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콕!
모콕!
모콕!
다음 날 이른 새벽, 룬은 수마에서 강제로 깨우는 모코지석 알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뀨으으…….”
‘시끄러워.’
흑미가 가끔 이런 연속 알람이 울리긴 했지만, 아직은 한창 잘 시간이었다.
끄응, 하고 몸을 일으킨 룬이 반짝 거리는 모코지석을 확인했다.
한참 전부터 글자가 올라갔는지 어마어마한 양의 글자가 단번에 떠올랐다.
글자의 송신자는 모두 제드였다.
안부와 함께 듀라한과의 일상이 어떤지 시시콜콜 떠드는 글자들이었는데, 눈에 다 들어오기엔 너무 많았다.
‘……제드 녀석이 진주 마력석에 모코지석 기능까지 넣었었군.’
이기적인 재능 사용에 질린 룬은 즉시 무음모드로 바꾸었다.
무음이 되어도 불빛이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모코지석.
그 바람에, 룬은 모코지석을 집어 배게 밑 깊숙한 곳으로 쑥 밀어 넣어서야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다시 잠에 들려고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생전에 수신 차단 기능을 만들게 해야 했어.’
한번 잠이 깨니 제대로 잠이 오지도 않았다.
룬은 결국 피곤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덥.
“뀨으읏”
네 발로 땅을 디딘 그는 뻐근한 등줄기와 꼬리 끝을 쭉 폈다.
몸 위로 평화롭고 따사로운 햇살이 느껴졌다.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한 것을.’
어쨌든, 사태는 룬이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매번 모코지석을 치워둘 수도 없고. 적당히 좀 하라고 말 해야겠어.’
모코지석에 글자로 쓰는 것 보다 직접 보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제드를 만나기 위해 룬은 검은 방으로 이동했다.
한데 듀라한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철……컥!
‘?’
인사는 제대로 했지만 음울하고 피로해 보였다.
언제나 든든하고 우직하여 지치는 법이 없던 듀라한.
그는 다른 것도 아닌 제드의 밤샘 수다에 지쳐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상황을 확인한 룬은 황당하여 눈을 깜빡였다.
‘수다를 얼마나 해대는 거야?’
기분 탓인지 듀라한이 수척해보이기까지 했다.
위기를 느낀 룬은 우선 황금 팔찌를 끼고 대화하기 편한 모습으로 변했다.
“제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 룬 님! 이거 저를 보려 오셨습니까? 안 그래도 듀라한 녀석과 룬 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대화하는 건 좋지만, 저 녀석은 좀 지쳐 보이는걸. 대화는커녕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데.”
뭔가 찔리기는 했는지, 제드가 말을 슬그머니 더듬거렸다.
- 그거야…… 사실 그렇기는 합니다. 알고는 있었는데 말입죠…… 이게, 나름대로 제 사정이 있긴 했거든요.
“무슨 사정이 있는데?”
- 몸이 없는 사정이요.
“?”
뭔 사정?
룬의 시선이 의문으로 변하자 제드가 나름 진지하게 단어를 골랐다.
- 에고 소드가 되고 나서 저는 육신이 아닌 마나로 감지를 합니다. 근데 이게 도저히 적응이 안 돼서 말이죠. 한 곳에 가만히 갇혀있는 게 영 성미에 안 맞는 탓인지. 뭔가 직접 만지지도, 보지도 못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답답해 미치겠습니다요. 신체 기능이 지칠 염려도 없고 주변 기운이야 잘 느껴지니 신기하긴 한데, 아, 참 아쉽단 말이죠.
예전에 몰래 암시장을 들락거리던 녀석 다운 말이었다.
마력 열쇠가 없었다면 대륙으로 탈주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놈이다.
- 제가 제드가 아닌 기분이 들 때도 종종 들기도 하고요. 이러다 시간 좀 지나 기억이 희미해지는 순간 지금 모습을 잃을 것만 같아서 무서워지네요. 저도 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이란 게 있는 건지. 그런데 저를 아는 녀석들과 떠들다 보면 예전 모습을 되새기게 되잖습니까? 이게 꽤나 도움이 됩니다. 그거라도 안 하면 정말 잊혀질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기도 하고…….
“망각 부작용이 생겼다는 말이네.”
모든 성공적인 결과가 꼭 좋게만 끝나지는 않는 법이다.
몸은 없이 마력으로 주변을 지각하는 감각만 있는 상태는 이질감을 안겨주었다.
룬은 다소 안타까운 시선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 아니! 뭐 그리 안타깝게 보시고 그러십니까? 제가 어디 쉽게 포기하는 거 봤습니까? 아무튼, 후회하는 건 아닙니다. 이런 부조리함조차 겪어본 적 없는 일이다보니, 뭔가 새롭기도 하거든요. 오래 사는 치들 기분도 상상해보고, 저에게 앞으로 뻔하지 않은 미래와 미지의 것들이 다가올 걸 생각하면 기대도 생기고 즐겁습니다요.
늙어 죽어갈 뻔한 미래보다 더 좋은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고 자신을 온전히 바꾼 녀석.
방식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어찌 보면 대단한 녀석이었다.
룬은 순수하게 그 점을 입에 올렸다.
“알아. 솔직히 미쳤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니까.”
-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룬 님의 칭찬이라. 나쁘진 않군요!
제드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지치지 않는 몸이 된 제드.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은 꽤나 견디기 힘들 터였다.
말로는 개의치 않아 했으나, 원체 과묵한 듀라한과 검은방에서만 주로 있어야 하는 것도 제드로서는 예상 못한 일이었을 터였다.
‘드워프의 혼으로 에고 웨폰이 된 건 정말 대단한 놈인데…….’
애초에 평범한 드워프의 혼으로 에고 웨폰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성공한 이유는 룬의 권속으로서, 드래곤의 힘을 아주 일부라도 만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개 드워프의 혼만으로는 불가능한 업적을, 수십 년 이상 몸에 깃든 권속의 힘을 연구해 결실을 맺었으나 제드 본래의 혼은 이를 온전히 견뎌내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이대로 가만 두면, 제드의 혼은 시간이 갈수록 마모되고 변질되어 갈 테지.’
그래도, 저렇게까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휴.’
덕을 쌓았던 전생의 업인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진 룬은 제 머리를 긁적이며 푸념했다.
“골치 아프네. 너무 대책 없이 시도했던 거 아니냐, 제드.”
- 으허허! 이거 룬 님께서 제 걱정이라도 해 주시는 건가요?
“걱정은 되지. 게다가 이런 마법은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했어야 했다고.”
퉁명스럽게 말은 했지만, 머리는 부지런히 굴렀다.
마침 떠오른 방법이 있긴 했다.
“네가 얼마나 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난 게 있는데. 들어 볼래?”
이야기를 들은 제드가 연신 호오, 호오! 하며 감탄을 했다.
- 이야! 룬 님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니! 이 제드, 역시 제 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요!
“당장 되는 건 아니야. 재료도 필요하고, 연습도 해야 해.”
- 제게 남은 거야 이제 시간뿐인걸요! 괜찮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데요!
화륵!
파라리엄의 불꽃무늬에서 진짜로 불이 일었다.
룬이 물끄러미 갈색 진주 부분을 보자, 실실 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 이야아! 다시 움직일 수 있겠구나. 아이고, 생각만 해도 좋다!
후륵! 후르륵!
‘언제는 후회하지 않는다더니.’
눈치라도 보듯 좀 전보다 작아진 불꽃이 피어올랐다.
듀라한이 불에 해를 당할 염려가 없기도 했고, 룬 역시 불의 인장 소유주니 상관없었으나.
“여기 있는 물건들은 블랙 드래곤 일족 유품이다. 불 꺼라.”
- 옙.
순식간에 불길이 잠잠해졌다.
그러면서도 제드가 슬금슬금 주절거렸다.
- 어쩐지, 주변 느낌이 뭔가 심상치 않다 싶었습죠. 함부로 섞여선 안 될 것 같아 자세히 살피지 않았지만, 블랙 드래곤의 유품이라니.
호기심도 강한 녀석이 위험한 기운은 잘도 피했다.
“잘했네. 대부분 저주가 담겨있으니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게 나아.”
- 어휴, 무서워라. 큰일 날 뻔했네요.
너스레를 떨면서도, 은근히 입맛을 다시는 기색이 느껴졌다.
제드로서는 그림의 떡인 것들만 잔뜩 깔린 셈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러고 보니 새벽에 본 제드의 모콕 내용 중 하나가, 물건을 살펴보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지.’
어쩌다보니 그 대답을 해 준 셈이 되었다 생각한 룬이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이 일은 크리스티나에게 허락을 구해야 해. 조만간 연습용이라도 만들어 줄 테니, 너도 사용해 보고 쓸 만한지 가늠해 봐.”
- 옙! 주군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요!
희망이 생긴 덕인지 난감하게 말해오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기운 차 보이는 모습에 룬은 당부를 남겼다.
“……그리고 듀라한에게 혼자만의 시간도 좀 주고.”
- 음, 그건 많이 어렵지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철컥. 철커덕!
투구가 들썩이며 녹빛 안광을 일렁인 듀라한의 시선이 안쓰러웠다.
둘을 뒤로하고 룬은 크리스티나가 있을 요리실로 이동했다.
“잘 잤니, 룬? 일찍 일어났구나.”
“응. 좋은 아침. 크리스티나.”
예상대로 아침을 준비하던 참인지 크리스티나가 먼저 와 있었다.
그녀가 알록달록한 식용꽃을 골라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룬 역시 재료를 다듬기 위해 손질용 장갑을 꼈다.
우선, 제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미리 해 두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크리스티나. 나 새로운 걸 할 수 있게 됐어.”
“새로운 것?”
“응. 진주마력석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야. 인형 제작이라고 해.”
이어진 룬의 설명은 들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질한 식용꽃을 유리병에 담았다.
“<저주 도구 만들기 세트>라니. 그런 건 언제 얻었니?”
“형님 레어에 들렸을 때 구했어. 제드가 마력 열쇠를 사용해서 갈 수 있는 시장이 있는데, 거기서 팔더라고.”
“룬, 너 설마 또 위험한 곳엘 간 건.”
샐러드용 채소를 물에 씻어내던 크리스티나는 엄한 시선을 룬에게 던졌다.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룬은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
“아니야, 진짜로 그냥 시장이었어. 애초에 재료 수급을 주로 하는 드워프가 무장 없이 들어갈 정도잖아. 나는 이동 마법도 할 수 있고, 여차하면 크리스티나의 귀환석도 있었어. 그리고 드워프들은 페르디키온 형의 의동생인 날 절대 해칠 수 없잖아?”
한동안 지그시 룬을 보던 푸른 눈이 결국 봐주려는 듯 느슨하게 힘을 풀었다.
“그래도 조심하렴. 상황이 늘 예상대로만 흐르진 않는단다. 이러다 정말 내가 늘 따라다녀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구나.”
“걱정 끼친 건 미안해.”
염려 탓에 가벼운 잔소리를 동반하긴 했지만, 손을 씻은 크리스티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룬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태생적으로 저주에 면역이 있으니 구매한 거겠지만, 아직 너는 해츨링이잖니. 모르는 곳에 이동하거나 그런 물건을 매입할 때는 늘 신중해야 한단다.”
룬은 무해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종종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화기애애하게 마무리 되었다.
‘좋아.’
너무 자세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제드가 룬에게 언령 마법으로 비밀을 강제하려 했다는 것까지 이야기가 나올지도 몰랐다.
갈색 드래곤 란드
상냥한 그녀지만, 제드 때문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을 알면 진노할 것이 눈에 훤했다.
‘사실 제드 녀석이 그리 잘한 건 아니지.’
100년 전 일이라 제드 녀석은 거의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처사였다.
하지만 그 일 덕분에 요정의 길을 획득할 수 있는 <마력 열쇠>를 손에 넣었다.
열쇠가 없었다면 블루 드래곤 일족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었으니 전화위복인 셈이기도 했다.
사실 크리스티나에게 말할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이 <저주 도구 만들기 세트>의 판매자가 ‘마족’이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어느 쪽이든 크리스티나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군.’
룬은 속으로 안도하며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결론을 입에 올렸다.
“아침에 제드와 이야기를 해 봤는데, 혼만 남아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본래 제드의 마음을 유지하기가 힘든가 봐. 그래서.”
만들어진 샐러드 위에 뿌릴 소스통을 고른 룬이 말을 이었다.
“녀석이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을 만들어 주고 싶어.”
크리스티나가 신선한 야채와 토마토. 생 치즈가 얹어진 샐러드 위에 식용꽃을 올리며 물었다.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가 있을 것 같구나. 내 도움이 필요한 거니?”
“맞아. 크리스티나, 엘프랑 친하지?”
손을 멈춘 크리스티나가 룬을 내려다 보았다.
“그건 어떻게 추측해낸 거니?”
“어, 혹시나 했는데 정말 맞았어? 크리스티나가 구해오는 이 식용 꽃과 허브들도 엘프가 사는 지역에서 난 거길래 그렇게 짐작했었거든.”
룬이 살짝 능청을 부렸다.
그저 짐작일 뿐이라는 듯 말했지만, 사실 확신을 가지고 던진 말이었다.
받은 전승 지식에는 엘프가 사는 지역에서 나는 마력이 담긴 약초나 풀, 채소, 과일.
그리고 평소 즐기는 홍차 잎의 정보 또한 존재했다.
크리스티나가 요리에 관심을 가지기 전부터 즐긴 기호품인 홍차.
일정한 품질과 맛. 향기를 유지하며 제공하는 누군가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일까 생각도 해 봤지만, 마력이 들어간 재료를 찻잎으로 소모하려면 수급이 편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거든.”
어쩌다 한번 마시는 귀한 품목이 아닌, 언제든 편하게 즐길 정도로 생산할 수 있는 자.
자연스럽게 숲의 가호를 다루는 엘프가 떠올랐다.
“영리하구나. 사소한 것들을 보는 눈, 알고 있는 지식으로 다음을 예측하는 능력. 어린 해츨링이 쉬이 가지기 어려운 능력인데.”
‘너무 알은 체했나?’
속으로는 식은땀이 났지만, 태연히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칭찬해 주는 거지? 고마워, 크리스티나.”
다행히 크리스티나는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답했다.
“어떨 때는 네가 참 어른스럽고 영리하지만, 때때로 위험을 모르고 다니는 걸 볼 때면 아직 어린 해츨링이기는 하고…… 가끔은 알다가도 모를 기분이 들곤 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