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242)

찍!

후다다닥.

잡아먹히기라도 할 세라, 저빌몬은 즉시 앞장 서 뛰었다.

일행들은 나란히 저빌몬을 따라 이동했다.

사막의 모래에 새겨진 가벼운 쥐 발자국은 금세 사라지곤 했다.

그를 의식한 건지, 작은 쥐는 뒤를 종종 돌아보며 일행들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나아갔다.

룬은 마력의 흔적이 감도는 저빌몬을 보며 생각했다.

‘퍼밀리어인가?’

동물들과 교감이 뛰어난 이들이 수족처럼 부리는 자.

테이머와 연결된 흔적이었다.

주인인 테이머가 애정과 관심을 쏟을수록 더 충성스러운 퍼밀리어를 만들 수 있다는, 동물이나 몬스터를 다루는 자들의 능력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천막에 도착하자 짐승과 몬스터의 인기척이 여럿 느껴졌다.

킁킁!

데저트 울프 한 마리가 상체를 세워 경계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경계만 했을 뿐, 다른 몬스터와 짐승들은 얌전히 방문자를 맞이했다.

찍!

저빌몬이 호다닥 달려 란드의 다리와 허리를 타고 올라 어깨위에 두 발로 자리를 잡았다.

“어서와.”

나른해 보이는. 혹은 피로해 보이는 묘한 녹빛 눈동자.

적갈색 긴 머리의 남성 엘프가 인사해왔다.

그는 천막 앞에 나와 입을 가리고 있던 터번을 내렸다.

페르디키온은 미간을 구겼으나 다소 불만스러워 보일지언정 무례한 언사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흑미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흑미예요.”

꾸벅.

그를 본 룬 역시 인사했다.

“룬이라고 해. 그쪽이 란드 씨야?”

배운 대로 착실히 행동하는 흑미를 보며 란드의 눈이 살짝 휘었다.

게을러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아한 동작으로, 엘프는 모래가 닿은 자락을 살짝 털어냈다.

“들어와. 사막은 변덕스러워서 잔잔한 바람이 불다가도 모래폭풍이 일어나곤 하니까.”

왠지 모르게 냉소적인 목소리가 일행을 불러들였다.

따라 들어간 천막 안은 바닥에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된 양탄자가 깔려있었다.

은은한 향료가 피워져 있었고, ‘길라’라고 불리는 긴 물 담배가 한쪽에 정리되어 있었다.

다행히 안에서 담배냄새는 나지 않았다.

“자. 편한 곳에 앉도록 해.”

란드는 느긋하게 베개와 방석 무더기 아무 곳에 앉고는 습관처럼 포도주를 따르려다 멈칫 했다.

그의 눈이 슬쩍 룬과 페르디키온을 향했다.

“해츨링들, 내가 술을 좀 마시려는데. 너희도 줄까?”

“사양하겠습니다.”

룬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녹빛의 눈이 데구륵, 구르더니 붉은 머리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쪽 꼬마가 화룡족의 차기 장로, 페르디키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없지.”

어깨를 으쓱인 란드는 고개를 저으며 저 혼자 포도주를 따랐다.

달콤한 과실 향이 금세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고개가 기울고, 투명한 유리잔 안에 맑은 보라색 액체가 찰랑였다.

“네 두 눈에 이 붉은 포도주처럼 빛나고 있다는 점이…… 약간, 흥미로웠을 뿐이야. 힘 좀 풀지 그래. 어차피 나 따위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잖아?”

비록 주변에 테이밍 된 몬스터들이 있다지만, 성체 드래곤에 가까운 해츨링에게 덤비는 건 무리였다.

페르디키온을 제압할 수 있다한들, 크리스티나와 파시야스. 둘 모두에게 악감정을 심어 좋을 게 없었다.

입가를 꿈틀거리며 한 소리 던지려던 차, 룬이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페르디키온의 눈이 홱 돌아 룬을 보았다.

‘왜 그러는 거냐.’

그리 묻는 눈이었다.

사납게 뜬 눈을 보며 그를 룬은 평온히 마주보았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

왠지 모르게, 아우의 제지를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 페르디키온.

그는 영 마음에 들진 않아보였지만, 쳇. 하고 시선을 적당히 거둬들였다.

한편, 고작 고개만 저었을 뿐인데 화를 참아낸 페르디키온을 보며 룬은 조금 감탄하는 상태였다.

‘혹시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나?’

룬은 떠올리자마자 의아해 했다.

아티팩트 아무리 효과가 좋다 해도 100년이나 넘게 가는 물건은 아니었다.

‘반복된 경험의 결과가 커서도 유지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는데.’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물에 빠진 적이 있는 자가 욕탕에 물이 가득 잠겨있으면 거부감이 든다든가.

학대 받았던 아이가 청소년이 되어서도 성인 남자나 여자를 보면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한다든가.

새끼 동물의 발목에 줄을 메고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식을 심어두면, 성장하여 몸집이 커져도 발목에 줄이 달려있으면 도망가지 않는다는 일 등.

‘반사적으로 호감과 충성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비슷할지도 모르지.’

룬의 권속인 듀라한도 아니고, 불의 일족인 페르디키온에게 그런 엄청난 효과가 나왔다는 점이 왠지 마음에 걸렸지만.

‘당시에 저 녀석에게 향기상자를 실험해 보긴 했지만…… 약효가 오래 갈 물건은 아니라 여겼기 때문인데. 실제로 몇 분 되지 않아 정신 차리기도 했고.’

룬이 생각하는 사이 란드는 룬과 페르디키온을 주의 깊게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의형제, 라…….”

“?”

작게 입속말로 중얼거렸지만, 분명하게 들린 말.

달콤한 포도주의 향과 달리 쓴 걸 뱉어내듯 떫었다.

룬은 은근한 경계를 담아 란드를 보았다.

포도주를 마신 그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걸 보는 시선이었다.

‘리즈에를 떠올리나?’

룬의 생각은 정확했다.

하지만 이내, 란드는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는 스스로를 경멸하듯 와인잔을 들이켰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듯, 단숨에.

힘 좀 쓰시겠네요.

그의 모습 어디에도, 크리스티나가 말 해준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던 열정 가득한 젊은 드래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페르디키온이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룬은 그런 페르디키온의 마음을 이해했다.

‘무리도 아니지. 그래도 한 때 드래곤이었다는 자가 이리도 불안해보여서야.’

결국 화룡족의 꼬마는 아무렇게나 널려진 등 쿠션을 하나 가져와 반듯하게 두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말로 온 몸으로 ‘한심한 작태에 화도 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어차피 좋은 소리 나오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저게 나을지도 몰랐다.

“삐이약!”

“앗! 백야야!”

갑자기 듀라한의 머리 위에 있던 백야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새는 란드의 주변을 한 바퀴 돌더니, 뭔가 말 하고 싶은 듯 ‘삐루루루.’ 하고 울었다.

“……착한 새로군.”

“삐루루!”

란드가 손을 내밀자, 백야가 날개를 파닥이며 한동안 떠 있다가, 검지 위에 살짝 앉았다.

하지만 란드는 물끄러미 백야를 보다가, 이내 새를 날려보냈다.

새는 룬의 머리 위에 폭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본 란드가 피식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뭐 좋아…… 일 이야기나 하자. 꼬마들.”

힐끔 포도주병을 본 란드는 코르크마개를 다시 꽂았다.

“어린 너희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어떤 재료를 얻기 위해서라던가.”

“맞아.”

“어떤 재료지?”

“살아있는 세계수의 잎과 굵은 가지.”

“…….”

태연한 룬의 대답에 날렵하게 생긴 엘프의 눈꼬리가 살짝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물담배 길라가 있는 쪽을 잠시 녹안을 굴려 보았다가, 고개를 까닥였다.

“엘프의 신목을 원한다니. 간이 커도 너무 큰데.”

“알아. 하지만 란드, 당신은 가능하다고 들었어.”

룬의 말에 고개를 흔든 란드가 게으른 얼굴로 푹신한 등 쿠션에 몸을 기댔다.

“오해가 있었네. 크리스티나는 내게 세계수의 일부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건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어. 죽은 나뭇가지와 자연스럽게 떨어진 잎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꼬맹이가 원하는 건 말 그대로 ‘세계수의 일부’. 그건 불가능해.”

란드의 말에 일행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듀라한 쪽에서 험험, 하는 헛기침소리가 들렸다.

- 그 뭐랄까. 외람되지만, 이 제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요?

모두의 시선이 배틀 액스 파라리엄을 향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룬이 물었고, 당장이라도 물담배를 물고 싶은 얼굴의 란드가 미간을 좁혔다.

페르디키온도 감았던 눈을 뜨고 파라리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분명 세계수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이 제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제드가 뿌듯해 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 룬 님. 제가 소싯적에 또 다양한 자들을 만나기도 했잖습니까? 세계수까지 가는 건 말이죠,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요. 정확히는 3가지죠! 뭐 약간의 운도 있어야 하고, 나름대로 조건도 필요하지만요.

“재미있네. 아무리 연을 끊고 살았지만, 설마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기라도?”

란드가 비꼬듯 되물었지만 제드는 쾌활하게 말했다.

- 일단 들어보십쇼. 고오것은! 먼저 엘프왕과 그의 허락을 받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정상적인 방법. 두 번째는, 세계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것. 그리고 이게 중요합니다만, 세 번째는 말입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는 걸 확인한 제드가 말했다.

- 세계수에 문제가 생긴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사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우와! 제드 아저씨, 엄청 똑똑하다!”

“삐약!”

흑미와 백야가 맞장구 쳐 주자, 제드가 에헷! 하고 으스댔다.

하지만 고개를 모로 기울인 란드는 유리가면처럼 차가운 미소를 한 차례 띄웠을 뿐이었다.

“재미있네. 세계수에 문제에 대해 알고 있다? 한낱 드워프인 자가.”

- 자자. 제 이야기 아직 안 끝났습니다. 더 들어보세요.

호언장담한 제드가 말을 이었다.

- 제가 생전에 마탑과 신전 중진들과 거래를 좀 텄을 때쯤이었나? 당시에 세계수에 문제가 생겨 엘프들이 도움을 청하고 있었거든요. 아, 물론! 이 이야기는 제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기로 서약하고 들은 겁니다. 거 엘프분들이 아주 엄격해서, 서약을 하고서야 들을 수 있었거든요. 만약 발설하면 온 몸에 엘프들이 심어둔 마법으로 평생 짐승과 벌레에 쫓기다 뜯겨 죽게 될 거라던데. 어휴. 지금 생각하면 무서운 소리였습니다만, 당시에는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오옹. 제드 아저씨, 그럼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 아이고 흑미 님! 걱정해 주시다니, 정말 마음씨도 착하셔라. 괜찮습니다요! 죽기 전까지 발설하지 않기로 했던 서약이었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미 죽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하필 죽었다는 말을 참 감흥 없이도 해댔다.

하지만 말을 꺼냈는데도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을 보아, 제드의 말은 맞았다.

제드는 엘프의 기밀을 술술 발설하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휘파람까지 불었다.

- 당시에야 물론 서약 마법하기 직전까지도 이게 잘 하는 짓인가 고민이 아주 많았는데…… 그 때 안 들으면 왠지, 진짜, 너무 후회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설마 이런 일이 생기다니. 역시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니까요?

“잘 알았어. 그럼, 제드 넌 세계수의 증상과 해결법을 안다는 거야?”

이야기가 길어지자, 룬이 적당히 끊으며 원래 주제로 되돌렸다.

란드조차 제대로 알던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말없이 미간만 좁히고 제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맞습니다! 세계수 증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세계수가 병들어가는 원인이 마족의 힘에 오염된 탓이라 했습죠. 뭐가 좀 잘못 꽂혔다던가? 아시다시피, 제가 마검을 좀 연구하면서 마족에 대한 것도 쪼오끔은, 연구 해 봤거든요.

당연하지만, 조금일 리가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경고도 있었고, 마족과 척을 진 드래곤이 많기에 슬그머니 단어를 조절한 것일 터.

다행히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 룬 님의 권속이 되어 가장 좋았던 점이 뭔 줄 아십니까?

“뭔데?”

- 룬 님의 힘은 말이죠, 마기에 침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지만, 마기를 삼키기까지 하더라고요.

“!”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짐작한 룬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살짝 굳었다.

룬의 어둠은 어떤 속성이든 포용했다.

전생인 이무기 시절부터 온갖 힘을 다뤄왔기에 생긴 특징이었다.

심지어 룬은 ‘속성 조합’이라는 능력까지 개화시킨 상태였다.

‘그렇군. 마족의 힘도 일종의 속성…… 조합하거나, 다룰 수 있는 능력인거잖아, 이거.’

룬이 머리를 굴리는 동안, 제드 역시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 신기하죠? 마족의 힘을 삼키거나, 대응하는 속성이라니. 룬 님의 ‘어둠’ 외에는 본 적도 없어요! 이 점 덕분에 제 생명을 깎아 실험할 때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죠.

‘저 놈, 결국 크리스티나가 말려도 위험한 실험을 했다는 소릴 대놓고 하고 있어.’

그나마 그녀 앞에서 발설하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제드는 자신의 존재로 증명하고 있었다.

룬의 어둠을 이용하면 마족의 힘에 대항하거나, 삼킬 수 있다고.

‘설마 그 사실을 제드가 알아낼 줄이야.’

제드의 새로운 발명에 대한 몰입. 그리고 목적의식과 집요함.

새삼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룬이 드물게 이 드워프를 기특하게 본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제드가 말을 맺었다.

- 아무튼, 제 생각이지만. 일개 드워프 권속조차 이럴진대, 그 원천이랄 수 있는 룬 님이 직접 운용하는 힘이라면 마기의 힘을 없애고, 오히려 면역을 부여해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설명을 곱씹을수록 정말 열심히 룬의 권속으로서 받은 힘을 연구한 것이 느껴졌다.

심지어 이 아이디어는 룬이 생각해낸 방법보다도 이점이 컸다.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제드의 말이 맞아. 마족의 힘이라면 내가 간섭할 수 있으니까. 가능해.”

“뭐? 룬. 진짜 가능하단 말이냐?”

“응. 대신 필요한 게 하나 있기는 하지만.”

자세를 바꾼 페르디키온이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뭐냐.”

시침 뚝 뗀 룬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세계수에 깃든 마기를 건드려야 한다며. 그 말은 신목인 세계수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숲의 인장이 필요해.”

“숲의 인장이라면…….”

중얼거린 페르디키온이 시선을 란드에게로 돌렸다.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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