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들어보니 꽤 무거웠다.
룬은 이 무구의 형태가 왠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가, 일순 깨닫고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제드에게 하사했던 무기 파라리엄이잖아.’
폐광 던전에서 룬을 지킨 공을 치하하며 준 S급 배틀 엑스 파라리엄.
페르디키온 역시 무기의 윤곽을 보고 같은 결론을 내고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관해 줘서 고마워. 잘 받았어.”
이렇게 무구가 손에 들리니 한층 실감이 났다.
정말로 제드가 이 세상에 없구나. 라고.
“저희야말로 감사드릴 일이지요. 이 후에 연구과 금전적으로 누구도 받지 못할 지원을 받았으니까요. 특히 그 수많은 진주 마력석이 들어온 날, 저희 드워프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죠. 제드 상단주님은 그날 눈물까지 쏟다가 참지 못하고 애착 무기로 불까지 낼 정도였는데…… 허허. 지금은 그도 옛날일이군요.”
“제드답네.”
룬이 수긍하자 다시 한번 회환에 찬 눈빛으로 미소 짓던 드워프가 헛기침을 했다.
“엇험! 어쨌거나, 그 덕분에 신전과 마법사의 탑과 협상하기도 아주 편했습니다. 저희 개혁파 드워프들과 제드님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도움이 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잘 써먹은 모양이네.’
지금이야 거상이 된 머스킷 상회지만 그들이 처음 세운 상회는 마법사의 탑, 신전과 대등한 힘을 갖출 수 없었다.
가능한 일이라고 해봐야 대장장이 무구 특성상 굳이 따지면 마법사의 탑과 협조 정도.
하지만 진주 마력석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상회가 되자 재력과 특수성이 합쳐서 다른 거대기업의 견제, 혹은 협력을 요청 받게 됐을 터였다.
그 기회를 잘 살린 선발대 드워프들과 제드의 능력이었지만, 룬의 도움이 없었다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결과를 얻은 셈이다.
드워프가 자신의 두 손을 포개 모은 채 룬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개혁파 드워프를 비롯해, 젊은 드워프들이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제드 님이 개인적인 연락 수단이 있다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셨다고 자랑하곤 하셨으니, 이미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겠군요.”
“?”
룬은 그간 안 본 모코지석의 장문이 가득했음을 떠올렸지만,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제드 님이 세운 머스킷 상회는 명실상부 대륙 최대 상점이 되었지요. 또한 젊은 드워프들 중 연수를 명목으로 인간계에서 다양한 사회와 문화 체험 역시 가능했습니다.”
겸손한 말투에 목소리까지 부드러워서, 자칫 딱딱해 보일 수 있는 드워프의 외모가 훨씬 따뜻한 인상으로 보였다.
드워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 모든 건 페르디키온 님의 물론, 인간계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배려해주신 룬 님과 크리스티나 님, 그리고 페르디키온 님 덕분에 가능했지요.”
“큼.”
룬이 페르디키온을 슬쩍 곁눈질하자, 민망한지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그는 제 아우를 위해서. 혹은 레어 주민의 발전을 위해 알게 모르게 손을 좀 보태왔었다.
“그 외에도 재료의 아낌없는 지원. 그야말로 머스킷 상회가 부흥하게 만든 젖줄이었지요. 덕분에 저희 상회가 신전과 마탑의 협조를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
신전과 마법사의 탑.
서로 반목하는 이 두 단체의 협조는 고작 상점이 이룰 수 없는 쾌거였다.
한데 듣다보니 성과 보고를 받는 기분이라, 룬이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을 때.
“부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룬 님.”
룬은 눈앞의 드워프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챘다.
‘앞으로도 진주 마력석을 지원해 달라는 소리군.’
감성적인 말로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마무리는 제법 현실적이었다.
죽은 제드의 유품을 받을 때 이야기 하는 것도 타이밍이 적절했다.
‘드래곤 족에게 부탁을 하다니. 담이 제법이네.’
속이 뻔하지만, 인상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듣기 좋은 톤을 아주 잘 써먹는 인재였다. 룬은 피식 웃었다.
“제드가 후임을 잘 뽑았네.”
“감사합니다. 저는 그저 상단을 생각하는 진심이 통할 거라 생각할 뿐이지만요.”
적절한 부드러움과 가벼움. 그 속에 뼈가 들어있는 화법까지.
여러모로 상단에 도움이 될 드워프였다.
아마도, 상단이 이렇게 성장한 뒷배경에 이 자의 솜씨가 컸을 터였다.
“네 품속에 있는 암시장 열쇠만 봐도 알겠어. 제드가 널 많이 신임했다는 거.”
“……한 번에 알아보신 겁니까. 역시.”
감탄과 함께, 살짝 긴장한 기색까지 느껴졌다.
노련하게 감정을 컨트롤 하여 긴장감은 금세 사라졌으나, 이제 그는 아직 한참 어린 해츨링이라 여길 마음은 손톱만큼도 남지 않게 되었다.
룬이 물었다.
“이름이 뭐야?”
“머스킷 상단의 개혁파 드워프, 마론이라 합니다.”
“그래. 마론.”
제드처럼 마론이라는 이 드워프 역시 룬보다 이르게 세상을 정리할 터.
다음에 또 보자는 간단한 인사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룬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진주와 심해 몬스터 사채가 든 통을 꺼내주었다.
능숙하게 눈빛을 감추긴 했지만, 마론은 기쁜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유언장과 유품을 보관해 줘서 고마워.”
“감사합니다. 언제 오시든 룬 님은 이 상단의 귀한 분으로 모셔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론은 정중한 어투로 제드의 무덤의 위치를 확인해 주었다.
“그러고보니 페르디키온 님께서 일전에 와 보셨지요. 안내를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도 아니었으니.”
정중하게 필요한 말을 전한 마론은 제법 품위있게 배웅인사를 마쳤다.
‘마무리까지 기분 좋게 나서게 만드네. 상인 자질을 제대로 타고났어.’
룬과 페르디키온은 제드의 무덤가로 향했다.
묘비가 있는 곳은 머스킷 상단이 산 하나를 통째로 사서 만든 추모지와 납골당이었다.
추후 인간계에서 일할 드워프들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사둔 곳으로, 자리한 무덤은 제드 하나뿐이었다.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드워프들의 기본 장례는 ‘화장’이다. 불을 다루는 자들의 전통이자 평생을 불을 벗 삼아 온 위대한 대장장이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지.”
머리로 아는 것과, 추모비와 함께 눈앞에 있는 무덤을 보는 건 또 달랐다.
룬은 묘비에 적힌 문장을 읽어보았다.
<위대한 발자국을 내디딘 대장장이이자, 미래를 연 발명가. 선한 사업가. 문명을 개혁한 드워프. 제드 머스킷. 여기에 잠들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까지 어찌 할 수는 없었다.
네크로멘서의 자질과 소생언령이라면 뭔가 방도가 있었을까.
생각을 떠올린 동시에 이성과 양심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능하다 해도 해선 안 되는 일이야.’
듀라한과 흑미와는 다른 경우였다.
흑미는 삶을 다 살지 못한 혼을.
듀라한은 망자의 혼을 던전 보상으로 얻어 살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어 안식에 든 제드는 혼이 없었다.
넋이 없는 시신을 살려봐야 과거의 기억을 지닌 움직이는 유기물일 뿐.
그건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나도 멀었군.’
결국 룬은 무덤 앞에서 눈을 감고 묵념했다.
페르디키온 역시, 함께 눈을 감고 짧게 묵념 해주었다.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배틀액스, 파라리엄을 꺼내들었다.
“잘 받았어, 제드. 마지막까지 이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며. 꽤 아낀 모양이니 잘 보관할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기도 적절치 않았다.
룬은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을 골랐다.
“드워프들에게는 계속 지원해 줄 생각이야. 너는 개혁파 드워프들, 아니. 드워프족의 자부심이 담긴 무기를 대륙에 알리길 원했으니까. 그동안 고생했고, 이제 편히 쉬어.”
말을 마치고 룬은 파라리엄을 챙겼다.
“된 거냐?”
“응.”
룬이 무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을 보지 못했던 자로서 인사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에고 웨폰
룬의 대답을 들은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럼 돌아가지. 한데, 다른 녀석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생각이냐?”
“……내가 나중에 말할게. 우선 비밀로 해줘.”
아무리 룬이라지만, 흑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했다.
“……알겠다.”
여건이 되면 제드가 떠오를 때 가끔씩은 들러보게 되겠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
“우웅. 룬 님!”
“삐야악!”
레어에 귀가해 보니 백야와 흑미가 깨어있었다.
손을 위로 쭉 올리며 기지개를 켠 흑미가 천진한 얼굴로 하품을 하고는 짭짭 입맛을 다셨다.
이어 까만 귀를 만지작거리며 다듬는 모습을 보며 룬이 물었다.
“출출하냐.”
“웅, 네에. 배고파요, 룬 님.”
꼬르륵.
마침 흑미의 배에서 신호가 들렸다.
“응. 뭐 좀 먹자. 형님도 올 거지?”
“물론이다.”
“백야, 너도 와.”
“뺙!”
간결하게 대답한 백야가 룬의 어깨로 날아와 앉았다.
듀라한은 다시 검은 방으로 돌아가고, 식탁에 다른 이들을 안내한 룬은 먹을 것을 가져왔다.
“와아! 이쁘다. 장미꽃이랑 조개 모양이라니, 신기해요!”
크리스티나의 야심작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조개 모양과 꽃 모양 마카롱’.
레몬맛, 딸기맛, 바닐라맛 등 페르디키온과 흑미가 좋아할 맛의 적당히 큼직한 꼬끄와 버터크림이 가득 든 뚱뚱한 마카롱이었다.
“맛있게 먹어. 형도.”
단맛은 적당히만 즐기는 룬보다는 흑미를 위한 음식이라, 눈으로 확인만 해 뒀던 디저트였다.
노란 장미 모양으로 만들어진 레몬맛 마카롱을 집은 페르디키온은 한입 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크리스티나 님이군. 어지간한 포션보다 더 회복력이 좋아.”
“맛있다아! 흑미도 딸기맛 먹고 잠 깼어요!”
“뺘아앗!”
눈이 초롱초롱해진 흑미가 고양이 입모양이 되어 상기된 뺨을 한 손으로 쥐었다.
백야도 제 몫으로 주어진 새 모양 쿠키를 마음껏 쪼아 먹었다.
맛보기로 하나 집어먹은 룬은, 이내 평범한 견과류가 든 빵을 쥐고 버터를 발랐다.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한 견과향과 꾸덕한 버터의 감촉이 입안을 축제처럼 흥겹게 만들었다.
“햐아. 흑미 너무너무 행복해요.”
귀를 쫑긋거리며 볼에 홍조를 피운 흑미는 마카롱 옆에 있는 버터쿠키도 집어먹었다.
“그것만 먹지 말고, 식사빵도 먹어.”
“네에!”
룬의 말에 입맛을 다신 흑미가 냉큼 슬라이스 식빵 위에 크림치즈를 슥슥 발랐다.
이어, 햄과 치즈를 얹어 오픈 샌드위치처럼 된 걸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하압!”
흑미는 흐으음~! 하고 오물거리며 흥겨운 콧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빵을 또 가져와 버터를 바르고, 햄과 치즈를 얹은 오픈 샌드위치를 두 개 더 만들어 페르디키온과 룬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흑미가 만들었어요! 먹어봐요! 엄청 맛있어요!”
귀까지 쫑긋 거리며 힛. 하고 기대감에 웃는 어린 흑미의 얼굴을 보고, 페르디키온과 룬은 서로를 동시에 보았다.
“잘 먹을게.”
“흠. 잘 먹도록 하마.”
룬과 페르디키온이 차례대로 대답하고 샌드위치를 손에 들었다.
베어 문 샌드위치는 느끼할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향긋하고 고소했다.
거기에 짭짤한 햄과 치즈의 감칠맛이 제법 훌륭했다.
‘버터가 빵 맛을 제대로 살렸군.’
지난 100년 동안 틈틈이 요리 실력을 쌓은 크리스티나의 손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쯤 되면 100년 전통의 맛이라 해도 좋을 듯했다.
‘크리스티나가 생각보다 꾸준히 요리를 해줘서 다행이야.’
먹는 즐거움은 자칫 지루해지는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심지어 마법적인 효과가 있는 요리는 아무나 만들 수 없을 터였다.
“어때요? 엄청 맛있죠!”
“그렇군. 확실히 이런 음식은 여기서밖에 먹을 수 없을 거다.”
페르디키온이 맞장구를 쳐주자 흑미가 투명한 핑크색 눈을 반짝이며 룬을 보았다.
기대감 섞인 시선을 마주한 룬 역시 장단을 맞춰 주었다.
“응. 맛있다. 덕분에 잘 먹었어.”
기분이 좋아진 흑미가 두 개의 꼬리를 살랑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백야, 이거 먹어볼래?”
“삐약!”
하얀 날개를 파닥인 백야가 쫑쫑 걸음으로 식탁 위를 걸어왔다.
흑미는 슬라이스 식빵을 조금씩 뜯어 백야의 부리 앞에 내주었다.
“자!”
“뺙!”
콕콕.
부리로 가져와 식탁 위에 두고 잘도 쪼아 먹었다.
“백야도 맛있지? 나중에 제드 아저씨한테두 나눠주자!”
“…….”
룬은 흑미 모르게 페르디키온에게 절로 시선을 던졌다.
빨간머리 화룡족 소년은 묵묵히 샌드위치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기분이 착잡했다.
‘흑미라면…… 앞으로 제드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알면 슬퍼하겠지.’
게다가 룬이 말하지 않아도 이상함을 느끼는 건 시간문제였다.
흑미와 제드는 묘하게 친해서, 모코지석으로 연락을 자주 했다.
연락에 대한 반응이 빠른 제드에게 답장이 없다면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 될 터.
‘그리고 제드가 연락을 안 받는다며 날 찾아올 테고.’
흑미와 백야가 해맑게 음식을 나눠먹는 모습을 보며, 룬은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