은 머리 소년이 끙, 하더니 미간을 좁혔다.
“룬 이클립스, 라고 했지.”
‘기억하고 있었네.’
제대로 기억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우야무야 넘어갔던 일이었다.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큼, 그래. 진명을 걸고서라도 맹약을 지켜준 점. 역시 불의 인장을 지닌 자다운 훌륭한 행동이었다.”
“고마워.”
“페르디키온 프레이.”
‘어라.’
룬이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형의 진명?”
“그래. 약속했잖냐.”
‘진명을 알려주면 페르디키온도 말 해주겠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전에야 페르디키온이 좋은 마음으로 알고 싶어했어도, 그의 아비인 파시야스에게 흘러들어갈까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이제 아버지에게 휘둘리지 않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했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룬의 진명을 알고 있어도 괜찮을 듯 싶었다.
피식 웃은 룬이 물었다.
“이름 좋다. 무슨 뜻이야?”
“어머니는 기원과 번영이라 말씀하셨고, 아버지는 싸움을 통한 번영이라셨지.”
손 하트를 하고있는 흑미가 나오는 빵을 들고, 페르디키온이 말을 이었다.
“두 분 모두 나름대로 생각하시는 바가 있겠지.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며 빵을 먹어 삼켰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며 레어를 다스릴 테니까. 네 말대로 레어주민들 누구라도 제 할 말하면서 평화롭게, 노력한 만큼 정당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거다.”
그리 말하는 페르디키온의 표정이 무척 성숙해 보였다.
‘하긴, 한창 자랄 때지.’
성체가 기대되었다. 룬은 흐뭇한 기분이 들어 기분 좋게 말했다.
“응원할게.”
식사가 끝난 뒤 흑미와 백야는 포만감에 젖어 잠을 자러 들어갔다.
페르디키온은 자신의 레어로 돌아갔고, 크리스티나도 식기를 정리하러 자리를 비웠다.
응접실에 남은 룬은 변신용 아티팩트를 손목에서 빼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뀨후우.”
‘잠들 시기가 오고 있어서인가. 변신 아티팩트 쓰는 것도 뭔가 거추장스럽네.’
그는 꼬리를 슬슬 흔들며 기지개를 켰다.
곧 크리스티나와 가벼운 티 타임을 가질 예정이니 너무 피곤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번 물의 일족의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보고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 때문이었다.
“룬.”
“뀨우.”
[어서와. 크리스티나.]
가벼운 실내 옷에 편안한 나이트가운을 걸친 크리스티나가 직접 쟁반에 핫밀크와 홍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조금 쉬고 이야기해도 된단다. 피곤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