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뭐랄까. 망했네요.
“뭐…… 그렇지.”
침묵을 지키는 제드에게, 룬은 아련한 시선으로 확인 사살했다.
“어쩔 수 없네. 한동안 넌 듀라한에게 들려있어.”
- 예에!?
제드는 장황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에고 웨폰은 기본으로 전설적인 무구에 혼이 될 자와 오랜 연이 있는 것이 가장 좋아서 그랬을 뿐이라는 둥,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둥 쉴 새 없이 주절거렸다.
하지만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확실히 편하네.
룬은 나름의 위로하는 의미로 제드가 한풀 꺾일 때까지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푸념이 끝나고 나서 나름대로 다독이듯 말을 건냈다.
“이따 흑미랑 백야를 만나게 해줄게. 마침 페르디키온 형도 있으니까 인사하면 되겠다.”
- 네에…… 그래야지요오…….
완전히 풀이 죽은 제드 녀석이 한심하면서도,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다.
“기운 내. 혹시 던전 갈 일이 생긴다면 허용해 줄지도 모르니까.”
‘어지간해선 그럴 일이 없어서 문제지만.’
다행히 제드의 멘탈 회복은 꽤 빠른 편이었다.
놀라움에 눈을 반짝이는 흑미를 보곤 금세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와아! 진짜 이 작은 진주 구슬이 제드 아저씨예요?”
- 그렇습니다요, 흑미 님! 그 새 성장하셨군요? 꼬리가 2개라니 아주 굉장하네요!
“헤헷. 맞아! 흑미 강해졌어! 그리고, 블루 드래곤 해츨링인 아멜리아 언니랑도 엄청 친해!”
- 호오. 해츨링이라. 저에게는 아멜리아 누님이 되는 건가요? 이름만 들어도 아주 예쁘실 것 같은데요!
“맞아. 엄청 이쁜 인어 모습이야! 저번에 드워프 아저씨들이 선물해 준 옷 언니가 입어봤는데, 진짜 예뻤어!”
- 오오오오! 어여쁘신 인어 누님! 어휴, 보기만 하면 눈이 호강할 텐데. 궁금해 죽겠네요!
둘은 여전히 쿵짝이 잘 맞았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의 반응은 영 떨떠름했다.
인사는 나름 평범하게 받아주었으나 아예 무기가 된 제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라는 시선이었다.
“아우님. 그러니까 곁에 있기 위해 자의로 에고 웨폰이 된 놈이라는 건가.”
“응.”
“……괜찮은 거냐? 저건 충심을 넘어서 광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중이었기에 둘의 목소리는 흑미와 제드에게 들리지 않았다.
화룡족 소년은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반쯤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게. 뭐, 할 수 없지.”
페르디키온이 룬을 홱 돌아보았다.
제 아우는 어째 이런 상황에서도 담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상하지 않은 거냐? 멀쩡하게 산 놈이 스스로 물건이 됐다지 않나.”
룬 입장에서야, 이미 제드가 저지른 일.
화장까지 해서 원래의 몸도 없는 마당에 더 생각해 봐야 다른 방도가 없으니, 그냥 두고 보자는 마음이었다.
“이상하긴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까 됐어. 무엇보다 제드 녀석이 선택한 일이고.”
페르디키온은 생각했다.
저 이상한 발상과 괴이할 정도의 실행력을 용인해 주는 것은, 똑똑한 듯 보이지만 천사같이 순한 아우의 성정 탓이라고.
“아우님이 뭘 모르는군. 저건 매드 위저드들이나 할 만한 발상이란 말이다.”
‘매드’는 주로 마법사의 탑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붙곤 하는 수식어였다.
속칭 광기를 표현하는 단어인데, 원래는 몬스터에게 주로 붙이는 수식어였다.
‘한 마디로 머리가 돌아버렸다는 그치들 이야기인가 본데.’
또 다른 놈들에게 싸이코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지만,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라는 게 공통적 특징이었다.
광기나 미치광이나. 도긴개긴이니까.
“매드 위자드 놈들도, 매드 매지션 놈들도 다 똑같이 미친놈들이었어. 별거 아니라고 그냥 뒀더니 나중에 광인이 돼서 나타나는 놈들이었단 말이다.”
질린 듯 설명하는 걸 듣고 있자니 묘했다.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는 것이, 직접 보고 겪은 듯 묘하게 구체적이었다.
“형, 마법사를 직접 보고 온 것처럼 들리는데?”
“…….”
표정부터 구겨진 페르디키온을 보니 확실했다. 룬의 눈빛이 반짝였다.
‘봤네. 봤어.’
지그시 페르디키온을 보자, 화룡족 해츨링은 아차 싶은 얼굴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룬은 여유롭게 질문을 던졌다.
“형이 보고 온 매드 매지션은 어땠는데?”
“몰라도 된다. 어린 네게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물론, 페르디키온의 말도 납득은 갔다.
하지만 전생에도 맛이 갔다는 놈들은 꽤나 봐왔던 룬이다.
고작 별칭이 미쳤다는 수식어가 좀 붙었다고 놀라거나 심적으로 영향 받을 자가 아니었다.
‘꼭 이걸 밝히지 않아도 방법이 있지.’
룬은 아쉬운 척 과장된 한숨을 쉬더니 여유롭게 말을 돌렸다.
“아쉽네. 직접 겪어본 게 사실이라면 누구보다 신뢰하는 형님에게 직접 전해 듣고 싶었는데. 형님이라면 그 놈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잘 알려줄 거잖아?”
“……!”
붉은 머리 해츨링이 움찔 거리는 게, 입질이 제법 괜찮았다.
룬은 속으로 씨익 웃었다.
“하지만 형님이 정 그렇게 말한다면야…… 지금은 묻지 않을게. 안 그래도 제드가 어떻게 에고 웨폰이 되었는지 말하고 싶어 하니까 직접 들어보면 되거든. 마침 마법사의 도움을 받은 것 같으니 설명해 줄지도? 아니면 크리스티나가 말해 줄지도 모르고.”
“크흠! 기다려봐라, 아우님.”
페르디키온이 룬을 제지했다.
크리스티나의 경우, 룬에게 말 해줄 확률은 반반이었다. 해츨링의 안전을 염려하는 한편, 베풀 수 있는 건 얼마든지 베푸는 성정을 지닌 그녀였으니.
문제는 제드였다.
저 입방정을 떠는 놈은 룬이 물어보면 신나서 이야기 해 줄 게 틀림없었다.
솔직히 말해 페르디키온은 룬이 제 권속이라고 제드의 말만 듣고 믿어주는 건 싫었다.
심지어 제드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기는 도구였다. 한데, 고작 무구가 되기 위해 생명을 스스로 바쳤다니.
물론 제드에게 나름대로 속사정이 있었지만, 페르디키온이 보기에는 무척 이상해보였다.
“……내가 말 해주마. 차라리 제대로 알려줄 자에게 듣는 게 낫겠지.”
결국 페르디키온이 수긍했다. 룬은 무해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워, 역시 형님이 최고네. 직접 겪어본 형님이 말해 주면 그것만큼 믿을 만한 정보는 없을 거야.”
‘좋아. 잘 넘어왔군.’
페르디키온은 칫, 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른 놈들에게 잘못된 정보 듣지 말라고 말 해주는 거다. 특히 저놈.”
화룡족 소년의 눈이 흑미와 떠드는 듀라한 손 안의 배틀 액스를 노려보았다.
왠지 모를 한기를 느낀 제드가 주위를 살폈지만 그 원인이 누군지는 찾지 못했다.
시선을 뗀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룬. 마법사가 어떤 자들인지는 알고 있나.”
“대충은 알아.”
‘전생의 도술 좀 부릴 줄 아는 놈들이랑 비슷했지.’
크리스티나의 지식을 토대로 전생에 이름 좀 날린 무당, 법사, 도사 등을 떠올린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양한 종족이 마법사의 자질을 가졌다. 드래곤이 이 세계의 근원이 되는 속성을 품고, 또 퍼트리는 존재라면, 마법사들은 그 힘을 활용하는 자들을 일컬지.”
크리스티나의 지식으로 표현하기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표현하기도 했다.
드래곤이나 천족, 그리고 마족처럼,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특정 속성을 만들어내는 존재인 생산자.
그를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소모하는 소비자.
페르디키온이 말을 이었다.
“보통은, 그 힘을 사용하는 방법이나 식을 연구하는 정도에 그친다만. 가끔 아주 미친 생각을 하는 놈들이 나오기도 하지.”
“예를 들면?”
영 말하기 싫은 눈치로 눈썹을 꿈틀거린 페르디키온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생명 창조를 넘보는 자들. 특히, 내가 본 중 최악은 키메라 제작자였어.”
“…….”
“그놈들이야말로 악마 같은 치들이지. 목적을 위해 제 동족은 물론, 드래곤을 사냥하려 들기도 했으니. 천마전쟁과 용마전쟁 때 드래곤의 시체를 수집한 마법사 놈들이 있다는 건 이미 역사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같은 인간끼리도 하지 않을 짓을 저질렀다는 말에 룬 역시 목덜미의 비늘이 차르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말을 이어가는 페르디키온에게서 혐오가 그대로 느껴졌다.
“제드 녀석이 한 에고소드 연구도 비슷하다. 특히 마검의 제작 방법은 산 자의 혼을 써야만 만들어지는 것. 그 방법을 거부감 없이 사적으로 연구하고 쓰는 건 미친 마법사들이나 할 짓이 아니겠나.”
듣고 보니 왜 끔찍하게 싫어한 건지 이해가 갔다.
제드의 에고 소드화 한 방법에 대한 찝찝함도 그렇지만, 생명을 하나의 재료로 다루는 감각은 어떤 말을 해도 쉽게 볼 일이 아니다.
‘잘 성장하고 있군.’
어쩐지 후배를 보는 느낌까지 들었다.
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앞으로 일, 이백 년이 지나면 페르디키온은 어엿한 성체 드래곤이 될 터.
하지만 그 때도 페르디키온이 지금처럼 순수해 보이리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룬, 왜 웃는 거냐?”
“뭐, 그냥. 형은 늘 그대로 있어줄 것 같아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페르디키온은 오묘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중얼거리듯 ‘고맙다.’라고 이야기한 그는 잠시 빈 공간에 시선을 두었다가 룬을 바라보았다.
“비록 네 본질은 어둠이라지만, 너는 불의 일족이 응당 지녀야할 용기와 의리를 가진 녀석이다. 나는 그런 아우님을 높게 평가하고 있지.”
불의 일족 소년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앞으로도, 내 불의 형제로서 함께 해다오.”
‘페르디키온이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단순히 향기 상자의 효과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시기로 보면 진명을 알려준 덕일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룬은 페르디키온의 진심을 느끼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그렇게 여겨줘서 고마워, 형.”
‘페르디키온과 아멜리아, 크리스티나. 심지어 백야와 흑미, 제드와 듀라한까지. 이번 생에서는 좋은 녀석들을 많이 만났어.’
좋은 치들과 연을 맺는 건 그 자체로 복이었다.
전생에 워낙 박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인지, 이 기연들의 유무가 더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말이다만, 룬.”
“응?”
‘답지않게 왜 뜸들이지?’
그 답은 다음 말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가끔은 서로 본체화 하고 편하게 보는 게 어떻겠나.”
‘본체화?’
하기사, 폴리모프 팔찌로 모습을 바꾼 것은 편의성과 힘 조절 같은 실질적 이득 때문일 뿐.
편하기는 해츨링의 모습인 편이 훨씬 편했다.
‘흑미가 너무 안겨들려 해서 자제했던 것뿐이기도 하고. 페르디키온과 같이 하고 있으면 괜찮으려나.’
룬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흑미를 슬쩍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네.”
“……!”
페르디키온의 눈이 커지며 입까지 약간 벌어졌다.
그러나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번복은 없는 거다.”
“? 그래.”
‘다짐까지 받을 일인가?’
최대한 티 안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입꼬리를 미미하게 실룩이는 거나 어깨를 움찔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의문스러운 눈을 한 룬을 슬쩍 본 페르디키온은 흐뭇하게 웃어주었다.
사실 페르디키온은 룬이 마음을 영 감추는 느낌을 받아왔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표현하는 걸 자제하는 느낌이었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모든 걸 편히 이야기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아우가 조금은 자신을 드러내주는 게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어깨춤을 들썩이고 싶을 정도로.
허락해 주십쇼!
하지만 룬 앞에서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기에, 페르디키온은 최대한 자제심을 발휘했다.
“보통, 본체화 했을 때는 전음을 쓴다. 아직 모른다면 알려주마.”
“아, 그건 크리스티나 덕분에 알고 있어.”
대꾸한 룬이 팔찌를 빼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뀨.”
[확실히 편하네.]
“캬.”
[진작 솔직히 말 해볼 걸 그랬군.]
“뀨우?”
[형은 전부터 본체화로 만나고 싶었던 거야?]
“캬아. 캬.”
[물론이다.]
룬의 물음에 페르디키온이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캬아욱.”
[여러 가지 편의나 상황 때문에 인간형의 모습으로 대했을 뿐. 아무래도 이쪽이 우리의 본 모습이지 않나.]
하긴, 친한 친구끼리는 잠옷 입은 모습이라도 거리낌 없이 보일 수 있는 법.
의형제라고는 하나, 그간 참 정 없이 보였겠다는 생각이 든 룬이 피식 웃었다.
“뀨우.”
[그랬구나. 사실 나도 말하기 편해서 쓰는 모습이긴 해. 전음은 제대로 전음을 쓸 수 있는 상대에게만 사용 가능하잖아.]
“캬우, 캬우.”
[이해한다. 나 역시 레어 주민인 드워프들을 다스려야 하기에, 귀찮지만 인간형의 모습을 쓰곤 했으니.]
게다가 인간 세상을 주유하기 위해 변신 능력은 꼭 필요했을 터였다.
“뀨뀨. 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