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해진 시간. 마을 하나 크기 정도 되는 거대한 나무가 하늘로 쭉 뻗어있었다.
하지만 울창해야할 가지는 드문드문 말라 비틀어져 있고, 구멍이 뚫려 있기도 했다.
병든 고목이었다.
마을은 전반에 걸쳐 은은한 악취가 풍겼고, 거리를 다니는 이들은 모두 피부를 천으로 가리고 다녔다.
종종 손으로 팔을 긁은 엘프의 옷에 고름과 핏기가 묻어나오기도 했다.
[바크라는 엘프는 그나마 건강한 편이었군.]
[그러게.]
페르디키온과 룬이 전음으로 대화를 하던 중, 제법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옷을 입은 엘프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복식을 보아하니, 인간으로 치면 집사나 안내자 같은 느낌을 풍겼다.
흑미는 귀와 꼬리털을 쭈뼛하게 세우곤 했지만, 악취에 대한 이야기 할 분위기가 아니란 걸 아는지 입을 꾹 다물고 걸었다.
다른 일행들도 참담한 풍경에 말이 없었다.
얼마쯤 들어가자 그런 광경들은 조금씩 사라졌다.
거리는 훨씬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된 곳으로 바뀌어갔다.
집들도 마을에 있던 풀과 나무로 된 집이 아닌 우아함을 살려 지은 돌과 나무로 된 저택이었다.
둥근 담 두 개를 지나 들어가자 청결한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안내한 엘프의 신호에 맞춰 경비를 서 있던 엘프가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면 됩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
“알겠습니다. 곧 식사를 마련할 테니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일행들은 큰 방에 안내되었다.
엘프가 나가고 저들끼리 남자, 다들 마스크부터 벗었다.
룬은 즉시 청결마법을 사용해 역한 냄새와 혹시 묻었을 이물질부터 지워냈다.
“푸하! 아우우. 흑미 냄새 때문에 견디기 너무 힘들었어요.”
“토할 것 같더군. 내가 알던 엘프 마을은 이렇지 않았다. 숲과 나무가 가득한데다, 다양한 허브와 약초를 생산하는 청정하고 깨끗한 지역이라 알고 있었건만.”
- 제가 냄새는 못 맡아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요? 어째 불길한 느낌이 들긴 한데, 이게 나이든 늙은이의 기우인지 잘 모르겠네요.
다들 한소리씩 하는 사이, 란드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흔들어 보이며 방문을 열었다.
“잠시 다녀오마. 저녁은 너희끼리 먹도록 해라.”
듀라한이 녹안을 흐리며 란드를 바라봤지만, 담배가 간절하긴 했는지 란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잘됐네.”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일전에 얻은 <물의 보주>를 꺼냈다.
“! 이건 물의 레어에서 네가 얻어둔 것이군.”
“응. 재난 감지 능력이 있으니 시험 해 볼까 해서.”
‘진작 꺼내보고 싶었는데, 보는 눈이 많아서 어려웠지.’
파도색으로 일렁이는 보주가 룬의 손 안에서 점차 불길한 회검색으로 바뀌어갔다.
“생각보다 심각한데? 이 집안에도 이미 병자가 있어.”
그나마 붉은 색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붉은 색은 룬에게 닥친 불운과 재난을 뜻했다.
룬은 란드가 오기 전에 보주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제드, 함부로 주변 감지하지 말고 이상한 느낌 들면 바로바로 알려.”
- 옙!
긴장을 한 건지, 제드가 웬일로 딴 소리를 하지 않았다.
조금 후, 엘프 심부름꾼이 방으로 들어와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
“말씀은 많이 들었소. 세계수를 치료할 능력이 있는 자들이라니. 귀한 분들을 모시게 되어 무척 영광이오.”
룬과 다른 이들을 맞이한 엘프는 키가 무척 크고, 마른 체형을 가진 올백 회갈색 긴 머리를 지닌 자였다.
처음으로 본 정상적인 피부의 엘프 남성이기도 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엘프 왕궁의 집정관 벨리아누스라고 하오.”
“페르디키온이다.”
“룬이라고 해.”
“흑미예요!”
“삣!”
란드는 정말로 식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듀라한과 제드 역시 방에서 대기하고 있기로 했다.
마지막 울음소리를 낸 새를 보며, 벨리아누스는 이채를 담아 백야를 바라보았다.
“저 새가 정화의 힘을 지녔다는, 그 새인가?”
“삐약?”
백야가 순한 얼굴로 엘프를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많이도 운 새의 눈은 물기를 머금어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
“맞아. 백야라고 해.”
“그렇군.”
빛바랜 미소를 지은 벨리아누스가 룬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할 테니 식사부터 합시다.”
“그럼, 사양 않고.”
페르디키온의 대답과 동시에, 룬도 식사를 시작했다.
엘프의 식단은 검소했지만, 아주 건강한 곡물과 야채 위주의 식단이었다.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지만 내심 아쉬운 식사기도 했다.
‘크리스티나와 먹는 식사는 같은 곡물빵과 야채가 있어도 더 다채롭고 풍성했는데.’
거친 식감을 지닌 곡물빵은 질겼고, 음식은 싱거워 조미료가 그리워지는 맛이었다.
하지만 신선한 버터와 우유, 달걀로 만들어진 스크램블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고기를 좋아하는 흑미도 계란 샌드위치 세 개를 순식간에 먹어치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조차 집정관인 저자의 위치이기에 먹을 수 있는 식사인 거겠지.’
단순히 고기가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밖에서 본 상황은 그만큼 심각했다.
“식사는 입맛에 맞으시오?”
“웅, 네! 맛있어요.”
흑미의 솔직한 대답에 벨리아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소. 허나, 예전이라면 좀 더 좋은 식사를 대접했을 것이오. 지금은…… 깨끗한 물 한잔조차 귀하게 되었으니.”
“상황이라면 들었다. 세계수가 오염된 후, 엘프들이 병이 들기 시작했다더군.”
페르디키온이 대답했다.
검사를 받으며 그도 수군거리는 소리들을 통해 상황을 파악해 둔 뒤였다.
“그렇소. 이미 알고 왔을 테지.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곧 왕궁에서 온 사자가 제대로 설명 해 줄 거요.”
집정관 정도 되는 자가 개인적으로 발설할 일이 아니라는 듯, 미리 선을 그었다.
페르디키온도, 룬도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룬이라고 하였나.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부탁이라면?”
“이 집에, 내 어린 딸과 아들이 있소. 그 아이들을 한 번 봐주면 좋겠구려.”
“알겠어.”
병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치유할 수단이 없는 병이라면 더욱 룬의 치료가 간절했을 터였다.
“지금 봐줄게.”
“!”
벨리아누스의 눈이 움찔 하며 커졌다.
내친 김에, 룬은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대신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뭐든 이야기 하시오.”
“마을 공동 우물이나 저수지 같은 물을 공급하는 곳을 안내해줘.”
페르디키온이 설마, 하는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고심하는 듯했으나, 벨리아누스는 섣불리 허락해줄 눈치가 아니었다.
“건의는 올려보리다. 허나, 지금은 왕궁의 일이 더 우선이오.”
“벨리아누스.”
룬의 부름에 은회색의 눈이 룬의 차분한 시선을 마주했다.
분명 어린 외형을 하고 있는데, 눈에서 왠지 모를 깊이가 느껴졌다.
“아들과 딸을 외부자인 나에게 보일 정도로 간절한 건 당신뿐만은 아닐 거야. 물론, 더 중요한 사안이 왕궁에서 거론되는 것도 맞겠지.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는 해주고 싶어.”
“조치라 하면?”
“오염된 식수를 해결해 주려고.”
깨끗한 물.
엘프들이 가장 먼저 잃어버린 혜택을, 지금 이 작은 소년이 돌려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벨리아누스는 외지인에게 이를 함부로 허락하는 모험을 감수할 자가 아니었다.
“내 아들과 딸을 치유하는 대신, 엘프들의 식수를 맡기라는 건 솔직히 무리요.”
‘꽉 막힌 녀석 같으니.’
룬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피폐하고 지쳐있는 자들을 위해 방어적으로 행동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보증하지.”
“형?”
그때, 페르디키온이 팔짱을 끼고 벨리아누스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난 페르디키온. 현 레드 드래곤 장로 파시야스의 아들이자 불의 일족을 다스릴 장로 후계자다.”
“드, 드래곤 족!”
벨리아누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암묵적으로 엘프가 적대하는 드래곤에 대해 최대한 밝히지 않으려 했지만, 페르디키온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엘프와 드래곤간의 앙금보다, 지금의 엘프들이 더 소중할 터. 정상적인 권력자라면 응당 그 정도 판단은 될 테지?”
중년의 엘프는 새하얘진 얼굴로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은회색의 눈은 이어, 룬을 향했다.
“그, 그럼 자네도…….”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드래곤 일족 장로 후계. 룬이야.”
벨리아누스는 이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침묵에 잠겼지만 룬과 페르디키온은 여전히 태연했다.
아니, 태연하다 못해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음료를 마시며 여유롭게 기다려주고 있었다.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벨리아누스뿐이었다.
한참 뒤.
“우선 결례가 많았소. 불의 일족 아들과, 어둠 일족 아들을 만나서 영광이오.”
여전히 안색은 질려있었지만, 벨리아누스는 의연하게 인사부터 다시 나누었다.
“결정했나?”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벨리아누스가 말했다.
“믿겠소. 불의 일족 장로 후계가 보증한 일이오. 믿지 않으면 레드 드래곤과 불의 일족을 믿지 못한다는 말과 같지 않겠소.”
‘즉, 일이 잘못되면 불의 일족 전체의 책임이라는 소리를 하는 거군.’
룬은 빠르게 속뜻을 파악했다.
겉으로야 믿겠다며, 좋게 양보했지만 철저한 계산이 깔린 말이었다.
“당연하다. 빨리 알아들어주니 편하군.”
시원하게 대답한 페르디키온이 룬을 보았다.
“자. 가자, 아우님.”
룬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삼켰다.
‘실패할 리는 없지만, 상의라도 좀 하고 해라.’
생각과 달리, 이상하게 기분은 꽤 괜찮았다.
무엇이든 하겠소
식사를 마치고, 흑미와 백야는 듀라한과 제드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룬과 페르디키온은 치료를 위해 벨리아누스의 안내를 따라 아늑해 보이는 방 문 앞까지 도달했다.
“이쪽이오.”
방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엘프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 엘프가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벨리아누스는 긴장되어 굳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벨라.”
쌔액- 쌔액-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어린 여자아이가 열에 들뜬 호흡을 밭게 쉬며 누워있었다.
얼굴은 비교적 깨끗했지만, 잠옷 목깃 위로 보이는 자잘한 발진들이 보였다.
“벨라…….”
벨리아누스가 딸의 작은 손을 큰 손안에 살며시 쥐었다.
자식 앞에서 약해진 아비의 모습이 창으로 들어온 달빛에 비춰졌다.
“아, 아빠.”
희미하게 뜬 눈이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벨리아누스를 보았다.
“그래. 힘들었지? 아비가 의사를 데려왔단다.”
“으응.”
쌔액-
벨라 라는 아이는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아이는 숨을 가쁘게 쉬며 입술을 떨었다.
페르디키온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고, 룬은 백야의 깃에 새로 눈물이 코팅된 진주를 달았다.
벨리아누스가 물러나고, 룬이 의자위에 앉았다.
작은 아이의 손을 쥔 룬이 백야의 깃털에 묻은 눈물의 힘을 아이에게 스며들게 했다.
화아아
은은한 흰 빛이 온기와 함께 아이의 몸속으로 들어가자, 호흡이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