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페르디키온에게 몇 번이나 효과를 본 룬은 답답할 따름이었다.
정작 향기 상자의 효과를 받았던 페르디키온은 기억을 거의 못했다.
그냥 좋은 향기를 맡았고, 기분이 편안했다. 좋았다. 개운하다. 정도는 기억했지만 그 뒤로 아우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줄줄이 이야기 했던 기억은 쏙 빠져있었다.
‘제 목숨보다 귀한 아들 손목을 두고 칼을 빼든 자에게서 저런 반응을 보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나.’
고귀한 숲의 일족인 엘프라 하나, 무정하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룬이 보기에 벨리아누스는 오히려 가족에 대한 정이 있었다.
‘아마도, 자식들이 병들고 난 후 겪은 개인적인 심경 변화인 듯하지만.’
룬은 티타임을 두고 자녀들과 시간을 가지지 못했었다는 말을 재차 곱씹었다.
실제로 그 예상은 맞아서, 벨리아누스 역시 이 일이 생기기 전에는 가족들보다 다른 가치가 우선이었던 엘프였다.
‘묘하게, 나와 페르디키온을 제 자식들하고 비춰보는 것도 같고.’
떠올린 생각은 어쩐지 이질감이 들었다. 룬은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며 적당히 밀어두었다.
물끄러미 룬을 지켜보던 벨리아누스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탁,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잔이 테이블 위에 내려졌다.
“식사 때, 식수를 얻을 수 있게 돕겠다 한 말은 지금도 변함없겠소?”
“응.”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엘프가 부드러운 우유향 섞인 숨을 쉬었다.
“그대는 내 자식들도 치료해주고, 다른 엘프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을 돌려준다 하였소. 어린 해츨링이라 하나, 그 일들을 그저 호의로 해 줄 것 같진 않소.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오.”
정론이었다.
벨리아누스의 은회색 시선이 옆에 있는 페르디키온을 함께 바라보았다.
“옆에 계신 화룡족 후계의 행동으로 보아 내 아들의 치료에 따르는 위험을 알고, 감수했음을 알 수 있소. 내 손에 상자를 들려주기 전, 응당 대가가 있을 것이라 내게 예고까지 했었지.”
진중한 어투와 시선. 연륜이 느껴졌다.
지하실에서 페르디키온의 발목을 잡아가며 눈을 부릅뜨고 버티던 모습과 달리, 틈 하나 없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어둠의 후계께서는 그만한 대가를 원할 자격이 있소. 혹, 원하는 것이 있다면 편히 이야기 해 주면 힘닿는 대로 도우리다.”
룬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
진하고 달콤한 맛이 따끈하게 목 너머를 데웠다.
“내가 원하는 건 엘프왕이 란드에게 받은 ‘숲의 인장’이야.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인장을 이용해 엘프들의 신목. 세계수를 되살려 줄 생각이고.”
여기까진 페르디키온 역시 아는 이야기였다.
이 뒤는 모르고 있었겠지만.
“그리고, 본인이 원해야겠지만, 란드가 정말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
“…….”
누가 들으면 어린 나이에 꾸는 꿈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나같이 평범한 자가 입에 올릴 사안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고 귀를 의심케 만드는 구려.”
이어 페르디키온은 그럼 그렇지, 라는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내 아우지만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별거 아니야. 그냥, 전에 그린 일족 중 신세 진 녀석이 있어서 그래.”
크리스티나 덕분에 페르디키온 역시 만드라고라를 먹고 고생했던 룬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래저래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불퉁한 얼굴을 했지만, 여기서 꺼낼 생각은 없어보였다.
결국 페르디키온이 한숨을 한번 쉬며 팔짱만 끼고 의자에 몸을 젖혀 기댔다.
그 자체로 더 이상 말릴 생각 없다는 표현임을 안 벨리아누스가 잠시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엘프왕은, 흠. 솔직히 말해 우리 엘프들에겐 무척 존경을 받고 계시오. 그 이유는 오직 엘프들을 위해서만 움직이시기 때문이지. 그렇기에, 그대들과는 부딪히게 될지도 모르오.”
“왜?”
“다소 민감한 문제요. 현재 엘프들이 이만큼 삶을 유지하고,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엘프왕이 ‘숲의 인장’의 권한을 엘프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지. 이에 오해는 말아주시오. 이는 드래곤이었던 란드가 스스로 넘긴 것. 그대들이 드래곤이듯, 란드 역시 드래곤이지 않소?”
“……알고 있다.”
탐탁지 않은 말투로 긍정한 페르디키온을 의식했는지, 벨리아누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엘프이기에 드래곤들의 마음을 완벽히 알진 못하오. 허나, 추측하기론. 반려로 맞은 공주님을 위해 한 그 약조. 그거라도 지켜야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지킬 수 있다고 여긴 것 같았소.”
차가 조금씩 식어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가 열이 식어가는 차와 함께 차분히 말을 이었다.
“란드 역시 드래곤으로서 긍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게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오.”
“긍지는 무슨. 이미 다 박살 난 녀석이 무슨.”
결국 대놓고 한 소리하며 한숨을 터트린 페르디키온이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룬은 이야기를 다 들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할게. 하지만, 엘프왕이 ‘숲의 인장’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현상유지는커녕 더 악화되고 있다는 소리잖아?”
“그렇소. 이대로 가면 숲의 인장으로 좀 더 오래 버틸 뿐, 결국 다른 엘프들 역시 내 아들과 같은…… 최후를. 맞을지도 모르오.”
엘프의 멸족을 입에 담는 목소리가 떨렸다.
이는 단순한 멸족이 아니었다.
엘프들 모두가 마족화가 된다는, 비참한 최후였다.
“막을 방법이 있다면?”
“어찌 말이오? 나 역시 엘프족의 존속을 간절히 바라나, 전망이 이토록 어두울 수가 없건만.”
벨리아누스의 탁해진 은회색 눈에 달빛이 스몄다.
유난히 시리고, 암담해 보였다.
그에 대비되는 붉고 선명한 루비색의 눈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벨리아누스. 내일 왕궁에서 사자가 오기 전, 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줘. 마기를 없애고 깨끗한 식수를 얻게 해줄게. 그건 엘프왕에게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고 증명할 수단이 될 거야.”
이야기를 들은 벨리아누스는 생각에 잠겨, 잠시 침묵을 지켰다.
룬은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엘프 왕국의 식수는 대부분 시들지 않는 세계수를 통해 얻는 물. 그 물이 풀, 나무, 식량. 그를 근간하여 나오는 의복과 거주지까지 영향을 줘. 그러니 물을 바꿔주기만 해도 내 힘이 마기에 대항 가능하다는 근거가 되어 주겠지.’
의외의 실력자
마르고 긴 하얀 손이 천천히 제 눈을 덮었다.
자신의 왕국에 대한 절망을 입에 담는 참담함이 온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비슷한 방법이라면, 써 봤소. 우리 엘프들 중 물의 정령을 수준급으로 다루는 정령사들이 물을 정화하기 위해 시도했었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온 것인지, 손을 떼고 뜬 눈이 어두웠다.
엘프 전체의 목숨이라는, 감당키 힘든 무게를 져 왔던 자가 뱉은 단어들은 생생하게 과거의 참상을 전했다.
“하지만 세계수에서 마기가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에, 정령사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힘을 쓴다 해도 일주일을 가지 못했소. 때론, 정령사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마기가 정령과 정령사를 감염시키기도 했지.”
‘조치하려다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했었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을 그의 마른 몸이 한 없이 약해보이기도, 또 누구보다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동족들.
그리고.
“물의 정령을 가장 잘 다루는 정령사였던 내 아들이 저렇게 된 후, 더는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소.”
결국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까지.
슬픈 미소를 띄우며 벨리아누스가 차가워진 우유잔을 들었다.
“자랑처럼 들리겠지만, 내 아들 아퀴르는 물의 정령왕도 소환할 수 있게 되리라 예견된 촉망받는 정령사였다오. 나 역시 정령을 다루나, 이 집에 남아있는 깨끗한 물은 저 아이의 힘이 컸지.”
식사 때 그가 언급한, 이제 물을 구하기도 어려워졌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페르디키온은 마음이 다소 약해진 듯 자세를 바로 했다.
한편, 룬은 슬그머니 손으로 제 턱을 문질렀다.
‘물을 해결해 주면 아퀴르와 벨리아누스가 관리는 확실히 해 주겠군.’
아퀴르가 회복하는 시점까지 감안해도,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의 영향이 남아있을 터.
부탁하면 들어줄 확률이 높았다.
우선, 룬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전음을 사용했다.
[형, 인장에 대해 말해도 되겠지?]
[저 사태를 해결하려면 그 방법뿐일 것 아니냐. 엘프들만의 일도 아니고, 마족이 관여되어 있기도 하니 좌시할 순 없겠지.]
[좋아.]
룬은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여 ‘물의 보주’를 꺼내보였다.
“우선, 나는 정령사가 아니야. 당연히 해결 방법도 전혀 달라.”
“이건……?”
“물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아티팩트야. 물의 정령왕의 손길이 닿아서, 등급도 높지. 물의 인장을 가진 자만 사용 가능하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지만, 내가 지닌 어둠 속성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밤에 사용하면 효력이 상승해.”
“물의 인장이라면, 물의 일족인 블루 드래곤이라도 소환한다는 거요?”
“아니. 대신 물의 일족 예비 장로가 내게 직접 준 물의 인장이 있어.”
“……!”
벨리아누스의 시선이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빛을 담고 물의 보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닫고 퍼뜩 눈을 떴다.
“잠시만, 밤에 효력이 상승한다 하였소?”
“그렇지.”
“그럼 이걸 언제 써본단 거요?”
“지금밖에 시간이 없는 것 같은데. 내일 되면 왕궁으로 가야한다며?”
벨리아누스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가능하다고, 안 된다고 말할 여러 가지 가설들이 그의 머리에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나, 시도할 시간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 가설들을 더러 입 다물고 있으라 종용했다.
이제까지의 침체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그가 문을 벌컥 열고 병사에게 빠르게 명령했다.
“은밀히 내 지팡이와 의복을 가져오도록 해라! 어서!”
“예, 옛!”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 엘프가 깜짝 놀라 빠르게 움직였다.
룬과 페르디키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엘프의 이동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병사는 빠르게 벨리아누스의 외출 의복과 나무로 된 지팡이를 가져왔다.
“여기 있습니다.”
“이 방 앞에서 아무도 오지 못하도록 지켜라.”
“알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건지 병사가 긴장된 눈으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눈치 빠른 부하라 다행이군.’
우연인지 가져온 옷도 잠행하기 좋은 탁한 검갈색 옷이었다.
벨리아누스는 페르디키온과 룬이 잠깐 뒤돈 사이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마스크까지 쓴 그에게서 보이는 건, 은회색 눈동자뿐이었다.
“좋소. 가봅시다.”
벨리아누스는 엘프의 정령 마법인, 바람 요정의 가호를 받는 ‘윈드 러너’의 축복을 걸어주었다.
“지붕을 타고 가도 상관 없겠소?”
“응. 난 괜찮아.”
“룬이 괜찮다면 나도 상관없다.”
아들을 한 차례 본 벨리아누스가 먼저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노장이 될 나이였건만, 그는 어지간한 젊은 레인저들보다 훨씬 몸이 날쌨다.
‘의외의 실력자였네.’
그간 얼마나 위축되어 있었는지 실감이 날 정도로, 벨리아누스의 발걸음은 그 둘이 겨우 따라붙을 정도로 빠르고 민첩했다.
너무 빨라 중간 중간, 룬과 페르디키온은 순간이동 마법으로 벨리아누스의 곁으로 이동하며 따라잡았다.
그러자 잘 따라온다는 걸 확인한 그가 속도를 높였다.
창문 밖으로 나온 지 겨우 5분이나 되었을까.
그들은 저수지 댐에 도착했다.
“후우, 간만에 움직였더니 몸이 전 같지가 않구려.”
“글쎄, 생각보다는 실력이 대단하군. 행정을 주로 맡아 보는 자라 여겼건만.”
“전쟁이 없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으나……. 나 때는 전쟁에서 활약한 공로를 좀 더 크게 보았었소.”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정신력에 체력까지.
젊을 시절의 그는 크리스티나와도 합을 나눠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정령사라고도 했으니…… 엄청난 인재로군.’
마음 같아선 권속을 권해보고 싶을 만큼 탐나는 인재였다.
“여기가 엘프들의 식수를 가장 많이 공급하는 저수지요.”
“좋아. 시작할게.”
“조심해라, 룬.”
댐에서 내려다 본 물은 이미 마기가 고여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룬은 물 위에 뜨는 마법을 사용하고 저수지 위로 내려갔다.
‘아멜리아처럼 생명체까지 정화시키긴 어렵지만, 순수한 물 정도라면.’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백야의 눈물이 코팅된 백진주와 룬의 힘이 담긴 흑진주를 저수지에 퐁당퐁당 넣었다.
얼핏 보면 검고 하얀 돌멩이 같은 마력석들이 반짝이며 가라앉았다.
이어, ‘물의 보주’를 손에 쥔 룬이 보주를 작동시켰다.
찰랑-
백진주가 물의 보주와 함께 공명하여 반짝였다.
이어, 룬이 지닌 물의 인장이 물을 정화해가기 시작했다.
반발하여 사악하게 일어나는 마기는 어둠으로 물든 흑진주가 검은 광택을 내며 마기를 마음껏 집어먹었다.
포식자처럼 마기를 삼키는 검은 진주에 대항하는 듯했던 마기는, 이내 그 힘을 잡아먹히며 쫒기기 시작했다.
자잘한 물살이 힘의 흐름에 따라 일렁이고, 거칠게 흔들렸다.
“이럴 수가…… 물이, 물이 돌아오고 있어.”
댐 위에서 지켜보던 벨리아누스가 놀라 입을 벌렸다.
촤아악-
출렁이는 물은 조금씩 댐 너머로 넘쳤다.
달빛이 비산하는 물방울을 비추었고, 어둠은 춤추는 물과 어우러져 흥을 돋웠다.
지켜보던 페르디키온조차 피식, 하고 웃었다.
“그래, 역시 아우님이군.”
움직이는 물과 어둠의 이야기가 아무도 모르는 밤 속에서 음악처럼 흘렀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벨리아누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광경이오.”
밤이 깊어졌고, 되살아난 물은 더욱 화려하게 물결치며 투명한 물 자락을 흔들었다.
***
‘생각보다 힘드네. 옛날 생각나는군.’
삼라만상이 도통 말을 안 들어 고생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은 꽤 능숙해졌다 여겼건만, 마가 낀 물이라 그런지 보통 말을 안 듣는 게 아니었다.
‘남의 집 애가 와서 난동 부리는 기분이군. 정말 진 빠진다.’
룬은 저수지 안에 던져넣었던 진주들을 회수하며, 물 이곳저곳을 살폈다.
만약을 위해, 마기에 영향 받지 않을 룬 혼자 잠수한 참이었다.
<룬, 이상한 건 없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