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42)

차곡차곡 쌓인 음식재료는 이 전에 보던 것들과 완전히 달랐다.

수면기가 짧지 않았음을 확신한 그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지. 제드에게 보내고 남은 재료의 양을 확인하면 되잖아.’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남아있는 재료 양을 확인한 룬은 눈을 꿈뻑였다.

1년에 두 줌씩 사라졌을 재료는 얼핏 확인해 봐도 상당한 양이 줄어있었다.

‘재료가 반도 안 남았다…… 적어도 50년 이상 지났다는 거겠군.’

그는 꼬리를 슬슬 흔들며 냉장고에서 먹을 만한 걸 찾아보았다.

꾸준한 요리 연구의 흔적인지, 호박 케이크와 오렌지 푸딩, 생초코를 입힌 마들렌 같은 음식들이 들어있었다.

단 걸 잘 먹지 않은 그를 위한 흰 소금빵과, 고소한 아몬드와 땅콩 쿠키. 우유 사탕까지.

남아있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룬과 흑미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신경 써준 모양이지.’

필시 크리스티나가 룬과 백야, 흑미가 언제 깨어나도 식사를 챙길 수 있게 배려해 둔 것이리라.

냉장고 속 빵과 쿠키를 챙겨온 룬은 오븐에 소금빵과 허브 식빵부터 넣었다.

위잉

조용한 공간에는 마력으로 오븐 돌아가는 소리만 울렸다.

늘 같이 먹던 식사시간이 익숙해진 탓일까.

혼자 있는 게 편하면서도,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븐을 작동시키는 마력회로의 작은 소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띵!

오븐 소리가 멈추자 룬은 노릇노릇한 갈색 빛을 내는 소금빵을 꺼내 접시에 담았다.

이어 쿠키의 오븐 타이머를 맞춰 놓고 빵을 잡아 쭉 찢었다.

“뀨으.”

‘맛있겠다.’

잘 익은 갈색 겉면이 찢기자 하얀 속살이 드러내며 향긋한 빵 내음이 풍겨나왔다.

하압.

한 입 가득 소금빵을 물자, 버터향과 짭쪼롬한 맛.

따뜻하고 폭신한 감촉이 고스란히 입안을 채웠다.

그 때였다.

빛의 정령 라이가 허공에 나타나 반가운 듯 빛을 반짝였다.

[(๑•̀ㅁ•́๑)✧]

“뀨?”

‘오. 이 녀석이 어떻게 알고 왔지.’

룬이 한 쪽 앞발을 흔들어주며 인사하자 라이도 빛을 앞발의 움직임에 맞춰 깜빡였다.

띵!

그 때, 쿠키가 다 구워졌는지 오븐이 소리를 냈다.

고소한 쿠키향이 향긋하게 풍겨왔다.

집게로 달콤한 바닐라쿠키와 버터쿠키 들을 접시에 옮겨낸 뒤 룬은, 열을 뜨끈하게 뿜는 오븐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는 뭔가를 깨닫고 집게를 흔들었다.

‘아하. 오븐이 가동되는 걸 눈치채고 온 모양이군.’

크리스티나의 레어 마력으로 작동되는 오븐이니 마력의 흐름을 느낀 게 틀림없었다.

뭔가 보여주나?

룬은 바삭바삭한 쿠키를 입안에 넣으며 라이에게 물었다.

“뀨우.”

[크리스티나는 어디 갔어?]

[( ゚ー゚a)]

빛의 그림이 대충 볼을 긁적이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페르디키온은 알려나.’

마음만 먹으면 일어나자마자 연락할 수 있었지만, 좀 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바삭바삭한 쿠키는 입 안을 즐겁게 만들었고, 구워진 과자 냄새는 달고 포근했다.

쿠키를 모두 삼키자 몸에 에너지가 차며 졸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배도 적당히 채웠겠다, 그제서야 룬은 모코지석을 꺼냈다.

페르디키온에게 그간 부재중 문자가 여럿 와 있었으나, 마지막 문장이 눈에 띄었다.

<룬, 깨거든 반드시 내게 먼저 연락해라. 중요한 일이 있다.>

어린 화룡족 꼬마가 성마른 성격이긴 해도, 모코지석에 연락까지 남길 정도라면 무시할 일이 아니었다.

‘뭐지. 성체 드래곤이 되기 위한 일과 관련된 건가?’

내심 그렇게 짐작하며 모코지석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형, 나 일어났어.>

동시에 룬은 기웃거리는 라이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듀라한은 어디 갔는지 알아?]

[( *`ω´)ゞ]

걸어가도 될 만큼 가까운지 라이가 의기양양하게 앞장을 섰다.

‘이 방향은 수족관, 아니 양식장이 있는 곳이네.’

바다의 짭쪼롬한 향이 나는 통로를 지나자,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라이를 따라가던 룬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이렇게 공사를 한거지?’

수영장만 한 크기였던 양식장은 본격적인 호수 크기로 변해있었다.

거기에, 크라켄의 그림자가 물 밑에서 어른거렸다.

어림짐작 해 보아도 룬이 처음 잡았던 날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촤아악!

철컥!

고개를 꺽어올려도 눈에 다 담기 힘들만큼 거대한 크라켄이 머리와 다리들을 치켜들었다.

그 앞,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보니 듀라한이 크라켄과 묘한 대치 중이었다.

듀라한의 손에는 회칼이 들려있었다.

무어라 말 붙일 새도 없이, 거대한 검은 갑옷이 묵직한 쇳소리를 내며 크라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제 몸보다 열배는 더 큰 크라켄이 빨판 박힌 촉수발을 듀라한에게 꽂았다.

촤랏!

물소리와 함께 둘의 손속이 맞부딪혔다.

‘오.’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내리쳐진 거대한 벽만한 크라켄의 다리.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는 회칼에 흉흉한 오러를 감싸고 최소한 움직임으로 몸을 틀었다.

스치듯 다리를 피한 듀라한이 두 번 더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회칼을 내리그었다.

스앗!

손에 들린 회칼이 몸통과 다리를 잇는 곳을 갈라낸 순간.

퉁!

두꺼운 고무 내려치는 소리가 나며 탄성으로 듀라한의 몸이 뒤로 튕겨져나갔다.

크라켄의 다른 다리가 일어나고, 파도가 이 미터 가까이 일어나 철썩였다.

촤아악!

룬은 흥미진진하게 크라켄과 듀라한의 대전을 구경했다.

마음 같아서는 꿀과 버터를 바른 감자칩을 먹으며 보고 싶을 정도였다.

‘크라켄의 몸을 감싼 점액질과 빨판은 일반적인 무기를 대었다간 그대로 붙어버리지. 검기를 둘러 그걸 방지하면서 상대하고 있군.’

룬은 라이에게 빛을 줄이라고 손으로 신호했다.

그리고 슬쩍 물러서서 멀리서 그들의 손속이 교환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정황상 살의가 느껴지는 건 아니었으니, 긴장 풀고 보기 딱 좋았다.

‘하긴, 듀라한 정도 되는 자가 진심으로 상대할 만한 녀석이 없으니.’

크라켄과 듀라한의 전투를 좀 더 지켜보고 있자 잠시 떨어진다 싶었던 듀라한이 녹빛 안광을 번뜩였다.

회칼을 수차례 매섭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지며 크라켄 주변에서 물이 터져나갔다.

퍼펑!

펑펑펑!

피하지도 못했지만, 워낙 큰 몸이라 상해를 입지도 않은 크라켄이 괴성을 질렀다.

놈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대들보 같은 8개의 다리를 천수관음이라도 된 듯 들어 올렸다.

-쿠오오!

이어, 분노로 제 울림통을 두드리며 다리들이 무작위로 듀라한 주변을 내리쳐댔다.

텅! 터텅! 텅! 쾅쾅!

촤악-

물과 바닥의 충격음이 거칠게 울렸고, 듀라한은 전광석화 같이 몸을 움직이며 피했다.

왼쪽, 오른쪽, 다시 몸을 돌려 사선으로.

빨판과 접촉이라도 하려 치면 손과 손바닥에 검은 장벽을 만들어냈다.

룬이 잠든 시간 동안, 권속으로서 받은 어둠을 제법 잘 다룰 수 있도록 훈련해 온 게 틀림없었다.

‘듀라한 녀석, 기특하네. 꾸준한 노력의 성과겠지.’

룬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무작위로 넓은 면적을 때려오는 다리를 모두 피해 일순 시야에서 사라진 듀라한.

순식간에 빈 공간에 나타나 회칼을 가슴 앞으로 가져와 곧게 앞으로 세웠다.

공기를 누르는 묵직한 변화와 함께 이전의 난투와 다른 기세를 보였다.

‘뭔가 보여주나?’

검기가 회칼에 모여 응축되기 시작했다.

뭔가 예감한 크라켄이 빠르게 다리를 회수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듀라한은 거리는 상관없다는 듯이 천천히 검을 내리그었다.

-후우웅!

듀라한의 회칼에 검은 기운이 덮였다.

완성된 형태는 검고 투명한 빛을 내는 무형의 날이었다.

이어, 듀라한은 거대한 크라켄의 몸을 사선으로 갈랐다.

그 모습은 아주 느려보였고, 한편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찰나처럼 느껴졌다.

-촤악!

크라켄의 표피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거대한 몸통을 들썩이며 작은 양식장에 파도를 일으켰다.

거칠게 뒤집힌 물은 위로 솟구쳤다가 거친 비가 되어 내리기도 했다.

룬은 그야말로 재난상황을 떠올리게 만드는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대전하면서 살았나보네.’

듀라한이 만든 것은 오러 소드.

오러를 검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이었다.

오랜 시간 검을 잡고, 검에 통달한 검사들이 해내는 것으로 듀라한은 회칼조차 오러소드로 만드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크라켄의 전투 센스가 묘하게 제법이었다.

한발만 더 안으로 들어갔으면 몸통이 갈렸을 터인데, 절묘하게 후퇴했기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크라켄은 살이 좀 부었다고 포기 할 생각은 없어보였지만, 듀라한이 손을 들어 중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크라켄은 더 싸우고 싶은 듯 다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를 무시한 듀라한이 룬에게 걸어갔다.

“뀨우.”

[잘 있었어?]

형광 녹빛의 암울했던 빛이 제법 활발하게 깜빡였다.

여전히 실체가 없는 갑옷기사임에도, 선 자세와 위풍당당한 기세 덕에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거대해 보였다.

‘마력 요리를 향기 형태로 느낀 것이 좋은 계기가 된 거겠지.’

그 때, 무음모드로 모코지석이 울렸다.

<룬! 이제 일어났나.>

‘생각보다 빠르네?’

크라켄과 듀라한의 대련이 워낙 박진감 넘치기는 했으나, 주고받는 흐름이 무척 빨랐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페르디키온의 연락이 온 것이다.

<응. 내가 얼마나 잤어?>

<100년 정도 되었을 거다. 다른 녀석들도 깨어있나?>

<흑미랑 백야는 아직 자고 있었어. 라이랑 듀라한, 그리고 나만 깨어있고.>

<알겠다. 할 말이 있으니 내가 곧 그쪽으로 가마.>

‘보아하니 이미 크리스티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군.’

하긴, 아무리 공사다망한 크리스티나라 할지라도 페르디키온에게만큼은 미리 알렸을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디키온이 룬을 찾아왔다.

“잘 잤나, 아우님. 100년간 잠든 것치곤 어째 별로 크진 못했군?”

“뀨우우.”

‘역시 별로 안 큰 거였냐고.’

혹시 100살쯤 되는 걸로는 원래 잘 안 크는지 알고 싶었는데, 페르디키온의 반응을 보니 그냥 많이 못 큰 게 맞았다.

안 그래도 태어났을 때부터 보통의 해츨링보다 작게 태어난 그였다. 조급해한다고 어찌 되는 사안이 아니라지만, 성장에 대한 욕심은 있었으니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뭐…… 이건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

하루하루 똑같이 사는 것 같아도, 어느 날 돌아보면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법.

그리 생각한 룬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중에는 크리스티나보다도 강해질 수도 있는 거고.’

미래에는 좀 더 커질 자신을 기대하며 룬은 황금 팔찌를 꺼내 앞발에 끼웠다.

사람 모습이 된 그에게 페르디키온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런 얼굴이냐.”

‘그런 얼굴?’

잠깐 생각해 봤지만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쪼그마한 해츨링의 모습이 영 아쉬웠던 건 맞지만, 대단히 표정에 드러날 만한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결국 룬은 눈을 깜빡이며 페르디키온에게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내가 어떤 얼굴을 했다는 건지 모르겠어.”

“크,흠. 그게…… 됐다. 혹시나 했을 뿐이니.”

어딘가 수상할 정도로 시선을 피하는 모습.

룬은 페르디키온이 왠지 눈치를 본다고 느껴졌다.

어설프게 말을 돌리며 뜸 들이는 모습을 보니, 섬광처럼 스친 생각이 있었다.

“형, 모코지석에 남긴 급한 용건은 뭐였어?”

“…….”

어째 예감이 영 안 좋았다.

룬은 제법 진지한 눈으로 페르디키온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차피 말 해주려던 이야기였기에, 페르디키온은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만, 너무 충격 받지는 말도록 해라.”

“?”

막상 입에 올리자니 초조한지, 페르디키온은 주먹을 꾹 쥐고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나온 말은 룬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은 소식이었다.

“네가 수면기에 들어있던 사이 위대한 개혁파 대장장이이자, 네 권속인 제드 머스킷이…… 그,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

“……뭐?”

“그러니까…… 제드는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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