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242)

“아하하…….”

‘이걸 좋아해야 하나.’

룬의 어색한 미소를 머쓱함으로 받아들인 크리스티나가 쿡쿡 숨죽여 웃었다.

“그 치에게 연락해 둬야겠구나. 혼자 가지는 않을 테고, 누구와 가니?”

“흑미랑 듀라한. 형님에게는 물어봐야 해.”

“파시야스라면 분명 허락해 줄 거야.”

자세히 묻지 않았지만, 룬 역시 그러리라 짐작했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을 아끼는 페르디키온이야 말 할 것도 없다.

파시야스는 엘프들을 드워프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취급을 하지만, 룬이 크리스티나의 주선으로 엘프들을 포섭할 가능성을 생각해 페르디키온을 보낼 터.

‘계륵 취급이지.’

띵!

오븐에서 소리가 나자 크리스티나가 뚜껑을 열었다.

꺼낸 판 위에는 바삭한 낙엽모양의 황금색 쿠키가 별가루처럼 설탕옷을 입고 반짝였다.

나란히 구워져 나온 쿠키에서 달콤한 향이 흘러나와 공간에 스며들었다.

하얀 볼에 담겨 완성된 샐러드와 쿠키를 사이에 두고, 룬과 크리스티나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들 불러오렴. 페르디키온에게도 연락 해 주고.”

“응. 지금 연락할게.”

룬은 모코지석으로 흑미에게 백야를 챙겨 오라 전하고, 페르디키온도 식사에 초대했다.

***

“엘프를 만나러 간다면, 엘프들의 왕국 ‘루엘토투라’에 가게 된단 말씀이십니까.”

파삭!

페르디키온은 야무진 소리를 내며 황금 낙엽쿠키를 깨물었다.

하지만 달콤하고 맛있는 쿠키와 달리, 표정은 풀을 씹은 것처럼 미간이 좁혀져 있었다.

“엘프들은 드래곤 족을 싫어할 텐데요? 전대 그린 드래곤 중 하나가 워낙…… 무책임한, 아니. 이상한 짓을 해 놔서.”

페르디키온 나름대로 말을 고른 거겠지만, 소용없었다.

흑미가 백야에게 쿠키조각을 나눠주다가 페르디키온에게 물었다.

“페르디키온 님, 무책임한 짓이 뭐예요?”

“있다. 희대의 병신짓.”

뇸뇸거리며 쿠키를 오물거리는 흑미의 질문에, 페르디키온은 단칼에 그렇게 대답했다.

갸웃거리던 흑미는 백야를 바라보았다.

“페르디키온 님이 또 멘티코어처럼 됐어!”

“삐……?”

부리에 쿠키 가루를 묻힌 백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곤소곤 이야기했지만, 룬에게는 모두 들렸기에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맨티코어가 뭐냐.’

크루아상의 결을 부드럽게 찢은 크리스티나가 작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내가 알고 지낸 자는 각 종족의 상황과 관계없이 대해줄 거야.”

“처음 들어봅니다. 엘프 족에 그런 분이 있으셨다니.”

페르디키온의 의문에 크리스티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실은…… 엘프가 아니란다.”

“?”

이번에는 룬이 의아한 눈을 하고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엘프와 아는 사이일 거라 확신했었는데, 이제 와 아니라니.

“그의 이름은 ‘란드’. 아마 너희에게는 ‘란델’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겠구나.”

“윽.”

“으앗! 페르디키온 님, 괜찮아요? 호 해요. 호오!”

‘란델’ 이라는 이름을 듣고 쿠키를 베어 물려다 혀를 깨문 페르디키온이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깜짝 놀란 흑미가 발을 동동 구르며 다가갔고, 페르디키온은 쿠키를 두고 흑미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룬이 입을 열었다.

“……숲의 인장을 포기하고 은거한다는 그 갈색 드래곤 말이야?”

“그렇단다.”

희대의 멍청한 드래곤이자 전쟁 포기자, 혹은 도망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은 자, 란델.

그는 한 때 그린 드래곤이었으나, 지금은 숲의 인장이 없는 지룡(地龍), 갈색 드래곤이었다.

“와, 갈색도 있어요?”

“원래는 없지. 그가 유일할거야.”

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자 흑미가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반짝였다.

“크리스티나 님께서 그런 비겁자와 아시는 사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페르디키온이 최대한 공손하게 말하려 노력했으나, 비난 섞인 시선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드래곤의 의무를 저버린 자를 향한 혐오의 시선이 하얀 테이블 보 위로 떨어졌다.

“바보 같은 짓을 한 자이지.”

한숨 섞인 크리스티나의 말에는 옅은 탄식이 숨어있었다.

“하지만 룬이 권속을 위해 엘프들의 보물을 얻어 오려면 그의 협조가 필요할 거란다.”

“…….”

당장이라도 페르디키온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올 것처럼 표정이 험했다.

‘저걸 어쩌냐. 조금만 수틀려도 육두문자 튀어나올 것 같은데.’

어쨌든, 염려는 되지만 페르디키온이 룬을 곤란하게 만들 성정은 아닐 터.

룬은 페르디키온의 태도에 대해서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언제 갈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좀 전에 확인해보고 왔는데, 언제든 괜찮다고 그러더구나.”

룬의 질문에 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

미간을 구겼던 페르디키온은 눈초리마저 불만스러워보였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불의 레어에 정리할 일이 조금 남았다. 하루 정도면 되니 그 이후로 편하게 잡아라.”

“삼일 뒤로 할게, 형. 충분히 정리하고 와.”

페르디키온은 하루면 된다 했지만, 돌아올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외출이었다.

드워프들에게 급하지 않게 일이 전달되고, 정리될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페르디키온 녀석은 일이 빨리빨리 안 되는 꼴을 보면 급해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유능한 드워프들이 있다 해도 하루 만에 주변을 정리하려 들면 아쉬운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페르디키온은 룬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만반의 준비를 해 오도록 하지.”

화룡족 아이는 어쩐지 비장해 보이는 표정으로 크리스티나의 레어를 떠났다.

“흑미는요? 저도 준비해야 하는 거 있어요?”

“뺫!”

양 날개를 파닥이며 백야가 호응했다.

벌써부터 의욕이 가득 찬 둘의 시선이 룬에게 꽂혔다.

“흑미는 장미뿌리에 검은 마력석 많이 모아 둬. 며칠 걸릴지 모르는 길이니까. 그리고 제드 말동무 좀 해줘라.”

“네에!”

“백야, 너도 따라가.”

“삐약!”

‘이걸로 듀라한 녀석도 좀 쉬겠지.’

백야와 흑미가 접시를 비우고 자리를 뜨자 자연스럽게 룬과 크리스티나 둘만 남게 되었다.

“크리스니타, 뭐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아?”

“물론이지.”

무해한 시선이 잠시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란드라는 드래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물끄러미 그녀를 보며 물어오는 룬에게 크리스티나가 살짝 미소지어보였다.

“무슨 말이니?”

“완전히는 아니지만. 란드에 대한 지식 중에 이상한 게 있어서. 란드라는 드래곤은 엘프랑 결혼했잖아.”

이번에는 크리스티나가 놀란 얼굴로 룬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전승 마법에 담긴 지식 중, 500년은 넘어서야 깨닫게 될 지식까지 입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룬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란드는 아내와 자식을 전쟁으로 잃었다고 기록되어있어. 관점의 차이일지는 모르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는 전쟁 피해자라고 쓰지, 전쟁 도주자라고 쓰지 않을 텐데 그게 이상해.”

또박또박 이어진 말에 크리스티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재일지도 모른다 여겼지만, 지식을 받아들이는 폭이 이렇게나 클 줄은 몰랐구나.’

“대단하구나. 벌써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니.”

한 때 넓은 숲을 이루고 살았던 엘프들.

전쟁으로 사망하거나 숲을 잃은 그들에게 손을 내민 건, 당시 그린 드래곤 란드였다.

엘프들은 란드의 ‘언령 마법’을 통해 드래곤의 수호와 안전을 보장받고, 엘프의 우호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여기까지는 룬도 원래 알던 내용이었고, 언급한 부분은 수면기가 끝난 후 드러난 내용이었다.

“나도 몰랐는데, 수면기를 지내는 동안 새로 열린 지식인 것 같아.”

“멋지구나.”

살풋 웃어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란드와 사랑에 빠진 엘프는 엘프 왕국의 공주였단다. 사실, 엘프들은 드래곤인 란드의 유희 상대일 거라며 엘프 공주님을 내 주지 않으려 했어. 하지만 결국, 둘은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단다.”

‘드래곤이 유희 중 만난 거라면 반대할 만한데. 엘프왕국의 공주라면 가장 귀한 자일 테고. 어떻게 결혼까지 갔지?’

고개를 갸웃, 하는 룬의 모습은 더더욱 크리스티나에게 난처한 웃음을 짓게 했다.

“그 때 란드가 엘프 왕에게 ‘진명으로 된 언령’으로 약속했단다. 공주와 공주의 직계 가족들을 평생 보호하겠다고 말이야.”

말하면 알 거야

신기한 이야기였다.

드래곤의 유희는 그저 한 순간의 놀이일 뿐.

긴 삶 속에서 종종 누리는 즐거움이기에, 유한한 생을 사는 이들을 진심으로 반려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문 편이었다.

‘가끔 상대가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경우는 있지만, 죽고 나서는 드래곤으로 돌아오는데. 저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지.’

당시 란드의 나이를 천 살 초중반 정도.

드래곤의 평균 나이를 생각하면 혈기 넘치는 젊은 나이긴 했다.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창 패기 넘치는 시기의 드래곤임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지만 결국 둘은 국왕의 허락을 받아 결혼할 수 있었단다.”

룬이 평범한 해츨링이라면 ‘그럼 란드는 언령을 걸 정도 좋아했어?’라고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어조가 밝지 않았다.

분명, 룬은 이 뒤에 이어질 이야기는 비극이리라 짐작했다.

‘결국 행복하게 잘 마무리 되었다, 라는 민담으로 끝나진 못한 모양이군.’

룬은 전승 지식을 통해 얻은 엘프와 그린 드래곤의 관계를 떠올렸다.

나무와 숲을 만들어 내는 그린 드래곤.

숲에 터를 잡고 사는 드루이드이자 사냥꾼들인 엘프.

둘 모두 숲과 관계된 이들이지만, 서로 필요한 일 외엔 관여하지 않는 사이기도 했다.

엘프는 오직 엘프만을.

그린 드래곤은 오직 그린 드래곤만을.

딱히 불화도 없지만 화목하지도 않은 관계로 둔 것.

그것이 그린 드래곤과 엘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던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두 종족 모두 폐쇄성 강한 탓이란 거지.’

그런 종족들이니 서로 접점 없는 삶을 살던 엘프와 드래곤이 사랑에 빠진 일은, 그 당시에도 꽤 이슈가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엘프족은 순혈 주의.

그린 드래곤이야 원래 개인주의적 성향이 있었다지만, 동화도 아니고.

엘프왕 정도 되는 자가 기존 문화를 쉽게 무시했을 것 같진 않았다.

‘엘프왕이 드래곤 사위를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뭐였을지 궁금하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란드라는 드래곤의 언령 수호인가.’

엘프의 수명은 긴 편이지만, 드래곤보다는 짧다.

직계 대대로 드래곤 언령의 수호를 받으며 몇 세대를 이어갈 수 있다면, 후대를 위해 선택할 법도 했다.

“그리고 천 년동안 이어진 마족과의 전쟁. 천마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끔찍한 광경이 연일 이어졌고, 엘프들 역시 마족들의 침공을 피하지 못했어. 란드는 엘프왕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그린 드래곤 일족과 합류하지 않고 엘프들을 지켰단다.”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친 크리스티나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마족에 의해 아내와 아이를 잃게 되었어. 이는 진명을 걸고 했던 언령을 위배한 행위였기에, 그 대가로 드래곤으로서의 권능과 능력 일부를 잃었지.”

이어진 뒷내용 역시 입맛이 썼다.

분명 룬이 어린 해츨링인 점을 감안해 최대한 순화해서 이야기 했을 터인데도.

“하지만 란드에게는 아직 ‘숲의 인장’이 남아있었어. 어쩌면 그에게 남은 유일한 힘이자, 권능이었지. 하지만…… 그는 ‘숲의 인장’을 엘프에게 넘겼어.”

“…….”

숲의 인장. 또 다른 말로 ‘생장의 인장’이라 불리는 그린 드래곤 일족의 힘.

언령을 걸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은 드래곤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을 저지른 셈이었다.

하지만 인장의 양도는 또 다른 문제였다.

룬이 미간을 살짝 움찔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더 이상 드래곤으로서 살지 않겠다는 거잖아.”

세상에 숨만 붙이며 살 뿐, 드래곤 일족이라 불릴 수 없었다.

“그렇단다. 그 일 후로 본체화한 적도 없고, 외모도 엘프 란드의 모습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지. 란드 역시, 란델이라는 드래곤은 이제 없다고 이야기하곤 해.”

“…….”

룬은 페르디키온이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엘프 왕의 진노가 있었다지만, 그래도 한때 드래곤이었던 자.

그런 자가 의무도, 힘도, 일족의 증거도 벗어던진 무책임한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페르디키온은 단 하나의 책임도 지지 않은 그 행동을 경멸스러워 했음이 틀림없었다.

언령으로 한 약속이 깨진 것은 치명적이지만, 힘을 잃고 엘프의 모습으로 목숨만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니.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미련한 녀석이긴 하네.’

한 순간의 실수와 선택이 가져온 결과가 참으로 비참했다.

“크리스티나는 계속 란드와 만나곤 했지? 왜 그랬던 거야?”

홍찻잎 수급 때문일 리 없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는지,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리즈에 때문이야.”

“리즈에라면, 내가 지금보다 어렸을 때 만난 그?”

만드라고라가 지르는 비명에 고통스러웠음에도 보였던 텅 비어보이는 녹색 눈동자.

소리 없이 흔들리는 털방울 달린 모자도. 달려있던 새의 깃털.

단단히 다물고 있던 입술.

무엇보다 기억나는, 기척 하나 없던 걸음걸이.

한데, 하나하나의 물건은 기억나지만 자세한 느낌이나 인상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그조차 이럴 정도라면, 평범한 자는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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