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애 앞에서는 찬물도 조심히 마셔야 하는 법.
룬이나 페르디키온처럼 말을 가려듣는 자들에게 헛소리 좀 하는 건 그냥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흑미처럼 곧이곧대로 듣고 익히는 아이에게 할 말은 가려야 하는 게 맞았다.
룬은 크리스티나에게 부탁해 받은 아공간 주머니 입구를 죄었다.
부식이나 부패할 걱정이 없는 아공간 주머니야말로, 손상이 가지 않도록 보관하기에 딱 좋았다.
[크리스티나, 부탁할게.]
“그래. 1년에 두 줌씩만 꺼내서 보내주면 되는 거니?”
1년에 두 줌.
제드가 기대가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하찮은 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안 주고 싶네. 일단 이야기한 게 있으니 주긴 한다만.’
일부러 품질 떨어지는 부산물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진주 마력석은 이미 보냈으니 암시장 거래에 쓸 비용까지 걱정할 건 없었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구두 계약은 지킨 셈이다.
그가 잠에서 깰 때까지 몇십 년, 혹은 백 년이 넘게 될지 알 수 없긴 했지만.
‘내가 잠든 동안 그나마 쓸모 있는 능력의 단련까지 게을리하진 않겠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언제 깰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마음이 약간 걸렸다.
어쨌든 능력을 보고 고른 인재.
지원해 주는 만큼 성과를 내는 타입이었다.
이런 타입은 너무 오래 지원을 끊어두면 성과에 대한 기대치도 다소 하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목재에 썩은 부분이 있다고 나머지 좋은 부분까지 버릴 수도 없고.’
잠깐 고민한 룬은 약간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크리스티나. 그래도 반성하면서 열심히 하는 것 같으면 크리스티나의 재량으로 좀 더 챙겨줘.”
“푸후. 그래 알겠어.”
크리스티나는 귀여운 해츨링 꼬마가 순수하게 권속을 생각해 줬다 여긴 모양이었다.
룬은 굳이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얼마나 잠에 들지 모른다는 점에서 마음이 조금 약해졌던 건 사실이니까.
‘후. 저 망언하는 버릇을 어떻게 하지.’
그 순간, 제드는 뭔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연구실과 대장간의 열기로 늘 더운 곳에 있는데도 기분이 서늘했다.
엄청난 불행을 예감한 제드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자비의 기도를 올렸다.
***
며칠이 지났다.
룬은 해츨링의 모습으로 검은 방에서 듀라한과 함께였다.
하루하루가 피곤과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뀨하암.”
‘이제 이거 하나만 하면…… 대충 정리되겠네.’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며 룬은 듀라한과 함께 크라켄이 든 거대 항아리를 꺼냈다.
쿵!
룬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올라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았다.
이제 거의 미동하지 않는 크라켄은 항아리 수조 안에서 가끔 다리를 꿈틀거릴 뿐이었다.
죽어갈 때쯤 <소생> 언령으로 살려가며 향기 상자에 노출시킨 덕에, 며칠 지난 것치고는 제법 싱싱했다.
‘좋아.’
“뀨우, 뀨.”
[됐어. 옮기자.]
뚜껑을 닫고 지시하자 듀라한이 등에 항아리를 지고 일어났다.
얼마 전 룬이 크리스티나에게 선물하겠다고 보인 크라켄은 현재의 요리실과 수족관 안에 넣기에는 무리가 있는 크기였다.
결국, 크리스티나는 수족관과 요리실을 개조하겠다며 이삼 일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어떻게 개조했으려나.’
둘은 룬의 이동마법으로 크리스티나의 요리실로 이동했다.
파앗!
듀라한의 도움을 받아 크라켄을 옮겨오겠다고 양해를 구해둔 상태였기에,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그들을 불렀다.
“이쪽으로 오렴.”
향하는 곳은 대왕 조개가 있는 수족관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요리실은 크기가 조금 더 큰 것 빼고는 차이가 없었지만, 수족관으로 향하는 길은 확실히 좀 더 커 보였다.
‘단순 확장인가? 하긴, 항아리 크기가 안 그래도 천장에 닿을 것 같았으니.’
철컥! 철그럭!
갑옷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듀라한이 크리스티나와 룬의 뒤를 따랐다.
얼마쯤 가자 시원한 냉기가 피부를 스쳤다.
룬은 코를 킁킁 거렸다. 익숙한 짠내가 느껴졌다.
‘더 서늘해지고, 바닷물 냄새가 진해졌네.’
길 끝에 이르니 천장이 훅 높아졌다.
더불어 수족관이었던 유리 대신 지하 깊숙하게 파진 작은 저수지가 보였다.
대형 수족관이 아니라, 이젠 대형 수영장이라 불러야 할 지경이었다.
아직 안 잔다
“뀨?”
[이걸 하루 만에 만든 거야?]
“후훗. 조금 더 손 볼 곳은 있지만, 아무리 강한 생명력을 가진 크라켄이라 해도 계속 항아리에서 버틸 수는 없을 테니 서둘러봤단다. 이렇게까지 대공사를 한 건 정말 오랜만이지 뭐니.”
즐거웠다는 듯 웃어 보인 크리스티나를 한 번, 다시 대형 수영장을 또 한 번 본 룬은 한 가지 묘한 걸 눈치챘다.
수영장 가장 먼 곳에, 특수한 포탈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거 설마…… 바다와 연결되어 있나?’
앞발을 들어 워프포탈을 가리키자, 크리스티나가 미묘한 눈짓을 했다.
“눈치챘구나. 아무래도 크라켄을 키우려면 바다와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단다. 저 워프존은 심해 일부와 연결되어 있어.”
‘호오.’
크리스티나의 능력은 그가 머리로 알던 것 이상이었다.
‘골드 드래곤의 비늘로 이루어진 레어라 가능한 일이겠지만…… 대단하군.’
태양이 뜰 때마다 마나를 가득 머금는 크리스티나의 레어는 언제나 마력이 넘쳤다.
상시로 열려있는 대규모 워프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룬은 크리스티나가 만든 훌륭한 양식장을 슥 둘러보았다.
“뀨우. 뀨우?”
[혹시, 이런 양식장 나도 가질 수 있어?]
“가능하단다. 혹시 대왕 조개 몬스터 때문이니?”
룬이 순한 눈으로 크리스티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탐욕에서 비롯된 은근한 반짝임을 전부 숨기지는 못했지만, 기대하는 아이의 눈빛으로 보일 만한 정도였다.
“뀨.”
[응. 부탁해도 될까?]
귀한 진주 마력석을 내는 대왕 조개 몬스터를 예전의 수족관에서 기르려면 개체수를 제한해야 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도움을 받는다면 훨씬 많은 수의 대왕 조개를 길러낼 수 있을 터.
‘게다가, 꼭 그것만 양식할 필요 없어. 심해에는 연금술에서 쓰는 재료들도 꽤 있잖아.’
보통은 심해와 바다 위를 오가는 몬스터를 잡아야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룬은 마음껏 가져와 쓸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쿡쿡 웃으며 어린 해츨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이야. 대신 나도 부탁 하나 해도 되겠니?”
[부탁?]
의문스럽게 크리스티나를 올려다보자, 그녀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음 지었다.
“대왕 조개가 잘 양식이 되면, 식용으로 연구해보고 싶구나. 괜찮겠니?”
‘아. 전에 내 조개를 요리 재료로 쓰지 말아달라고 했지.’
수족관에 있던 조개의 수는 식용으로 소모할 정도로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양식장을 만들어 준다면, 식용으로 사용할 만큼 개체수가 늘어날 터였다.
“뀨.”
[응, 그렇게 해.]
“고마워, 룬.”
크리스티나가 기분 좋은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듀라한이 크리스티나의 지시로 항아리를 기울여 크라켄을 전용 양식장에 풀어주었다.
풍덩!
촤악!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의 힘으로 룬에 대한 충성심이 생긴 크라켄에게, 룬은 크리스티나의 지시를 잘 따를 것을 명해두었다.
신기한 듯 보던 크리스티나가 졸린 눈을 하는 룬을 안쓰럽게 보며 웃었다.
“그럼, 나는 네가 깨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을게. 이제 자러 가렴.”
“뀨욱.”
[응. 깨면 봐.]
룬은 앞발을 들어 흔들고는 캬하압. 하고 주둥이를 크게 벌리며 하품했다.
‘이제 더 할 일은 없겠지. 페르디키온이 오늘도 올지 모르니까 모코지석으로 인사 정도만 해 둘까.’
페르디키온은 어제까지도 매일 그를 찾아와 함께 밥을 먹었으며, 잠이 안 올 것 같다면 자장가를 불러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물론 ‘그’ 언령 마법이 들어간 자장가일 테니, 효과는 보증된 셈이었지만.
‘노래하는 거 싫어하는…… 아니, 부끄러워서 말도 안 꺼내던 녀석이.’
배려는 고맙지만 괜찮다며 거절했더니 왠지 모르게 서운해 하는 눈치였다.
룬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애초에 불의 일족 장로가 될 자를 자장가 보모로 쓰는 게 말이 되겠냐. 안 그래도 다가올 성인식에, 이제 분위기 바뀌기 시작한 레어까지 꽤 바쁠 녀석이.’
도움이 되고자 한 마음만 받겠다고 재차 거절했더니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가 노려보던 그 눈이란.
연락이라도 해둬야 좀 덜 서운해 할 듯싶었다.
***
원래 자려고 계획했던 때 보다 훨씬 늦어진 시간.
룬은 앞발로 푹신한 베개와 아공간 주머니를 움켜쥐고 자신의 ‘검은 방’에 들어왔다.
“뀨으으.”
‘아멜리아랑 페르디키온이 그렇게 말이 많았을 줄이야.’
둘에게 따로따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귀찮아 단체방을 따로 만들어본 게 실수였다.
아멜리아도, 페르디키온도. 무슨 경쟁이라도 하듯 그에게 말을 걸어와서 말 끊을 타이밍을 잡기 힘들었다.
룬이 본격적으로 졸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나서는 대화가 강제로 종료되긴 했지만.
‘드디어 이걸 시도할 차례군.’
그는 <어둠에 물든 행복한 향기 상자>를 꺼냈다.
드래곤의 수면기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새로 생긴 힘을 충분히 흡수할 정도로 신체를 성장시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피로 회복이다.
‘내가 얻은 힘은 10년짜리 새끼의 몸으로 감당하기엔 꽤나 부담스러운 종류니까.’
정신력은 전생의 천년 가까운 수행을 통해 단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신체의 성장을 돕고 힘을 흡수할 보조적인 장치에 대한 고민을 했다.
‘이 향기 상자를 이용해 숙면과 더불어, 성장과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향을 피운다.’
물론, 향기 상자가 무한하게 향을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가 잠든 방에 누군가 자주 들락거려서 좋을 건 없었다.
그는 크리스티나와 의논해서 1년에 한번, 제드에게 한 줌씩 재료를 보내는 날.
그녀가 직접 향기 상자에 꽃에서 추출한 오일과 사탕 같은 것들을 보충 해 주기로 했다.
‘그 정도면 부담스럽지 않게 회복능력을 증가시켜 줄 테지.’
적게 자도 아주 개운하게 깨리란 기대에 절로 흐뭇했다.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비틀비틀 걸어간 그는 상자에 챙겨왔던 꽃과 달달한 꿀젤리를 넣었다.
은은하게 향이 퍼지는 걸 확인하고, 눈을 끔뻑이며 크리스티나가 직접 공수해 준 ‘빛의 축복이 담긴 담요’ 위에 몸을 뉘었다.
목 뒤에서 꼬리 끝까지 푹신하게 받쳐지는데다, 햇살의 포근함까지.
정말 너무 편안했다.
‘정말 좋다…….’
룬은 멍하니 등 뒤에 느껴지는 느낌을 만끽했다.
빛의 마력을 흡수시킨 털을 사용해 만든 포근한 담요.
어린 그의 수면기를 위해 준비해 둔 크리스티나의 선물이었다.
밤일 때는 춥지 않게 몸을 데웠고, 낮일 때는 숙면효과를 상승시키는 아티팩트였다.
“뀨우.”
‘졸려. 한계다.’
그는 포닥포닥 최대한 편안한 두께로 담요를 부풀렸다.
데굴거리며 드러눕자 꽤 편안한 기운이 그를 감싸 안았다.
“앗. 룬 님! 이제 자요?”
“뺫!”
어느 새 베개를 들고 온 흑미가 백야와 함께 룬 옆으로 다가왔다.
“뀨우우.”
[아직 안 잔다.]
룬은 거의 감은 눈으로 자리를 조금 내주었다.
하지만 전음조차 졸음에 겨웠다.
“헤헷.”
두 개가 된 흑미의 꼬리가 살살 흔들렸다.
백야도 파닥이는 소리를 최대한 죽이면서 흑미의 곁에 자리 잡았다.
“룬 님. 흑미두요, 얼른 컸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늘 즐겁게 쏘다니던 녀석이 웬일인가 싶었다.
“뀨.”
[얼른 크고 싶다니, 왜.]
별 생각 없이 물어본 말에 흑미가 대답했다.
“우움. 그야, 다들 크고 싶어 하는걸요. 아멜리아 언니두요. 그래서, 크면 좋은 일이 생기니까 그런 거 아닐까 했어요.”
하긴 페르디키온도, 아멜리아도, 룬도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했다.
당연히 세상을 잘 모르는 흑미 입장에서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내 생각엔 딱히…… 무조건 큰다고 좋은 건 아니야.]
“그럼 다들 왜 크고 싶어 하는 거예요?”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룬은 잠시 고민하다 나름대로 답을 돌려주었다.
[크고 싶어 하는 건…… 다들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해서 그래.]
흑미는 눈을 깜빡이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
“그럼요…… 흑미는 지금이 너무 좋거든요. 그럼 더 안 자라나도 돼요?”
순진한 물음이었지만, 답은 물음만큼 간단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