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 공주의 이름. 제뉴아르 밀레.
란드가 한 때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던 여성.
딱 봐도 좁아 보이는 란드의 대인관계에서 그나마 이만큼의 친밀도를 가질 만한 자였다.
룬은 재차 방 안을 구르는 수십 병의 술병을 보고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뀨후으.”
‘미련한 놈. 나이 값 좀 해라.’
한숨을 쉰 룬은 술병들을 주워 적당히 한 쪽으로 치웠다.
발이라도 잘 못 디뎠다간 뒤로 자빠져 통수 깨질 것처럼, 불쌍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목소리가 영 신경 쓰였던 탓이었다.
엉겁결에 듀라한도 룬과 함께 병을 조신하게 한 곳에 모아주었다.
철컥거리는 갑옷소리와 인기척에, 란드가 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살짝 눈을 들었다.
그는 작고 까만 해츨링이 창문을 완전히 열어 환기를 시키고 술병을 주워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꿈?’
한심하다는 눈으로 술병을 보고는, 이내 구석에 밀어 넣는 모습이 무슨 집요정 같았다.
동시에, 그는 머리를 관통하는 두통에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윽!”
란드의 기척을 느낀 룬은 즉시 변신용 황금팔찌를 다시 꼈다.
“정신이 좀 들어? 란드.”
눈을 뜨자 보이는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소년.
란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모래처럼 까끌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지…… 드래곤이 나오는 길한 꿈이라도 꾼 것 같았는데.”
“그래? 여기도 용꿈은 길몽인 모양이지?”
“여기도……?”
룬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다 큰 드래곤이 술을 이렇게 마시고 뻗어.”
“……알 거 없어.”
겉만 어른이지, 속은 여전히 철부지 드래곤이었다.
하긴, 나이가 찼다 해서 모두가 그 나이에 맞게 살지는 못하는 법.
“이거라도 마시든가. 꿀물이야.”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회복수를 꺼내 컵에 따르고, 쪼갠 벌집꿀을 넣었다.
그리고 불의 힘으로 컵을 데웠다.
확인해 볼 게 생겼군
투명한 황금빛 꿀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회복수에 녹아들었다.
“자.”
“…….”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기분이었던 란드는 그 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꿀물이고 뭐고 자포자기와 자기 파괴적인 후회, 퍼밀리어들로 허전함을 채우는.
동물들의 온기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하루를 시작했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 꼬맹이에게서 그리운 드는 거지.’
미약했다.
하지만 분명, 어둠 속에 불과 물의 기운. 그리고 숲의 기운이 느껴졌다.
미미한 숲의 향은 오래전 그의 가족이었던 부모용과 아내를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이내, 모두를 잃어버렸다는 현실을 다시 깨닫는다.
욱씬.
그토록 죽여놨던 헐어버린 감정이 심장 박동에 맞춰 진동했다.
고통 속에서 나른하게 룬을 보던 란드는 생각했다.
누군가 음식을 챙겨주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미간을 구기려던 란드는, 손을 뻗어 꿀물이 담긴 따뜻한 나무컵을 들었다.
문득 크리스티나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건 그녀가 후견룡으로 지켜주고 있는 어린 블랙 일족의 해츨링이 회복 요리를 즐겨 만들고, 식사를 함께 하는 이야기였다.
한때 그에게도 있던 일상이었다.
눈앞의 검은 머리 소년은 팔짱을 끼고 얼른 마시라는 듯 란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륵.
꿀꺽, 꿀꺽.
“맛, 있네.”
긴 숨이 느리게 빠져나왔다.
바싹 말라있던 목이 축여지고 기분도 조금 편해졌다.
한편, 룬은 지치고 피폐한 란드가 의외로 순순히 꿀물을 받아마시자 다행이라 여겼다.
룬은 빈 컵을 받아들고, 그가 회복할 동안 잠시 기다렸다 물었다.
“좀 괜찮아?”
“……그래.”
란드는 한결 호흡이 편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룬이 말했다.
“많이 힘들면 아침은 굳이 안 먹어도 돼.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거라 가능하면 참석해 줬으면 했던 거니까.”
“중요한…… 이야기?”
아직 두통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란드가 바로 침대에 앉았다.
룬이 빈 병을 가지런히 정리한 듀라한을 돌아보았다.
“제드, 듀라한. 미안한데, 식사 조금 늦게 내려간다고 전해주라. 란드랑 이야기하고 내려갈게.”
- 옙! 그럼 내려가서 먼저 얼굴 좀 익히고 있겠습니다요. 가자고, 라한 씨!
철컥!
묵묵한 검은 투구를 끄덕이며 듀라한이 제드와 함께 방을 나섰다.
둘만 남게 되자, 룬이 간밤에 식수를 되찾아준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중간중간 미미하게 표정이 흔들리던 란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어둠 일족의 힘은 마족과 대항하기 가장 용이했었지. 하지만 설마 고작 해츨링이 타 속성의 인장을 다루고, 마기를 먹어치우는 어둠을 지녔다, 라.”
란드가 묘한 시선을 던져왔다.
어깨를 으쓱인 룬은 작은 의자를 가져와 앞에 앉았다.
“식수를 확보한 건 물의 보주 덕분에 가능했어. 내가 귀한 보물 모으는 취미가 있거든.”
만족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말에 란드가 희미하게 미소를 띄웠다.
“나와는 정 반대군.”
느른하게 말한 란드가 꿀물이 든 잔을 살짝 흔들었다.
하지만 룬은 고개를 조금 기울여보이며 의문을 입에 담았다.
“정말 그래?”
“이봐, 어둠 일족 꼬마.”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쓸며, 란드가 자조적으로 쓴 웃음을 흘렸다.
“크리스티나 님이 꽤 똑똑한 아이라 말씀 하실 정도라면, 내 꼴만 봐도 알만 하잖아. 뭘 가지기는커녕, 아무것도 아닌 지금의 나를 보라고.”
“제뉴아르 밀레.”
“!”
잔을 흔들던 손이 멈췄다.
란드의 눈이 딱딱하게 굳으며 룬을 바라보았다.
“엘프 공주님이라는 귀한 걸 가졌던 자가 그런 말을 하다니. 물론 사정이 달라진 건 이해해. 그렇지만 지금 모습이 본래 당신의 모습은 아니었을 거잖아.”
“철 없기는. 할 말 안 할 말 구분 정도는, 할 줄 알았건만.”
바싹 마른 잎 같은 녹안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이상 파고들지 말라, 고.
잠시 그를 물끄러미 보던 룬이 입을 열었다.
“너무 큰 걸 가졌다가, 잃어버렸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아서. 이제는 뭘 가질 엄두도 안나는 모양이고.”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란드의 말에, 룬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사실, 나 얼마 전에 내 권속인 제드의 죽음을 경험했어.”
“…….”
“그 녀석이 죽었을 당시에는, 내가 수면기여서. 나중에 무덤과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던 장소에만 들러 인사를 했지. 유언장이랑 내게 남긴 유품도…… 넘겨받았었고.”
란드의 눈이 흐려졌다.
실제로 경험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룬 역시 당시의 감상에 잠겨들었다.
“권속이었던 녀석이 세상에서 없어진 시간선에 내가 남아있는 기분은, 연결되었던 선이 끊어진 기분이었어. 그러니 가족이었던, 가장 사랑했던 이를 떠나보냈을 때. 당신이 어떠했을지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어.”
란드와 룬은 서로 침묵을 지켰다.
같은 침묵이지만, 서로 느끼는 감상은 달랐다.
먼저 입을 연 건 룬이었다.
“이 많은 술로도, 수많은 동물의 온기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사라져버렸잖아. 드래곤으로서의 삶보다 더 귀해서 택한 제뉴아르 밀레와의 삶. 그걸 잃었으니,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룬이 말하는 하나하나가 란드의 머리와 심장을 흔들었다.
애써, 과하게 마신 술 때문에 아파오는 것이라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란드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해하는 척하지 마라, 어린 해츨링이.”
“맞아, 난 어려. 그럼 란드. 어리면 소중한 존재를 잃었을 때, 마음이 덜 아파?”
그의 앞에 있는 까만 머리를 한 아이의 물음이 순수했다.
그리고 란드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다른 누군가가 애정하는 존재를 잃은 경험보다, 제 감정과 썩은 심장의 아픔이 더 귀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심지어 한참은 어린, 해츨링에게.
“미안하다. 술주정뱅이의 헛소리였어. 그건…… 사과할 테니.”
후둑.
고개 숙인 란드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나무 바닥을 두드렸다.
룬의 말이 옳았다. 어리다 하여, 강대한 성체 드래곤이라 하여 슬픔의 경중이 정해진 건 아니었다.
부끄러운 한편,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잠시만…….”
“…….”
어린 해츨링이 담담히, 떠난 이를 보낸 경험을 통해 조금은, 상상해 볼 수 있다는 그 말.
어른스러운 예의나 조언이 아닌 순수한 감상을 말 할 수 있는 아이의 위로였기에.
머리로는 이해하며 넘겼던 감정이 눈물이 되어 다시 흘러 넘쳤다.
룬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한 란드를 바라보다 어깨와 뒷목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한 참 뒤, 란드는 고개를 들었다.
룬은 품에서 크리스티나가 챙겨준 손수건을 건냈다.
“꼬맹이한테 못난 모습, 보였는데.”
손수건으로 눈가를 누르며 울음이 남은 란드가 힘이 빠진 듯 피식 웃었다.
룬이 대꾸했다.
“애도하는 일에 못난 모습이 어디있겠어.”
“……그런가.”
코가 먹먹한 목소리였다.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본 룬은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티슈를 잡아왔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법을 모르고 살았던 그에게 조금은 동정이 가기도 했다.
‘마음을 수습할 새도 없이 엘프들의 왕국에서 쫒겨났고, 드래곤으로서의 자격조차 잃고. 이런 저런 일들이 너무 한꺼번에 닥쳐서 무너졌다는 거군.’
룬은 란드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그려보았다.
수 많은 날들을 울고, 또 울어도 마르지 않는 눈물.
어느 순간 아파하는 것조차 지쳐 그만 두어버렸을 란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그가 떠올린 것은, 숲의 인장을 내어주면서까지 아내의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약속 하나였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룬은 뭔지모를 찜찜함을 느꼈다.
‘엘프 왕이 영 이상한 놈인데. 딸을 잃었다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까지 한 놈을 사막으로 쫒아내다니.’
혹시나, 엘프들이 마족화 되어가는 상황 탓에 그를 떨어뜨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란드가 이렇게 될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면 말이 달랐다.
적어도 란드의 상태를 살피는 조치하나 없이, 어떻게 살든 신경 끄겠다 잘라낸 처사가 영 마음에 걸렸다.
‘벨리아누스에게 확인해 볼 게 생겼군.’
란드의 시선 사각에서, 룬의 붉은 눈이 검게 가라앉았다.
진정한 란드는 스스로 손수건과 티슈로 얼굴을 수습했다.
룬이 얼음 몇 개를 만들어 주자, 란드가 받아들며 룬에게 실 없이 웃어보였다.
“마나를 다루는 감각이 좋은걸? 크리스티나 님의 가르침인가.”
“그럴지도 몰라. 어릴 때부터 배울 기회를 마련해 줬거든.”
‘전생 때부터 수련해 왔던 감각이라서 그렇지만.’
란드의 말에 맞장구 쳐주며 룬은 자연스럽게 주제를 옮겼다.
“크리스티나가 잘 챙겨줘. 그러고 보니 란드랑도 종종 만났다 그랬는데.”
“크리스티나 님 역시 날 다독여 주시긴 했지. 그러고 보니 왜 그랬을까. 크리스티나 님 앞에서는 이렇게 마음 놓고 울진 않았는데.”
‘울긴 울었구만.’
물론 이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분위기에 맞춰 고개만 조금 기울여 보이니, 란드가 나름대로 결론을 냈다.
“그 분에게서는 숲의 냄새까지는 나지 않아서인가.”
“숲의 냄새?”
“그래. 어둠의 일족일 네게서 왠지 숲의 향이 났거든.”
잠깐 생각해 본 룬은 한 가지 가설을 입에 올렸다.
“……리즈에가 줬던 약 때문일지도.”
당시 룬은 환약의 약효만 본 것이 아니었다.
만드라고라에 담긴 힘을 흡수하기 위해 약에 깃든 리즈에의 힘 역시 사용했다.
“글쎄…… 크리스티나 님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약효는 소화되면 그걸로 역할을 다하는 법. 그 안에 깃든 숲의 힘 역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어있어.”
‘내가 의식적으로 약의 힘을 쓰지 않았다면 그랬겠지만.’
하지만 당시의 룬은 겉보기엔 힘도 제대로 못 쓸 어린 해츨링이었다.
당연히 의식적으로 숲의 기운을 흡수해 가졌다는 말을 믿을 자는 없었다.
결국 룬이 차선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우연일지도 몰라.”
“운이 좋았다…… 라.”
“응. 살고 싶었으니까.”
문득, 란드 역시 룬에 대해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크리스티나는 꼼짝없이 죽었을 알에서 룬이 태어나 무척 놀랐다고 말 해주었다.
아무도 살아나리라 믿지 않았을 알에서, 어떻게 그리 작은 아이가 생명을 싹 틔웠을지 신비롭기까지 하다고.
‘생의 본능이 누구보다 강한 해츨링이었기 때문……인가.’
순수하게 원하는 것, 하나만을 품고 태어난 기적 같은 생명.
란드는 룬을 가만히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
룬과 란드가 식당으로 내려가보니, 분위기가 제법 좋았다.
- 그으래서! 룬 님이 저에게 신뢰감 넘치는 눈빛으로 말씀하신거죠! ‘나의 권속이 되어라, 제드. 너처럼 귀한 인재와 어찌 함께 하지 않을 수 있겠어?’ 라고 말이죠!
“호오. 참으로 대단하오. 드래곤이 드워프를 권속으로 받아들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