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한 고수나 암살자보다 더했지. 일순 희미해진 것처럼 존재감이 없었어.’
기척을 숨기는 능력을 사용했을 수는 있지만, 천부적인 재능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억하고 있구나. 실은, 그 리즈에와 란드는 한 부모 밑에서 났단다.”
‘호오.’
눈에 이채를 담은 룬이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부모룡들은 이제 세상에 없기 때문에 나는 가끔씩 란드에게 리즈에의 소식을 전해주곤 했어. 그리고 그는 기념이라도 하듯, 소식을 전한 날 마신 홍차의 잎과 그가 키운 작물을 건네주었단다. 그건, 나름의 감사 표시였을 테지.”
‘그래서 엘프들이 키우는 작물들이 많았었군.’
크리스티나의 재료 창고에 들어있던 허브와 향신료, 약초풀과 꽃 등은 호의에 감사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결혼까지 했는데도 가족과 피붙이를 모두 잃은 란드에게 리즈에의 이야기는 먼 사촌 조카쯤의 소식을 듣는 기분일 듯했다.
룬을 보내도 해치지 않을 자라는 확신이 있는 모습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란드는 널 보면 좋아할지도 모르겠구나.”
“날?”
왜? 라는 의문이 깃든 눈으로 보자, 크리스티나가 싱그럽게 웃었다.
“실은…… 네가 어릴 때 만드라고라를 먹고 탈이 난 이야기를 했거든.”
“…….”
눈초리가 불만스러워진 룬을 보며 크리스티나는 조금 미안한 듯 말을 덧붙였다.
“일부러 말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때 리즈에가 도와주었잖니. 란드는 리즈에가 활약한 이야기를 듣고 무척 좋아했거든.”
‘음.’
듣고 보니 이해가 되긴 했다.
어쨌든 당시 위험한 상황을 잘 넘겼던 건 사실이고, 따지자면 조금 민망한 이야기일 뿐.
머쓱해진 룬이 제 뒷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에게 너무 이야기하진 말아줘. 좀 쑥쓰러워서.”
“후훗. 그럴게.”
크리스티나는 침착하게 부탁하는 룬을 무척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동시에, 룬도 짧은 회상에 잠겼다.
‘그러네. 생각해보면 갓 태어난 몸이라 한창 이성보다 본능이 강했던 시기였지.’
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오랫동안 알고 있던 지식을 단순하게 믿어버린 첫 실수가 란드라는 드래곤에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요즘 엘프 왕국이 조금 어수선하다더구나.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늘 몸조심하렴. 그리고…….”
무언가 이야기하려던 크리스티나가 멈칫하더니,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란드가 나에 대해 물어보거든, 란드에게 용기가 있다면 나를 찾아오라고 전해주렴.”
“무슨 의미야?”
“음…… 그렇게 말하면 알 거야.”
의미 모를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는 더 이상 이야기 해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연스럽게 주제가 바뀌었고, 크리스티나는 유능한 엘프 드루이드와 의사에 대한 이야기.
그가 꼭 알아야할 주의사항을 이야기해 주었다.
삼 일 뒤.
룬은 마계 장미에 흑미가 모은 검은 마력석들의 양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적당한 곳에 마력석으로 된 언덕도 있고.’
해츨링 모습인 룬은 팔에서 비늘 두 개를 또독! 하고 따서 장미 뿌리에 밀어 넣었다.
이어, 흑미에게 아공간 주머니를 건넸다.
“뀨.”
[이건 크리스티나에게 부탁해 얻은 거야. 나중에 고맙다고 해.]
“와! 엄청 많이 들어가는 마법 주머니다! 예쁘게 생겼어요.”
‘그러게. 나한테 준 건 대용량인 대신 그냥 평범한 가죽주머니였는데.’
흑미에게 건네진 건 다양한 색을 쓴 아공간 주머니였다.
얼핏 보면 복주머니처럼 귀여운 디자인으로 보드라운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허리춤 안에 차면 잘 보이지 않지만, 움직일 때 마다 살짝씩 보이는 모습이 흑미와 잘 어울렸다.
‘레드 드래곤 레어에서 흑미가 육포를 제일 많이 먹었다고 이야기해서인가?’
어린 녀석이 먹기 좋은 음식이 없었다는 말에 묘하게 고민하는 눈치더니, 아예 흑미를 위한 주머니를 마련해 준 게 틀림없었다.
“뀨우.”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안에 간식 넣어뒀다니까 먹으면 돼.]
흑미는 귀를 두세 번 접히며 기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백야는 삐약 소리를 내더니,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 듀라한의 투구 위에 티딕,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앉았다.
- 오! 흰 새와 검은 기사라. 거기에 이 제드가 있으니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용사 같지 않습니까?
“…….”
어딜 봐서? 라고 물어보려했지만 신난 백야가 타이밍 좋게 외쳤다.
“삐잇! 뺘아아!”
모인 일행 중 가장 키가 큰 듀라한의 위에서 양 날개를 쫙 펼쳐 보인 백야.
마치 산 정상에 올라 야호 소리치는 모양새였다.
룬은 위풍당당하게 가슴 털을 자랑하는 백야를 보며 생각했다.
‘백야 녀석, 슬슬 털갈이 한번 해 줄 때가 됐는데 말이지.’
백 년이나 지났더니 털이 찐 건지 몸집이 부푼 건지 헷갈릴 정도로 통통했다.
‘조만간에 잘 채집해서 재료로 써야겠군.’
풍성해 보이는 것이, 쑥쑥 긁기만 하면 수확될 양이 상당해 보였다.
보기만 해도 절로 흐뭇했다.
“삐, 삐룻. 삐잇?”
지그시 봐 오는 룬의 시선에 당황했는지, 백야가 식은땀을 흘리며 울음소리를 더듬었다.
‘너무 뚫어지게 봤나?’
룬은 안심하라는 뜻으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웃어주었다.
“삐이이.”
몇 번 눈을 깜빡인 순진한 백야는 룬의 속내를 모르고 유순하게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새는 어느 새 날개를 파닥이며 경계를 풀었다.
기왕이면 갓 뽑은 깃이 싱싱할 터.
때문에 당장 뽑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귀한 녀석인데, 방비 정도는 해 둘까.’
엘프들은 금전에 대한 욕심이 없는 편이라지만, 마법사, 정령사, 드루이드인 엘프들에게 훌륭한 재료로 보일 터.
과연 그들에게도 욕심 없이 비춰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백야의 가느다란 다리에 어울리는 작은 발찌를 하나 꺼냈다.
“뀨우.”
백야를 보며 오라고 앞발을 흔들자, 금세 알아들은 새가 능숙한 비행을 선보이며 룬의 앞발 위에 섰다.
“뀨.”
‘이걸 사용할 때가 됐군.’
오래전 장인대회에서 백야 맞춤장비로 얻어둔 새의 발찌였다.
세 가지 마법효과를 부여한 것으로, 특히 ‘이속 증가’가 붙어 조금만 날갯짓을 해도 편하게 더 멀리 날 수 있었다.
‘다른 효과들도 좋긴 하지만, 날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사용해봐야 별 도움도 안 돼서 가지고만 있었는데. 이젠 유용하게 쓰겠지.’
“삐야?”
룬이 발찌를 착용해주자, 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리로 발찌를 콕콕 쪼아보았다.
그리고 몇 번 가볍게 뜀박질을 하며 다녔다.
룬은 새에게 마법 효과에 대해 반복해서 교육시켜 주었다.
이내, 마법효과가 있는 것을 깨달은 새는 몇 번 마법을 발동시켰다, 취소했다 하며 익숙해 진건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앗! 백야 발찌 했다! 귀엽구 잘 어울려!”
“뺫! 삐삐! 뺫.”
흑미의 말을 칭찬으로 들은 건지, 혹은 룬에게 선물을 받았다 여긴 건지.
백야는 룬의 앞발을 부리로 부비적거렸다.
‘백야가 액세서리를 싫어하는 녀석이 아니라 다행이네.’
흑미는 워낙 꾸미거나 예쁜 걸 좋아했지만, 백야는 자유로운 새.
혹시 거슬려하진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드워프들이 백야를 잘 살피고 만든 작품이라 그런지 새는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피이! 삐. 피피피피!”
‘……이건 오히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신난 새는 잠깐 눈을 떼는가 싶으면 다시 발찌를 들여다보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룬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생각해보면 흑미는 드워프들에게 옷과 액세서리를 한가득 받았기 때문에 룬이 보관하고 있다가 종종 꺼내주었다.
한데, 백야에게 액세서리를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줘볼걸 그랬나.’
기분 탓인지 전생 친구였던 구미호 백미의 잔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 으이구! 바보야, 진짜 장신구 하나 볼 줄도 모르네! 예쁜 옥 장신구 하나만 주면 성불하는 귀를 두고 뭐 이리 오래 걸리나 했더니, 이렇게 크기만 무식하게 큰 걸 준비하니까 그렇지!
- 내가 그 귀신 취향을 어떻게 아냐. 퇴마를 하는데 이런 것도 알아야 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 어휴. 자, 골라 줄 테니 이걸로 해봐!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룬은 백야의 부리 아래를 검지 발가락으로 슥슥 긁어주었다.
‘차라리 성능을 따지는 거라면 쉽게 할 수 있는데 말이야.’
지금이야 그 당시보단 나아졌지만, 워낙 무던하게 살아와서인지 영 그런 쪽으로는 재주가 없었다.
‘원래 각자의 재능이나 취향은 다른 법이기도 하고.’
모처럼 백야를 좀 더 챙겨주고 싶어진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꿀과 버터를 바른 감자칩’을 꺼내 발바닥 위에 올렸다.
백야가 용케 자기 몫인 걸 알아채고 날아와 룬의 앞발바닥 위에 착지했다.
콕콕!
가끔 삐루루루 하며 기분 좋게 우는 새가 오늘따라 행복해보였다.
그때, 옆에 있던 흑미도 두 손을 모아 올리며 부탁해왔다.
“룬 님, 저도 까까 주세요.”
룬은 내친김에 백야와 같이 먹으라며 감자칩을 봉지 째 건네주었다.
“뀨.”
‘옛다.’
“와아! 잘 먹겠습니다아!”
“삐이약!”
신이 난 흑미와 백야가 얼른 감자칩을 들고 오물거렸다.
“으하항! 백야 보래요. 쪼아먹다 얼굴에 묻었다!”
- 이야. 한 때 저 감자칩 좀 얻어보려고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죠.
“뺘? 뺘아!”
까르르 웃는 흑미와 흥겹게 지저귀는 백야. 간간히 흥을 타는 제드가 함께 떠드는 사이, 공간이 비틀리며 크리스티나가 페르디키온을 데리고 나타났다.
룬은 시간이 됐음을 느끼고 변신용 황금 팔찌를 꼈다.
“다들, 슬슬 갈 준비는 되었니?”
“응.”
“흑미 준비 다 됐어요!”
- 물론입죠! 언제든 갈 수 있습니다요!
철컹! 철컹!
“삐약? 삐약!”
엉겁결에 대답한 백야의 지저귐까지 다 들은 크리스티나가 싱긋 웃어보였다.
“어쩐지 기대되는구나. 왠지, 너희라면 그 곳에서도 사랑받을 것 같아서. 부디 잘 다녀오렴.”
사악.
빛의 축복이 내리며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포근하게 감쌌다.
***
훅 끼치는 마른 공기.
발바닥을 지지는 뜨거운 사막.
일행들이 도착한 곳은 엘프들이 사는 숲이 아닌, 망망대해 같은 모래바다 한가운데였다.
- 어라? 잘 못 온 건가요? 숲 일족인 엘프들는 해가 안 보일 정도로 큰 나무들과 밀림 속에서 산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흑미가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리며 어느 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봐요!”
천으로 된 둥근 돔 모양의 텐트가 보였다.
밥이라도 짓는 건지 흰 연기가 포슬거리며 천으로 된 기둥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저쪽인 모양이다.”
- 얼른 가죠! 모래로 목욕하게 생기셨네요들.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중이 없는 게 조금 걸리는데.”
그때였다.
모래쥐 몬스터인 저빌몬이 찍! 소리를 내며 근처를 기웃대더니, 겁도 없이 그들 앞으로 달려왔다.
도도도도!
흑미가 눈을 묘하게 반짝일 때, 저빌몬은 두발로 서서 두 앞발을 흔들었다.
찍!
“뺙!”
찍찍!
“삐약! 삐약!”
새와 쥐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듯 우는 소리를 지켜본 흑미가 말했다.
“얘가, 자길 따라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