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242)

룬은 몸을 조금 뒤척였다. 생각을 굴리다보니 오히려 잠이 좀 깨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이 순간에서 영원히 멈추고 싶다 해도, 시간은 멈춰주지 않아. 네 주변에 있는 것들이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변하기도 하고.]

“변해요? 룬 님두요?”

흑미가 고개를 빼꼼 들어올렸다.

작은 여우 수인마족 꼬마가 보기에, 룬은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히 곁에 있던 존재였다.

하지만 갑자기, 룬의 마음이 변해 혹시라도 자신을 두고 멀어지기라도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흑미의 마음을 모른 채, 룬은 반쯤 의식의 흐름을 술술 입 밖으로 흘려냈다.

[왜, 변하는 게 무서워?]

“으음~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 흑미 곁에 있는 룬 님이랑, 라한이랑, 제드 아저씨랑 백야가 함께 있는 순간이 변하는 건 싫어요…….”

여우 귀가 힘없이 접혔다.

침울해진 흑미에게 룬이 말을 이었다.

[다들 마찬가지일 거야. 다들 네 곁에 있고 싶어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룬 님두요?”

[그렇지.]

눈이 초롱초롱하게 떠진 흑미가 이불 너머로 작고 앙증맞은 손을 내밀었다.

“헤헤. 약속이에요!”

“뀨우.”

[그래.]

새끼손가락과 엄지를 세워 내민 손을 본 룬이 앞발을 슬쩍 내밀었다.

흑미는 새끼 손가락을 룬의 발가락 끝에 누른 후, 발젤리 부분에 꾹꾹 도장을 찍었다.

한 동안 젤리를 누른 흑미는 뭔가 만족스러운 듯, 헤실 웃으며 다시 누웠다.

“흑미는요, 앞으로도 다 함께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겠죠?”

내심 ‘그건 모를 일이지.’라는 말이 떠올랐다.

동시에 굳이 그렇게까지 말해야 할까 싶었다.

이무기 시절, 원하는 걸 이루는 방법은 아주 오랫동안 한 가지를 마음에 품고 이루어질 때 까지 노력하는 거였다.

하지만 승천은 실패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

‘앞 일 한치 앞도 모르는 법이라더니.’

하지만, 룬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

어린 흑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 끝에 머릿속에 있는 말을 입에 올렸다.

[내가 아는 이야기 중에,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 다음에 보게 되면 같이 소원을 빌어줄게.]

“좋아요! 흑미도 그렇게 할게요.”

사브작.

작은 고개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지만, 룬은 흑미도 레어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낮에는 은은한 햇빛을 품는 레어의 천장은 이제 차분한 달빛과 함께 별빛으로 물들어있었다.

[흑미야.]

“네에?”

[원하는 걸 이루고 싶을 때 꼭 필요한 게 하나 생각나긴 했어. 내 생각이지만.]

“그게 뭐예요?”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할 것. 진짜로 바라는 게 뭔지도 모른다면 생각과 마음이 다 따로 놀게 되니까. 보통은…… 그게 제일 어려울 거야.]

잘 자긴 했는데

정신은 깨어있지만 점점 잠이 몰려들었다.

굳이 거부하지 않고, 룬은 고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려워요?”

“뀨.”

[……꽤 있어. 그런 치들.]

룬이 느끼기에도 대답이 조금씩 늦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 기울여보인 흑미는 생각에 잠긴 듯 꼼지락거렸다.

백야는 벌써 잠이 들었는지 간간히 ‘삐로로로…….’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바라는 게 뭔지만 알고 있어도…… 네가 원하는 삶을 사는 데에 도움을 받게 될 거야. 세상은 꽤 넓어서, 어딘가에 분명, 있거든. 너를 위한 무언가가.]

어린 녀석을 꿈꾸게 할 만큼 예쁘게 이야기를 할 재주는 없었다.

흑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이 최선이었다.

살짝 잠긴 흑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룬 님. 기억나세요? 룬 님이요, 흑미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말 해 준거요. 살아났으니, 좋은 일 겪으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냐구 그랬잖아요.”

“?”

태어나기 전에 태어난 이야기를 해줬다는 말이 뭔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계 장미 때의 기억이군. 아마, 아직 씨앗이었을 때였지.’

당시엔 어렵게 소생시켜 싹 틔운 장미새싹이 죽어가니 안쓰러운 마음에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흑미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련한 감상에 잠길 즈음, 흑미가 기분 좋은 듯 중얼거렸다.

“저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도 되죠?”

히히. 하고 흑미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뀨우.”

[당연하지.]

그의 힘으로 탄생한 만큼, 나름대로 애착이 붙었다.

제 어미의 몫까지 앞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도 진심이었다.

“뀨…… 뀨우.”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말고.]

적어도, 살면서 힘든 일 보다는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긴다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뽀시락.

흑미가 작은 손을 뻗어 이무기의 이마에서 머리까지 슥슥 쓸었다.

촉감이 느껴지자 설핏 눈을 뜬 룬이 흑미를 바라보았다.

“뀨?”

[뭐해.]

미간을 구긴 룬에게 투명한 분홍 장미색 눈이 반짝임을 담아 웃었다.

“룬 님이 흑미 행복하길 바라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그래서, 고마우니까 흑미가 칭찬해 드리려구요.”

“…….”

어색한 한편,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잠깐 생각해 본 그는 즉시 크리스티나를 떠올렸다.

‘칭찬한다 싶으면 머리를 쓰다듬어 줬으니, 그 영향인가.’

아무래도 크리스티나가 자주 칭찬하면서 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그 행동을 배운 것 같았다.

다소 민망했지만 어린 아이가 순수하게 고마워하는 이 상황에서 매정하게 치우기도 뭐했다.

그는 반응 없이 손을 자연스럽게 물릴 때를 기다렸다.

“룬 님은 역시 상냥해요.”

“……뀨.”

‘별로 그렇지도 않은데. 차라리 아멜리아라면 모를까.’

흑미에게 나름 신경 써준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가 상냥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졸린 눈으로 슬쩍 흑미를 보니, 여우 수인은 히죽 웃을 뿐이었다.

심지어 룬의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앗! 룬 님 여기 주름 생기면 안 되는데~’라고 꾹꾹 눌러오기까지.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겠지.’

잠시 후, 슬슬 잠을 이기기 힘들어진 룬은 부드럽게 흑미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뀨하암.”

체면도 없이 자꾸 하품이 나왔다. 룬은 몸에 힘을 쭉 빼고 늘어졌다.

[졸려서 안 되겠다. 너도 이제 빨리 자.]

“네에! 혹시 이상한 꿈꾸면 흑미가 쫒아내 줄게요. 그러니 안심하구 주무세요, 룬 니임.”

결국 룬이 프슬, 웃고 말았다.

[그래. 고맙다.]

하품은 전염되는 건지, 결국 흑미도 같이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장미 모습으로 잠들어도 되건만, 끝끝내 여우 수인 모습으로 이불 속에 쏙 들어갔다.

룬은 잠시 기다렸다가 녀석의 이불을 무심히 툭 덮어주었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작은 새의 코골이와 어린 숨소리가 들리자 잡다한 상념들이 사라져갔다.

몇 번 몸을 뒤집으며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있던 까만 해츨링은,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

해가 따사롭게 내리는 어느 날.

“꾸으응.”

룬은 몸을 뒤집었다.

미미하게 흐르는 공기가 간지럽게 느껴질 즈음, 그는 잠에서 깼음을 감각했다.

좀 더 늘어지고 싶고, 평온한 공기 속에 몸을 맡기고 있으려니 갑자기 뭔가가 그의 옆구리를 뽁, 찍었다.

“……?”

옆구리 부근을 앞발로 더듬거리니, 동그란 털이 보송보송하게 잡혔다.

엄지 쪽에는 뾰족한 부리가 닿았다.

“삐로로로…….”

‘백야 부리였군.’

생각과 동시에 그는 새를 슥 밀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흑미가 굴러오더니 룬의 배 위에 엎어졌다.

“냐함. 고오……기. 주세요…….”

데굴데굴. 털푸덕.

그리 무겁지 않았으므로, 그는 흑미를 배 위에 둔 채 다시 잠이 들려했다.

배 부근에 뭔가 축축한 느낌만 아니었다면, 룬은 수면기에 다시 들었을 것이다.

“……뀨?”

‘이거 설마.’

불길한 축축함.

그리고 그 예감은 착각이 아니었다.

슬쩍 눈을 뜨니 흑미가 ‘고기…… 주세요…….’라며 침 흘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하필 배에 침까지 흘리면서 자냐…….’

잠에서 덜 깬 룬은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 흑미의 뒷덜미를 잡아 원래 자리에 복귀시켜주었다.

다시 자리에 엎어진 룬은 눈을 감았다.

꼬르륵.

“…….”

흑미가 고기 이야기를 한 탓일까.

급격한 배고픔이 몰려왔다.

결국 룬은 감긴 눈을 한 채 상체를 일으켰다.

‘어우, 졸려.’

포근한 햇살에 잠겨 들어 나른했지만 확실히 몸이 좀 뻐근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날개에 힘을 주었다.

팟!

몇 번 파닥 거리자, 날개 근육이 쫙 펴지며 뻐근함이 좀 가셨다.

앞발로 눈을 꾹꾹 누르자 발바닥 젤리가 쫀득하게 눈꺼풀을 압박했다.

‘낮인 것 같고. 빛이 강한 것 같은데…… 여름?’

천천히 눈을 뜨자, 한 쪽에 돌돌 말려진 양피지가 보였다.

빛의 마력으로 봉인 인장이 찍힌 걸로 보아, 크리스티나가 남긴 것임이 분명했다.

룬은 양피지의 봉인을 뜯고 편지를 확인했다.

< 룬, 외근을 나갈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어. 혹시 깨어나게 된다면 조리실에서 식사부터 꼭 챙기렴. 냉장고에 먹을 것을 조금 넣어두었단다.

추신 : 페르디키온이 깨어나면 가장 먼저 연락해 달라고 부탁을 남겼어. 아멜리아는 수면기에 들었단다. 레어 밖으로 나가지 말고, 레어 안이라 해도 라이와 꼭 동행하렴. >

이런 편지를 남길 걸로 보아, 장기 외근이 분명했다.

앉아있는 발치를 보니, 방석 위에 그의 변신 팔찌와 모코지석, 아공간 주머니가 있었다.

기지개를 쭉 편 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두둑.

“뀨욱.”

‘잘 자긴 했는데, 뭔가 뻐근하네.’

신체가 조금 더 성장했지만, 처음처럼 극적으로 커진 건 아니었다.

대신 마력을 운용하기 위한 내부의 변화가 꽤 컸다.

아무래도 이번 성장은 마력을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한 성장인 모양이었다.

‘하긴, 육체적인 힘도 길렀다지만 얻은 이능의 힘이 워낙 컸으니까.’

물, 불, 어둠 속성의 인장들은 원래대로라면 개화조차 제대로 되지 않을 터.

전생의 기억 덕분에 힘을 쭉쭉 끌어다 쓸걸 생각하니 좋긴 했지만 역시 아쉬웠다.

‘……그래도 좀 더 컸으면 좋겠다.’

슉슉.

“뀨!”

슉슉

“뀨뀨!”

기합과 함께 앞발로 가볍게 원투, 정권 지르기 뻗어보면서 룬은 아쉬움을 달랬다.

몸을 풀고 방석 위에 놓인 것들을 챙긴 그는 흑미와 백야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들은…… 잘 자는데 굳이 깨울 필요 없겠지?’

듀라한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이 방 안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봐야 멀리 갔을 리는 없고. 듀라한이 갈 만한 곳은 한정적이니 레어 안 어딘가에 있겠지.’

“뀨우.”

결심한 룬은 이동 마법으로 혼자 목욕탕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온천탕 물로 찝찝한 부분을 씻어낸 룬은, 온 김에 몸을 푹 담갔다.

촤아아.

‘시원하다. 이런 건 왠지 클린 마법으로만 넘어가면 뭔가 찜찜하거든.’

오물을 지워내는 마법이라 침이 묻었다 해도 효과는 탁월했을 테지만, 직접 물로 씻어내고 싶었다.

한동안 몸을 데운 뒤 한 쪽에 구비된 꽃 오일 추출물로 만든 청결용 오일까지 써서 목욕을 마쳤다.

몸에서 꽃내음을 풍기는 까만 해츨링은 슬슬 꼬리를 흔들며 조리실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비된 조리실 구조는 잠들기 전 룬이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룬은 그가 잠든 시간이 제법 길었음을 직감했다.

바짝 마른 대왕 조개껍데기 수십 개가 켜켜이 겹쳐진 채 수납장에 정리되어 있었다.

‘잠든 시간이 적어도 10년보다 훨씬 더 된 건가?’

룬은 주변을 둘러보다 냉장고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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