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242)

서서히 가라앉아가는 발진.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도 점차 건강한 혈색이 돌았다.

감탄을 터트린 벨리아누스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감사합니다.’라고 입속으로 되뇌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벨라는 편안한 얼굴로 가만히 룬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다 됐어.”

“정말, 다 된 거 맞소?”

“쉿.”

검지를 입가에 댄 룬이 눈치를 주었다.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이 된 아이는 긴장이 완전히 풀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벨리아누스는 멍하니 딸의 얼굴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편안하게 잠이 든 모습.

하염없이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고맙소. 그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구려.”

“뭘. 약속만 지켜주면 돼.”

“그러리다. 아들까지 치료해 주기만 한다면 말이오.”

기실, 벨리아누스의 사적인 부탁이니만큼 공정함을 잃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긍지를 깨고 한 일.

의연해 보였던 엘프 집정관은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열쇠를.”

“네.”

벨리아누스가 입이 무거워 보이는 늙은 병사에게 굵은 금속 열쇠를 받았다.

병사가 지키는 나무문을 지나자, 돌계단이 지하로 길게 이어져있었다.

“이제 볼 것은, 드래곤 족이라 해도 반드시 함구해야 할 비밀이니 지켜주길 바라오.”

“?”

그림자가 진 엘프의 눈이 유난히 어둑했다.

“발 밑을 조심하시오.”

벨리아누스가 한쪽 벽에 걸쳐져있던 등불을 손에 들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상한데.’

딸인 벨라의 증상은 정도가 약하기는 했으나 방 안에서 치료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옅은 약초 냄새와, 수시로 땀을 닦는 수건.

입고 있는 잠옷은 땀에 젖어있었지만 깨끗한 편이었다.

한데 이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길은 내려갈수록 지하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났다.

약초는커녕,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지하실? 창고?’

환자를 두는 곳이라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만 떠올랐다.

앞서가고 있는 페르디키온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내려갈 셈이지.”

결국 입을 연 페르디키온에게 벨리아누스가 대답했다.

“거의 다 왔소.”

먹먹하고 침통한 기색이 느껴지는 말이 끝나자마자.

으아아악! 아아악!

아래에서 소름 돋는 비명이 들려왔다.

즉시 페르디키온은 룬의 손을 잡았다.

“저 소리는 뭐냐?”

상대를 압박하는 드래곤 피어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벨리아누스는 잠시 경직 되었을 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걱정 마시오. 그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터이니.”

“웃기지 마라. 그럼 이 피 냄새는 뭐란 말이냐.”

“!”

룬 역시, 미미한 쇠 냄새와 더불어 느껴지는 비린 냄새에 설마 하고 있던 참이었다.

등을 세우고 고고하게 내려가던 벨리아누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움직임이 묘하게 기괴해 보여서, 룬 역시 차분히 눈을 빛냈다.

“맹세하오. 벨리아누스의 이름으로. 당신들만이 내 아들을 되돌릴 수 있는 희망이기에 데려온 것일 뿐. 피 냄새는 식성이 바뀐 아들을 위해 내어준 음식 냄새일 뿐이오.”

“엘프가, 날고기를 먹기라도 했단 말이야?”

룬의 의문에 벨리아누스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엘프가 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피비린내를 풍기며 먹는 식성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차하면 힘을 써서라도 탈출해야겠군.’

어둠을 이용하는 룬의 능력이라면 은닉과 탈출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페르디키온은 여전히 긴장한 눈치였지만 룬은 더욱 차분히 주위를 살폈다.

“거의 다 왔소.”

침통한 목소리가 선고하듯 말했다.

평지에 발을 딛자, 주변은 오히려 조금 더 밝아졌다.

부스럭

절그르륵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으나, 나무와 사슬소리가 나자 룬과 페르디키온이 직감적으로 경계하며 걸음을 멈췄다.

벨리아누스는 앞에 닫힌 철문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철컹!

철창으로 된 문과 토굴처럼 지어진 곳.

서늘한 것이 원래는 과일이나 얼음 같은 걸 보관하는 장소였을 듯 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룬은 이곳이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아들아.”

그르륵.

페르디키온과 룬은 소리의 정체를 보고 발걸음을 완전히 멈췄다.

손에 든 등불이 흔들리며 벨리아누스의 얼굴에 음영을 번갈아 비추었다.

인자하고 무뚝뚝한 모습과 기괴한 모습을 섞은 듯한 얼굴이 안에 있는 괴물을 소개했다.

“인사하시오. 내 아들, 아퀴르요.”

“…….”

“…….”

어둠속에서 아퀴르의 모습이 드러났다.

뾰족한 엘프 귀.

회녹색 핏줄이 두드러지는 피부.

눈동자가 없는 멍한 눈.

입술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짐승의 송곳니.

“마족화가 진행 되었군.”

룬이 조용히 사실을 입에 올렸다.

벨리아누스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곧, 죽일 생각이었소. 긍지 높은 엘프로서 죽게 하는 것이 아비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리라, 마음을 굳히기로 했었지. 마지막 만찬을 대접하기 위해 신선한 우유를 내는 소를 잡아 주었소.”

선지가 흐르는 고기가 구석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나무로 된 접시에 주었던 모양이나, 아무렇게나 던져진 접시는 아퀴르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우우. 우…….”

굳건했던 집정관의 모습은 눈물 흘리는 아들 앞에 무너져내렸다.

“……제발 살려주시오.”

울분을 참으며 선 벨리아누스가 눈가를 적시며 부탁했다.

“당신들이 이를 보고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했소. 보여 주는 것뿐이라 여겨 한 부탁이었지. 허나, 딸을 치료하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졌소.”

그건 마치, 사막에서 목 말라 죽어가는 운명을 받아들였던 자가 지나가는 비구름을 맞아 입술을 축일 물을 얻은 후.

달디 단 생명수의 맛을 잊지 못해 희망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내 힘으로는 기대조차 끊을 수가 없다니.”

탁한 한숨이 흩어져 나왔다.

“룬?”

“괜찮아.”

페르디키온 앞으로 나선 룬이 천천히 아퀴르가 있는 창살 앞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벨리아누스를 올려다보았다.

“지금부터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절대로 제지해선 안 돼.”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명령.

벨리아누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간식거리를 하나 골랐다.

크리스티나의 축복이 깃든 낙엽 페스츄리였다.

그리고 룬이 제작한 백야의 눈물코팅 진주를 잇 사이에 넣고 까뜩! 씹었다.

깍!

반으로 깨진 딱딱한 진주를 뱉은 룬은 그걸 다시 가루로 만들어 설탕처럼 낙엽 페스츄리에 뿌렸다.

“자.”

피크닉 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나무 포크에 찍어 내밀자, 아퀴르가 공격적으로 빵을 물어뜯었다.

콰각!

나무로 된 포크가 함께 씹혔지만, 룬은 유유히 손을 물리며 일어났다.

“크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아퀴르가 꺼어억! 하며 몸을 틀기 시작했다.

“저거 토하면 안 되는데.”

“뭘 먹인 것이오?”

“골드 드래곤의 축복과 불사조의 치유 눈물이 담긴 약빵.”

룬과 벨리아누스의 눈이 마주쳤다.

“……참고로, 빵이 넉넉하진 않아.”

“!”

재시도 할 기회가 한정적이라는 말에, 벨리아누스가 긴장으로 호흡을 흐트러뜨리더니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들어가겠소.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물릴 걸. 아퀴르를 살린다 해도, 상처를 통해 마기가 당신에게 흘러들어가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그건……!”

벨리아누스는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한번 포기했던 아들의 목숨을 살리느냐의 기로에 선 그는 한 줄기 이성을 용케 잡고 있었다.

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잘 알겠어. 그럼, 그 각오 다른 곳에 써주라.”

“다른 곳이라면?”

룬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한동안 내 부탁이나 좀 잘 들어주면 돼.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거래야.”

“설마 그 상자는…….”

룬이 꺼내 든 상자를 알아본 페르디키온이 놀라움과 기특함을 담은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룬 역시, 페르디키온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거래하는 걸로 알게. 자세한 이야기 할 시간은 없지만…… 아들을 마족에게 뺏기는 것보단 나을 거야.”

“무엇이든 하겠소.”

눈물이 얼룩진 벨리아누스가 승낙했다.

룬은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를 열고, 숙면에 좋은 과일과 근육이 나른해지는 약재를 집어넣었다.

탁.

뚜껑이 닫힌 향기 상자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은은한 과실향과 박하향이 과하지 않게 어우러지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즉시, 룬은 벨리아누스에게 상자를 넘겼다.

“자, 이걸 들고 앞에서 지키고만 있으면 돼.”

“알겠소.”

비장한 얼굴로 벨리아누스가 상자를 받아 안았다.

그는 상자를 보석처럼 들고 철창 앞에 앉았다.

꺼억 거리는 아퀴르의 앞에 철창을 두고 앉은 벨리아누스는 몸에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중에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형, 우린 물러서자.”

“지켜보지 않아도 되는 거냐?”

“보긴 할 건데, 좀 떨어져서.”

‘아무래도 페르디키온은 향기 상자에 더 취약한 것 같았으니 말이지.’

돌계단 위로 오르기 시작한 룬은 등불 아래에서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벨리아누스의 등을 보았다.

근육이 풀렸을 텐데도, 아버지의 그림자는 미동 없이 아들을 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향기 상자의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겠네. 정신력이 강해.’

혹은, 부성이 강한 것일 터.

룬 입장에서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크나 작으나, 상자의 영향이 남아있는 기간 동안 벨리아누스는 은연중에 룬의 편을 들어줄 터였다.

‘집정관이라. 믿음직한 엘프가 내 우군이 되어 주겠는걸.’

룬은 빙긋 웃음을 띄우며 페르디키온과 돌계단 위로 올라가 상황을 지켜보았다.

일촉즉발

우우우

짐승처럼 울던 아퀴르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어갔다.

마기에 오염되었던 몸은 골드 드래곤의 축복을 받아들이며 서서히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자, 룬은 모코지석을 꺼내들었다.

<다들 뭐 해?>

<흑미는 제드 아저씨랑 듀라한이랑 같이 달 구경하고 있어요!>

<맞습니다. 달이 참 이쁘게 뜨긴 했습죠. 뭔가 좀 으스스하기도 하지만요. 란드 님은 여적 안 오시는데, 뭐 별 일 없으시겠죠. 룬 님과 페르디키온 님께선 언제 오십니까?>

룬은 벨리아누스와 아퀴르를 다시 한번 눈으로 확인하고 모코지석을 두드렸다.

<좀 걸릴걸. 벨리아누스가 부탁한 게 있어서.>

<부탁이요?>

룬은 현 진행 상황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 해 주었다.

마기에 침식당했다는 이야기는 이르다는 생각에, 우선 딸을 치료하고 아들을 봐주는 중이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일러주었다.

<캬! 이거이거, 흥미로운 냄새가 나는데요? 정말 몸이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하다못해 손 이라도 있었다면 연구 좀 해봤을텐데. 이거 참, 아쉽긴 하지만 뭐 별 수 없죠.>

‘묘하게 글자 속도가 더 빨라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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