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 진주도 거의 다 회수했고, 마기를 지닌 필드도 일단은 손 봤어. 진주만 새 걸로 바꾸고 갈게.>
룬은 미리 준비해 둔 붕어 떡밥을 으르렁거리는 놈들 주변에 대충 뿌렸다.
원료는 크리스티나의 축복이 담긴 빵과 과자. 그리고 챙겨왔던 물 등이었다.
‘원래는 엘프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소생 언령 연습이나 하려고 가져온 거였는데.’
의욕에 가득 차서 스프로 써 먹을 축복이 담긴 물까지 챙겨왔건만, 고스란히 물 속에 난 이끼의 영양분으로 쓰고 있었다.
‘숲의 인장을 가져가는 비용이라 치면 또 싸게 먹히는 거긴 하지.’
생태계의 순환을 고려하면, 1차 생산자에 속하는 이끼나 플랑크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물 속을 열심히 다니며 정리한 룬은, 다시 한 번 저수지 안을 꼼꼼히 살피고 물 위로 올라왔다.
“푸하!”
“고생 많았다. 정말이지, 드래곤 중에 이런 고생 하는 건 아마 너뿐일 거다.”
페르디키온이 반쯤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수건을 내밀었다.
댐 위로 올라온 룬은 급한 대로 청결마법과 함께 몸을 말렸다.
벌써 해가 떠 있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 여기 너무 넓더라.”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실프들을 다루는 벨리아누스가 인자한 눈으로 룬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곤에 대한 인상이 바뀌는 기분이 들 정도요. 참 이상한 기분이지 뭐요.”
맑아진 물은 밑이 투명하게 보일 정도라, 룬이 움직이는 거나 힘을 쓰는 것들이 무척 잘 보이던 참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조카나 사촌동생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훈훈했다.
‘엘프왕도 그리 여겨주면 좋겠건만.’
룬은 수건을 돌려주었다.
돌아본 저수지는 마기의 흔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계수에서 흘러들어온 물에 섞인 마기는 흑진주가 먹어치웠고, 백진주는 맑아진 물을 잘 유지시키고 있었다.
“물의 정령을 다루는 자가 관리만 해주면, 한동안은 괜찮을 거야. 작업은 잘 되긴 했지만 임시방편이니, 그 전에 숲의 인장을 얻어야 해.”
진주들의 성능이 훌륭하긴 해도, 무한히 유지되는 건 아니었다.
“알겠소. 이 정도 성과를 낸 자는 여태껏 한 명도 없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말이오.”
벨리아누스가 지난밤보다 훨씬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간 짊어져 왔던 짐이 하나씩 해결되어 가고, 더 나아질 방법이 보이자 그 역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벨리아누스가 보기에도 그렇다면, 충분하겠지. 엘프왕을 만나 숲의 인장과 세계수의 회복을 교환하겠다고 제안해 볼 생각이야. 엘프들을 위해, 이 제안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도와주길 바라.”
“좋소. 이만큼 애써준 어둠 일족과 불의 일족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오. 이 사실을 벨리아누스의 이름을 걸고 나의 왕께도 알릴 것이오. 분명, 나의 왕 역시 이 업적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오.”
룬의 말에 벨리아누스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용꿈은 길몽
-이야, 간밤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요? 전에 물의 레어도 그렇고, 어째 매번 저만 못 가요, 저만.
벨리아누스의 저택으로 돌아온 룬과 페르디키온.
룬은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다른 일행들에게 설명 해 주었다.
제드는 무척 아쉬웠는지 구시렁거렸다.
“어쩔 수 없지. ‘물의 보주’는 밤에 효력이 더 좋으니까. 난 아멜리아가 아니라서, 도구 효과가 좋을 때 가야 한다고.”
북적거리는 것이 어색했던지, 란드는 방을 옮긴 지 오래였다.
벨리아누스의 자녀들 이야기에 흑미는 히익, 하고 놀라 손을 모으고 있었다.
“으아…… 아팠겠어요. 그럼 벨라랑 아퀴르는 어떻게 됐어요?”
“지금은 잘 회복하고 있어. 하루 이틀 뒤에는 충분히 거동 할 수 있을 정도는 될거래. 엘프들이라 마기에 오염되면 치명적이지만, 다행히 회복도 빠른 편이었거든.”
“후아, 다행이다.”
크게 한숨 쉬는 시늉까지 해 보인 흑미가 한 손으로 가슴을 토닥였다.
“여긴 별 일 없었던 거지?”
“네! 제드 아저씨가 엄청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구, 옛날 용사 이야기도 해주고 그랬어요. 예쁜 장미공주 이야기가 제일 재밌었는데, 나중에 룬 님한테도 들려드릴게요!”
흑미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 지 표현하는 방식이 늘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흑미는 하루가 다르게 어휘와 손, 발짓을 쓰는 빈도가 많아지고 있었다.
최근 들어 말을 잘 받아주는 제드 덕분임을 눈치 챈 룬은 새삼 제드가 다시 보였다.
“의외로 육아가 체질인 거 아니야, 제드?”
- 엣헴! 저야 워낙 다재다능, 만능 재주꾼 아닙니까!
“제법이긴 하네. 앞으로 그렇게만 해.”
룬은 피식 웃으며 긍정해 주었다.
특히 제드가 흑미에게 해 주는 말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순간순간 당혹스러운 단어가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흑미에게 쓸 언행을 조심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혹시 흑미가 도울 일은 없어요?”
“음.”
생각에 잠겼던 룬이 입을 열었다.
“우선 엘프들의 마족화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한번 마족에 가까웠었다는 사실이 앞으로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니까. 혹시라도 밖에 새지 않도록 조심해 주면 돼.”
“네에. 알겠숩니다!”
작은 손으로 입을 꼭 막은 흑미가 눈을 빛냈다.
“이건 꼭 해줘야 하는 거고, 사실은 두 번째랑 세 번째가 중요해.”
“앗. 두 번째는 뭐예요?”
쫑긋 거리는 여우귀가 궁금증을 한껏 드러냈다.
“너랑 듀라한이 같이 해 줄 일이 있어. 형이 자세히 말 해 줄 거야.”
그 말에 뒷목이 뻣뻣하게 굳은 페르디키온이 시선을 외면했다.
‘뭐…… 기분은 알겠지만, 네가 나서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저수지에서 마기를 만져본 룬은 페르디키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 둔 상태였다.
‘그걸 하라고?’라며 반발하긴 했지만, 결국 승낙한 페르디키온.
룬은 나름대로 어려운 결단을 내린 페르디키온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좋아요!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세 번째는요?”
“그건 두 번째 일이 잘 되고 나서 알려줄게. 페르디키온 형이랑 호흡을 맞춰야 하거든.”
“와아! 페르디키온 님이랑요? 너무 기대돼요!”
히힛. 하고 웃은 흑미가 침대 위에서 햇살을 받으며 늘어져있는 백야를 보았다.
“백야야!”
“삐이?”
폴짝.
백야 옆에 뛰어든 흑미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아직도 자아? 벌써 아침이야!”
“삐약!”
“빨리이. 우리 이따 밥도 먹어야 돼!”
눈을 끔뻑인 백야가 가느다란 발로 이불 위에 섰다.
묘하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룬 역시 슬그머니 걱정되었다.
“괜찮은 거 맞냐.”
“삐루루.”
룬을 바라보던 백야가,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새의 시선 끝에는 거대한 세계수가 있었다.
“삐이이…….”
힘없는 울음소리였다.
그 모습을 보던 룬은 퍼뜩 스친 생각에 사로잡혔다.
‘혹시, 파도의 던전 때처럼 무언가와 공명하고 있나?’
신목이라 불리는 세계수이기 때문일까.
백야와 세계수가 서로 통하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정말로 나무와 소통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 때, 방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택의 사용인이었다.
“다들 계십니까? 곧 식사 준비가 끝납니다.”
“곧 갈게.”
“네, 다만 옆방의 란드 님께서는…… 내려갈 상태가 아니어서 어찌 해야 할지…….”
“무슨 상태길래?”
드래곤이 굳이 식사를 매끼 먹을 필요 없다.
하지만 오늘 아침식사는 단순한 식사자리가 아니라, 엘프왕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될지 의논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룬과 페르디키온이 드래곤 족임을 밝힌 상황.
드래곤의 자격을 잃었다지만 란드 역시 그들의 보호를 위해 함께 참석해야 했다.
“그것이, 약주를 좀 하신 모양입니다.”
“……알겠어. 조금 뒤에 내려갈게.”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거야?’
아무리 상황을 몰랐다 해도, 술독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면 문제가 있었다.
“형, 듀라한이랑 란드한테 잠깐 다녀올게. 흑미랑 백야 데리고 먼저 내려가 줘.”
“알겠다.”
페르디키온이 대답하자 흑미가 침대에서 가볍게 내려섰다.
듀라한 역시 파라리엄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이.”
눈을 한 차례 깜빡인 하얀 새는 날아올라 흑미 머리위에 앉았다.
손을 뻗어 백야의 깃을 쓰다듬은 흑미가 염려 섞인 눈으로 말했다.
“란드 아저씨 배 많이 고플 것 같은데. 룬 님, 란드 아저씨한테 밥 꼭 같이 먹자구 해주세요. 흑미도 걱정돼요.”
“그래.”
“안될 것 같다면 버리고 와라, 룬. 그리고 술은 절대로…….”
“안 마실게.”
한 마디씩 남긴 흑미와 페르디키온은 룬의 대답에 만족하며 먼저 응접실로 향했다.
룬은 옆방 문 앞에 서서 가볍게 노크했다.
기척은 있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보인 광경에, 룬은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주정꾼이 따로 없군.’
방에는 과실주 향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잔이 하나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턴 병째로 들이켰는지 바닥과 테이블에 구르는 포도주병은 십 수병이 넘었다.
엎지르기도 했는지 깨끗했을 바닥에 붉은 포도주색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침대에 죽은 듯이 늘어진 란드는 팔을 침대 밖으로 내놓은 채 곯아떨어져 있었다.
철컥, 철컥.
듀라한이 걸어들어오며 들린 갑옷소리에도 움찔거리는 반응조차 없었다.
- 어이구야. 이거 보통 들이킨 게 아닌데요? 무슨 술을 드래곤처럼 마시셨답니까. 아차, 원래 드래곤이셨지.
“드래곤처럼 마셨다는 말은 이만큼을 마시고도 멀쩡했을 때 나오는 거고. 이건 술이 엘프 잡아먹었다는 게 더 맞아.”
술 병의 잔해 사이사이를 건넌 룬이 란드가 널브러진 침대 앞에 섰다.
“란드. 일어나.”
흔들흔들
늘어진 란드는 푸훅, 하는 독한 술 냄새 섞인 날숨만 뱉곤 꼼짝 한 번 하질 않았다.
‘나도 술 꽤나 좋아하지만, 이렇게 마시는 건 아니지.’
고약한 술 냄새에 미간을 찌푸린 룬은, 다시 그의 어깨를 잡고 세게 흔들었다.
“일어나라니까, 란드.”
그 때, 란드가 꼼지락거리며 기척을 냈다.
어쩐지 물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란드가 중얼거렸다.
“…나도……데려가.”
“!?”
뻗어온 엘프의 팔이 룬을 끌어당겼다.
살기가 없었기 때문에, 미처 경계하지 못했던 룬은 졸지에 란드의 품에서 속으로 욕지기를 했다.
‘이 새끼가 뭐하는 짓이야?’
얼굴에 주먹을 날려도 할 말 없으리라 여긴 룬이 손에 힘을 주었다.
다음 말을 듣지만 않았어도 크리스티나와의 수련으로 다져진 강력한 어퍼컷이 란드의 턱에 박혔을 것이다.
“제, 나…….”
“?”
잔뜩 지치고 그리움에 사무치는 부름.
마음이 멍든 남자가 후회와 한탄 속에서 되뇌었다.
전생의 과업 탓인지, 룬은 그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포옹이 익숙할 정도로 가까이 알고 지낸 자가 있다기엔…… 이 녀석 천막에 있는 물건은 전부 1인 용이었어. 심지어 여성체의 이름 같은데.’
그리핀을 타고 날아올 때 본 사막에 다른 거주지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볼 만큼 친하게 지낸 자가 있다면 컵이라도 하나, 먹을 것이라도 제대로 된 것이 있어야 옳았다.
‘천막에 있던 식재료는 대부분 짐승들에게나 줄 만한 것뿐이었어. 테이머니까 퍼밀리어들을 위한 음식이었을 테지.’
그렇다고 란드의 퍼밀리어 이름이라 확신할 근거도 없었다.
룬은 우선 황금 팔찌를 손목에서 뺐다.
같은 남성형 엘프에게 포옹을 받는 건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내 제자들 같았으면 망설일 것 없이 얼굴부터 날렸을 텐데.’
본 모습으로 돌아가자, 해츨링의 신체로 바뀌며 인간형의 모습보다 조금 작아져 틈이 생겼다.
룬은 빠르게 빠져나가 비늘 돋은 팔을 문지르며 란드는 침대에 밀쳐넣었다.
“뀨으으.”
‘잠버릇 진짜 고약하네.’
본능적인 소름은 여전했지만, 룬은 꼬리 끝까지 몸을 부르르 털어내며 비늘이 돋는 기분을 애써 털어냈다.
‘대체 어떤 자이기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댈 정도…….’
문득, 머리에서 그냥 넘기지 못할 이름이 떠올랐다.
‘제나…… 설마 제뉴아르 밀레인가. 엘프 마을에 들어와서 과거의 향수가 자극되기라도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