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242)

“건의, 정도는…… 해 볼 수 있겠지.”

잠시 후, 엘프는 벗었던 터번을 집어들었다.

그는 말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흑미가 돌아가는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룬에게 물었다.

“그러엄…… 룬 님이 아픈 나무 살려주는 거예요?”

“그런 셈이네.”

”멋지다! 그치, 라한아, 백야야?”

“삐약!”

철컥!

드워프족과 달리, 마족에게 침략당했음에도 엘프들이 고향에 쭉 살아올 수 있던 이유.

그들을 수호했던 드래곤 란드의 힘 덕분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숲의 어머니이자 삶의 근간이라 불리는 세계수가 무사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런 세계수를 회복시키는 일인데, 겨우 굵은 가지와 잎만으로는 아쉽지.’

사실 룬은 효율적이고, 즉각적으로 세계수의 오염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소생 언령과 백야의 눈물을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언령이 드러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어. 하지만 제드의 방법을 쓰면 언령의 힘을 감출 수도 있고, 이걸 빌미로 숲의 인장도 얻을 수 있지.’

표정만큼은 무던했지만, 룬의 속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 그렇네요. 아무래도 세계수라는 가장 위대한 신목에 닿는 일이니 숲과 친화력이 높으셔야 힘 좀 쓰시겠네요. 아이고,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충분했어. 아주 잘했다, 제드.”

- 허어억! 루, 룬 님이 제게 칭찬 해 주시는 게 얼마만인지! 아유, 이걸 축포를 터트리면서 축하 하질 못하다니 근질근질 해 죽겠습니다요!

“절대 안 돼. 여기 남의 집이잖아. 무조건 참아.”

파라리엄이 붉어지는 것을 본 룬이 즉시 제지했다.

집에 불이 붙을 위기였음에도, 란드는 귀찮다는 듯 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엘프의 숲에 데려다 줄 텐데……. 불을 조절하지 못하면 버리고 가야 한다.”

- 아이고, 란드 님. 버리고 가다니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아주 조신하게 들려갈 테니 걱정 매어두십쇼.

손이라도 샤샥 샤샥 비비며 낼 것 같은 게 묘하게 줏대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문득, 란드가 듀라한과 에고 웨폰인 제드 쪽을 보며 느리게 중얼거렸다.

“데려다 주긴 하겠지만 그다지…… 환영 받진 못할 거다.”

묘한 말을 남긴 란드가 천막 밖으로 나가더니,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고 입안에 물었다.

휘익!

높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맑은 사막의 하늘에 울려 퍼진 후, 멀리서 둔탁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앗! 흑미 저 새 뭔지 알아요! 그리핀!”

여우귀를 쫑긋거리던 흑미가 하늘 끝에 보이는 점을 가리키며 외쳤다.

꼬시듯이 해야지!

상체는 하얀 독수리의 얼굴과 날개.

하체는 독수리의 앞 발과 사자의 뒷 발을 가진 몬스터.

폭풍을 부르는 날갯짓을 하는 그리핀이었다.

난폭하고 예민한 성격을 가졌으며 대형 몬스터를 찢어먹는다 하고, 간혹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는 민담이 전해오는 사막의 준 보스급 몬스터였다.

꾸아악!

꽈아아악!

순식간에 천막 위에 당도한 그리핀들은 하늘에 천둥소리처럼 거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이어, 그림자를 드리우며 머리 위를 맴돌던 그리핀 세 마리는 후웅!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차례대로 착지했다.

“우와아아! 진짜 커요. 너무 멋지다!”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들고 그리핀을 보는 흑미와 달리, 백야는 어느 새 룬의 앞섶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만 빼꼼 내민 채 흑미와 그리핀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저걸 타고 가는 건가.’

그리핀은 아주 크고 근육이 탄탄했다.

마차보다 크기까지 해서, 일행 두셋을 등에 태워도 무리가 없어보였다.

룬은 힐끔, 제드가 들어있는 파라리엄을 보았다.

‘제드 녀석, 고소공포증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암시장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으므로, 룬은 거대한 그리핀 위에 오르는 듀라한 쪽을 한 차례 빤히 봐주었다.

-후, 후우. 하. 후아, 하아! 어허. 으허어! 아이고, 하나~도 안 무섭겠다아~

‘……저 놈 괜찮겠지?’

자기 최면을 거는 제드는 긴장된 기색이 역력해 보였으나, 도전해 볼 의지가 엿보였다.

일행들은 암묵적으로 그리핀 하나 당 2명씩 탑승하기로 하고, 그리핀 앞으로 향했다.

룬이 백야를 품에 넣은 채 흑미와 함께 타려고 움직이려던 차.

“룬. 나랑 타자.”

“?”

의아하게 바라보자 시종일관 미간을 구기고 있던 페르디키온이 턱짓으로 란드를 가리켰다.

‘아하.’

흑미와 룬이 함께 타게 되면, 남는 짝은 듀라한과 란드.

듀라한의 덩치가 무척 큰 탓에 자리가 좁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제드의 수다일 터였다.

하늘을 날며 소란스럽게 굴기라도 하면 페르디키온에게 그리 편한 비행이 되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란드랑 함께 타는 건 더욱 싫을 테니, 남는 건 룬뿐이었다.

‘그럼, 흑미와 란드가 함께 가야한다는 건데.’

룬이 란드에게 시선을 주자, 엘프가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고는 나직이 일렀다.

“난 상관없어. 동물은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저도요! 잘 부탁드려요!”

해맑게 웃은 흑미가 란드가 탄 그리핀 쪽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란드가 적절히 허리를 숙이곤 흑미를 두 손으로 안아 앞에 태웠다.

‘폼을 보니 흑미를 떨어뜨릴 것 같진 않은데.’

흑미의 운동신경이 무척 좋기는 했지만, 승마조차 안 해본 흑미가 그리핀을 타는 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란드는 능숙하게 그리핀의 볼을 쓰다듬었고, 손길을 받은 그리핀이 기분 좋은 듯 크릉 거렸다.

그 모습은 작게나마 신뢰를 주었다.

‘생각해보면, 이 그리핀들의 마스터 테이머인 란드야말로 가장 능숙하고 안전한 운행이 가능하겠지.’

마침 룬의 시선에서 생각을 짐작한 듯, 란드가 말문을 열었다.

“믿지 못하겠나보지?”

느슨하고 피로해 보이는 말과 달리, 그리핀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폼은 상당한 숙련자의 솜씨였다.

여차하면 가벼운 흑미 정도는 룬이 즉시 소환하면 되긴 했다.

“괜찮겠지. 형, 나랑 같이 타자.”

“좋다.”

고개를 끄덕인 페르디키온이 먼저 그리핀 위로 올랐다.

이어, 란드가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커다란 고깃덩이를 꺼내 던졌다.

“이걸 먹여두어라.”

휙!

큼직한 고깃덩이는 듀라한과 페르디키온이 각각 받았다.

시범을 보이려는 듯 란드가 먼저 그리핀의 부리 옆으로 고깃덩이를 내밀고 가볍게 흔들었다.

텁!

쩝쩝! 쩝! 꿀꺽.

부리를 벌려 고기를 물어낸 그리핀이 고갯짓을 몇 번 하더니 맛있게 고깃덩이를 씹어삼켰다.

“아이, 귀여워. 착해, 착해.”

흑미가 손을 뻗어 그리핀의 머리를 쓰다듬자, 크릉 크릉 거리며 기분 좋게 목울대를 울렸다.

절그럭.

듀라한 역시 고기를 건네 보려 했으나, 그리핀은 눈동자만 굴리며 선뜻 고기를 물지 않았다.

거기에 할 말이 많아진 제드가 듀라한을 열심히 가르치기 시작했다.

- 아이고, 이 묵묵한 기사님 같으니. 좀 더 요래, 요래 고기 냄새 좀 풍기면서 꼬시듯이 해야지! 아니 그게 아니고. 꽃 같은 여인네들의 손짓처럼 다정하게! 건네야 한다니까. 그렇지! 그렇게 살랑살랑 흔들어 주면서! 거 낚시 한번 안 해 봤수?

몇 번의 시도 끝에 죽음의 기운을 품은 듀라한을 데면데면하게 여기던 그리핀이 결국 고기를 물었다.

- 그렇취! 캬아. 호수에서 월척을 낚았을 때가 딱 이런 기분이었는데! 손맛이 그립구만!

고깃덩이를 건넨 듀라한보다 제드가 더 신이 나 보였다.

이제 남은 건 페르디키온뿐이었다.

손에 있는 큼직한 몬스터 고기.

표정이 굳은 화룡족 후계자가 쑤욱. 고깃덩이를 내밀었다.

크릉!

안타깝게도, 그리핀의 반응은 썩 안 좋았다.

심지어 페르디키온의 심기도 좋지 않았던지, 그는 미간을 좁혔다가 펴며 다시 고기를 쑥 내밀었다.

그리고 그리핀은,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이게.”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찌푸려지는 것을 본 룬은 예상했다는 듯 눈으로 입을 열었다.

“형, 옛날에 백야한테 꿀 바른 비스킷 줬을 때 기억 나?”

“……기억난다.”

조그마한 백야에게 비스킷을 먹였던, 한창 철없을 때의 모습을 떠올린 페르디키온.

당시의 기억이 다소 머쓱했던지 그는 고깃덩이와 그리핀을 번갈아 보곤, 헛기침을 했다.

“대충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군.”

페르디키온은 조금 더 부드러워진 동작으로 그리핀에게 고깃덩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한 동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던 그리핀이 슬그머니 눈을 굴려 고기를 보았다.

꾸륵. 크릉.

‘그렇지. 의욕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잘 하고 있군.’

전투도 그렇지만, 누군가를 상대할 때 침착함을 잃어선 안 되는 법.

룬은 어린 형님이 조급해하지 않도록 팔꿈치에 손을 대고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부리 쪽으로 가까이 고기를 내밀었다가 슬슬 당기기를 몇 번.

고기를 따라 그리핀의 눈동자가 데구륵 굴렀다.

꿀꺽!

침을 삼키는 움직임이 몸통을 통해 앉아있는 룬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리핀의 반응을 보고 요령을 깨달은 페르디키온이 이번엔 스스로 고깃덩이를 내밀었다.

그러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아닌 척 고개를 돌리던 그리핀의 목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그러다 결국, 그리핀은 눈앞의 고기냄새를 외면하지 못하고 부리를 벌렸다.

덥썩!

쩝쩝! 쩝쩝쩝!

“좋아. 잘했다!”

크릉!

그렇게 칭찬한 페르디키온은 그리핀을 언제 괘씸하게 여겼냐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먹이를 먹느라 바빴던 그리핀은 화룡족 후계자의 손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 안의 고기를 마저 꿀꺽 삼켰다.

“자아. 가지.”

세 팀의 그리핀이 모두 고깃덩이를 받아 삼키자, 란드가 말했다.

후우욱!

그리핀의 날갯짓 한번에, 일행의 몸이 백여 미터 수직으로 훅 올라갔다.

‘빠르네.’

간만에 누리는 비행에 속이 탁 트였다.

이만큼 높이 나는 건 전생 이후로 처음이다보니, 룬 역시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 으워워워! 제드 살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내 바람소리에 묻혔다.

순식간에 앞으로 날아가는 동안, 룬은 사막을 내려다 보았다.

거대한 자이언트 웜이 곳곳에서 몸을 드러내며 꿈틀거렸고, 가끔 선인장 몬스터도 보였다.

물도 거의 없고, 먹을 것도 기르기 어려운 메마른 사막 곳곳에 생명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왠지 묘한 감상을 남겼다.

‘이게 사막이로군.’

암시장을 방문했을 때는 사막을 구경할 여유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가뭄 때처럼 물이 없지만, 위대한 자연과 아름다움. 모래 아래 묻힌 이야기가 있는 곳.

그리고 사막에 특화된 몬스터들의 새로운 터가 된, 모래의 대지였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녹음이 진한 숲이었다고 들었는데.’

룬은 앞서가고 있는 란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갈색 드래곤이라. 토룡(土龍)같은 건가.’

용은 용이되, 그 속뜻은 지렁이.

어쩌면 지금의 란드와 같았다.

본래는 꽤 화려한 언변과 외모를 자랑했을법한 얼굴이지만, 시니컬하고 느릿한 말투.

귀찮은 듯 보이는 몸짓은 부정적이고 비틀린 느낌을 주곤 했다.

“저기요! 엄청 큰 나무랑 숲이 보여요!”

흑미가 검지로 가리킨 곳에는 반투명한 마법결계로 가려진 숲이 있었다.

그리핀의 등 근육이 부풀고, 날갯죽지가 거칠게 꿈틀거렸다.

쐐액!

앞서 날아가던 란드의 그리핀이 대각선으로 하강비행을 시작했다.

일행 중 평범한 인간이 있었다면 진즉 심장마비라도 걸릴 것 같은 속도였다.

룬은 자연스럽게 혹시 모를 충격에 대비하며 머리를 약간 낮췄다.

후웅! 후우웅!

고작해야 지상에서 이십여 미터 떨어진 공중에서 홰를 치며 멈춘 그리핀.

직전의 하강과는 달리, 아주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쿠웅!

세 마리의 그리핀이 모두 바닥에 발을 디뎠다.

진동이 울리긴 했으나, 흐트러짐 없는 자세가 안정적이었다.

“여기서부턴 걸어야 한다.”

좀 전까지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았음에도, 란드의 목소리는 느른하다 못해 하품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일행들이 모두 내리자, 란드는 그리핀에게 고깃덩이를 한 덩이씩 더 꺼내주도록 했다.

찌익! 찌이익!

쩝! 쩝쩝. 꿀꺽.

독수리의 앞발로 고깃덩이를 움켜쥔 그리핀이 고개를 숙여 부리로 신나게 고기를 뜯어 먹었다.

다 먹은 그리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몇 번 홰를 치며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철컹! 철커덕!

의외로 듀라한이 아쉬운 눈치로 날아가는 그리핀의 모습을 두세 걸음 더 따라갔다.

‘그리핀 비행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었나.’

맹수의 비행은 무척 거칠었지만, 그 점이 듀라한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한편, 흑미도 란드의 도움을 받아 땅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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