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242)

“아우! 갑자기 땅이 막 흔들리는 것 같아요.”

“비행 직후엔 좀 그럴 수 있어. 잠깐 기다리면 돌아올 거야. 뭔가 마실래?”

“으음. 그럼 흑미는…… 이거 마실게요.”

흑미가 허리춤에 있는 복주머니에서 꿀이 들어간 과일차를 꺼냈다.

얼음까지 든 시원한 음료는 투명한 통 안에 밀봉되어 있어서, 흑미의 손 안에서 귤색으로 반짝였다.

“란드 님도 드릴까요?”

“…….”

팔짱을 낀 란드가 말 없이 시선을 내리고 있자, 흑미가 히. 하고 웃으며 냉큼 음료 통을 건넸다.

“여기요!”

“……되었다.”

조용한 거절에 흑미가 아쉬운 눈을 했지만, 이내 룬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룬 님! 페르디키온 님! 이거 드세요.”

“잘 먹으마.”

“잘 먹을게.”

순순히 통을 받아든 룬과 페르디키온이 물통 주둥이를 입에 대고 목을 축였다.

안 그래도 공중을 날 때 바람이 심해 묘한 갈증이 든 참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말을 타고 가벼운 갑주를 찬 엘프 병사가 달려왔다.

엄한 표정으로 달려온 병사는 다가올수록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하기사, 모인 이들이 워낙 특이했다.

겉보기론 어린 아이들과 새, 거대한 검은 갑주의 남자, 엘프 모습인 란드 하나였으니.

푸슝!

경계하듯 엘프귀를 세운 병사가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병사는 사막의 더운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기침을 몇 번 하곤 질문을 던졌다.

“란드 씨. 한동안 출입 금지라고 했을 텐데요.”

미미한 경멸이 스민 엘프 병사의 눈.

불길한 생물이라도 보는 양 거부감이 엿보였다.

병사는 주변 이들에 대한 의문과 경계를 놓치지 않고, 어린 모습을 한 룬과 다른 일행들을 바라봐 왔다.

“세계수에 대해 알고 온 이들을 안내해왔을 뿐이야.”

“세계수라니. 당신이 그걸 어떻게?”

란드의 말에 엘프 병사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지켜본 룬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란드에게는 세계수에 대해 알리지 않았던 건가.’

숲의 인장까지 엘프들에게 주었건만, 란드의 취급은 추방된 외지인. 딱 그 정도였다.

내심 어이가 없는 건 페르디키온도 마찬가지였는지 뺨이 실룩거렸다.

그제야 엘프 병사가 실수했다 여겼는지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란드가 말을 이었다.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모두 진실일지는, 몰라도. 이들은 세계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말했어. 그 뿐이야.”

“그, 그게 사실이라 해도, 란드 씨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

란드가 룬 쪽을 향해 힐끔 눈동자를 굴렸다.

‘어떻게 할래?’ 라고 묻는 듯한 시선.

란드의 취급이 어떤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기에, 의미하는 바를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 마디로, 함께 들어가 좋은 꼴을 못 볼 확률이 높다는 눈치였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도와주러 가는 거라 해도, 괜한 경계심만 높아질 것 같았다.

룬이 앞으로 나섰다.

“란드랑 같이 가는 게 조건이야. 엘프인 당신들에겐 어떤지 몰라도, 란드는 우리한테 절대로 해가 될 자가 아니거든.”

“어린 녀석이 대체 무슨 연유로 그런 말을…….”

룬의 대답에 엘프 병사가 반문했으나, 룬과 페르디키온은 전음으로 또 다른 이야기 중이었다.

[형, 봤어?]

[뭘 말이냐.]

[저 병사 얼굴. 아직 젊어 보이는 데. 천으로 감춰져있는 피부에 이상한 두드러기 같은 게 있어.]

[그래. 이상한 곰보자국이 보인다. 내가 아는 엘프는 이렇지 않은데, 이상하군.]

숲의 가호로 엘프들은 하나같이 미남 미녀들이 많았다.

정결한 몸이기에 피부가 깨끗하고, 건강하기에 탄력 있는 신체를 지녀 숲과 자연을 뛰어다니는 날렵한 치들.

그 중에서도 가장 민첩하고 뛰어난 체력을 갖춰야 할 병사가 이 모양이다.

이상함을 못 느끼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란드와 이야기하고 있다간 입씨름만 하겠네.’

엘프 병사와 란드에게 집중한 사이, 룬은 슬그머니 백야가 있는 앞섶에 손을 넣어 얌전히 있는 백야의 깃을 하나 뽑았다.

뽑!

백야가 의문 어린 눈을 하고 올려다보자, 룬은 그 깃을 백야 눈가에 대고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울어.’

용케 알아들은 백야가 삐이, 하고 작게 울더니 깃털에 눈물을 떨구었다.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깃털에 눈물을 묻힌 룬이 슬쩍 앞으로 나섰다,

경계심을 지닌 엘프 병사가 몸을 굳히며 룬을 제지하려 손을 뻗었으나 룬은 오히려 그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손목을 걷어내자, 발진이 생긴 피부가 드러났다.

룬은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역신이라도 다녀갔나.’

“뭐, 뭐 하는 거냐!”

짓물러 고름이 나는 피부가 태양빛 아래 드러나자 엘프 병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반사적으로 몸을 꿈틀 거렸다.

지체할 것 없이, 룬은 백야의 눈물이 묻은 깃털을 대었다.

파앗!

단순한 상처치료가 아닌, 독을 쫒아내고 상한 몸을 치유하는 불사조의 눈물.

마시는 편이 효과는 더 좋겠지만 얌전히 먹어 줄 자도 아니니 간접적으로 피부에 묻히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효과는 충분히 좋았다.

피부의 발진이 조금씩 가라앉고, 깨끗한 피부가 드러나며 새살을 피웠다.

“아니, 이럴 수가?”

어느 덧 피부의 가려움이 깨끗하게 사라지자, 엘프 병사가 입을 벌리고 놀란 토끼눈을 했다.

룬은 그제야 하얀 깃을 보여주며 슬슬 흔들었다.

“신의 새라 불리는 불사조의 가호를 받은 깃이야. 이건 맛보기에 불과하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부, 불사조? 신성한 불의 새?”

충격을 받은 병사는 하얀 깃털과 무해한 얼굴로 하얀 깃을 잡아 흔드는 룬을 번갈아 보았다.

“난 룬이라고 해.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란드만 보고 가려했지만, 세계수에 문제가 있다기에 여기까지 찾아왔어.”

란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룬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에게 세계수는 태초의 어머니이자, 삶의 근간이나 마찬가지라며.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사라지면 큰일이니까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온 거야. 근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보네.”

미련 없어 보이는 어린 아이의 말에 엘프 병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이런 취급일 줄은 몰랐거든. 하긴, 엘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굳이 내가 도울 필요 없긴 하지. 심지어 엘프들은 외부인을 반기지도 않는데 말이야.”

“아, 아니! 잠깐 기다려 봐!”

일그러진 얼굴로 황급히 룬을 잡은 엘프 병사가 손을 내저으며 제지했다.

“그, 꼭 와 줬으면 좋겠어. 꼭! 자, 이리로 가자. 어서. 응?”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려는 모습에, 룬은 슬쩍 고개를 숙였다 하며 적당히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러자, 병사는 안절부절 못하여 자꾸만 룬의 손에 달린 깃을 힐끔거렸다.

“부탁이다! 내가 귀한 이를 못 알아본 건 사과할 테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면 할 수 없지. 그럼 안내해 줘.”

“! 잘 생각했어. 그리고 나는 편하게 ‘바크’라고 부르렴.”

엘프 병사는 룬이 마음을 바꿀 세라 얼른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룬은 애들 말투 쓰는 것도 나름 익숙해진 스스로에게 기특함 반, 씁쓸함 반쯤 담아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설마 이렇게 바로 태도가 바뀔 줄은.’

‘바크’라고 소개한 엘프 병사는 품에서 나뭇잎 모양이 새겨진 패를 하나 꺼냈다.

“지금부터 길이 하나 생길 거야. 왕궁에 들어가려면 그 길만 밟아야만 해. 혹시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말을 마친 바크는 자신의 패에 마력을 주입했다.

후웅!

신록의 바람이 사막의 열기를 갈랐다.

이어, 일행들의 발 앞에 연초록 바람의 길이 깔렸다.

바크는 시범을 보여준다며, 엘프 특유의 가볍고 빠른 걸음으로 길 위로 올랐다.

그리고 발을 한번 퉁, 구르자 순식간에 수 미터 앞으로 쏘아져갔다.

- 오호? 이것이 그 유명한 바람의 길이로군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게 된다는! 엘프 레인저들이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걸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철컥. 철커덕!

일행 중 덩치가 가장 큰 듀라한도 길 위에 올랐다.

발을 한 차례 구르자 마치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듀라한 역시 쏜살같이 앞으로 사라졌다.

몸이 가벼운 흑미는 아예 앞, 뒤로 날다시피 했다.

“와! 신기해. 밟으니까 앞으로 푸슝! 하고 나아가져요!”

약간의 적응 훈련 후, 일행들 모두 바람의 길에 올라 날아가듯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룬은 거대한 마법으로 된 결계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바람의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결계는, 외부에서 안을 볼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젊은 병사의 성급함. 질병. 보이지 않는 결계로 감싸진 왕궁.

어쩌면 엘프들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할지도 몰랐다.

‘쉽지 않겠는데.’

그리고 그 예상은 시작부터 적중했다.

***

“이게 대체 몇 번째냐?”

성이 난 페르디키온이 결국 벌컥 한소리 터트렸다.

담배가 간절한 얼굴로, 란드 역시 동의했다.

“조금 이상하군. 전쟁이 발발하던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조금? 이게 조금 이상한 거냐. 최대한 빠른 길로 간다더니 결계 지나는 데만 3시간에, 검문 할 때 마다 1시간씩 대기 중인데, 이게 조금!?”

느른한 란드의 말에 페르디키온이 재차 분노를 토했다.

본래라면 적당히 제지했을 룬 역시 영 지루한 목소리를 더했다.

“……그 검문도 벌써 네 번째야.”

일행들은 결계 초입에서부터 검문을 당했다.

검문 때마다 한 명씩 불려가 절차라며 뭔가 작성하거나 검사를 해야 했는데, 질의응답까지 하고 나면 100미터도 가지 않아 또 같은 절차가 반복되었다.

교통수단이나 머물 곳도 마땅치 않으니 편히 쉴 곳도 없었다.

심지어 룬은 다른 일행들 보다 훨씬 오래 시간을 잡아먹었다.

결국 지친 흑미는 하품을 하다 듀라한의 등에 업혔다.

그러다가도 검사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끙끙거리며 깨서 다녀오곤 했는데, 묘한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 지루하긴 하네요. 저야 엘프 왕궁 한 번쯤 구경해보고 싶었던지라, 기대되기도 하지만요!

“좋겠다. 넌 무기 취급이라 별로 검사랄 것도 없었잖아.”

룬이 퉁명스레 한소리 했다.

파라리엄의 주인이 룬이었기에, 제드의 몫까지 룬이 대신 검사를 받고 서류를 작성해 주어야 했다.

‘백야의 주인인 데다 세계수를 해결할 자라는 점 때문에 검사가 더 많다니.’

룬은 손에 든 검은색 천 마스크를 바라보았다.

아이용 마스크라서인지, 분홍 젤리를 가진 귀여운 고양이 발바닥이 한쪽에 수놓아져 있었다.

룬은 아련하게 좀 전의 대화를 회상했다.

“딴 건 없어? 그냥 무난한 거.”

“우리도 물량이 없어서 그렇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거라, 애초에 많지도 않고 말이다. 그나마 남은 것은 이게 전부니, 교환하려면 이 중에서 하면 된다.”

그나마 남은 마스크 중 가장 부담 없는 것이, 이 고양이 발바닥이 수놓인 마스크였다.

‘흑미는 여우와 토끼를 합친 몬스터 모양 마스크였고, 페르디키온은 불도마뱀 마스크였던가.’

귀엽다며 좋아한 흑미와 달리 페르디키온은 ‘이딴 마스크를 꼭 껴야만 하는 거냐!?’라며 영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막상 가져와서 이모저모 살피더니, 나름대로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일행 중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는 건 백야와 듀라한 뿐 이었다.

“삐약!”

“…….”

하지만 새를 부러워해 봐야 소용없는 일.

룬은 왕궁 규칙대로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리곤 대화를 나누는 엘프들의 표정과 기색을 번갈아 떠올리며 나름대로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묘한데. 엘프들의 반응을 보면, 우리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어.’

엄청난 환대를 받는 거야, 바크를 치료한 일을 설명하며 백야의 정체를 밝히고 들어왔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수군거림과 선망의 눈빛.

이제 힘든 상황이 끝날 거라 믿는 근거 없는 대화들이 마음에 걸렸다.

- 드디어! 드디어 기다리던 일이!

- 틀림없어. 저 바크의 깨끗한 몸을 봐!

- 이제 우리 엘프들은 고통에서 해방될 거야. 그 말씀이 진짜였다구!

- 오오, 숲이시여! 우리 엘프들을 굽어 살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어쩌지.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까?

- 축언이라도 부탁해 보면…….

심지어 그 중에는, 정말로 룬에게 다가와 축언을 부탁하고 싶다는 자도 있었다.

룬은 거절하지 않고 축언이나, 백야의 힘으로 낫게 도와주었다.

‘병이 돌 때 가장 귀한 녀석은 돈 많은 갑부도, 왕도 아니야. 바로 명의지.’

내가 보증하지

병으로 인한 재해는 이무기 시절에도 많이 겪었던 일들이므로, 그는 이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해나갔다.

룬은 백야를 계속 울게 하지 않고, 대신 백야의 눈물로 코팅했던 백진주를 꺼내 깃털장식처럼 달았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험험!”

경비 대장이라는 엘프가 헛기침을 하며 치료중인 룬을 불렀다.

듬직하고 나이든 그는 표정에서부터 딱딱한 긴장이 전해졌다.

룬은 속으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짐작이 맞다면, 상황은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터였다.

“검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리고…… 엘프 장로 중 한 분께서 그대들을 초대하고 싶다하시니,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훨씬 정중해진 말투로 경비 대장이 가볍게 목례까지 해 보였다.

초대에 대한 거절 의사는 묻지도 않았지만, 어차피 룬이 원한 바였다.

‘됐군.’

룬이 굳이 지루한 검사 틈틈이, 엘프들을 치료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먼저 세계수 치료를 빌미로 숲의 인장을 얻기 위해 제드의 방법을 택했지만, 막상 와서 보니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던 점.

두 번째는, 치료 가능한 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위 관계자 중 누군가가 룬을 찾아올 것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겸사겸사 정보도 수집하려 했건만, 생각보다 영양가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었어.’

일행 모두 경비대장을 따라 처소 뒤로 이어진 넓고 정리 된 공터에 도착했다.

그제야 마을을 둘러보게 된 그들은, 하나같이 불편한 눈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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