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후, 이 몸의 진가를 알아봐 주신 것도 룬 님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저를 잡는 수많은 장인들과 저를 흠모하던 마음 여린 여성들을 달래느라 힘들었지요!
우연히 대화를 들은 룬은 어이가 없어졌다.
‘저걸 믿는 거야?’
아무리 봐도 순도 높은 거짓부렁이 가득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녀석의 뻥은 점차 강도가 높아졌다.
효과적인 도구
“후웅. 제드 아저씨 그렇게 인기 많았어요?”
- 아이고 흑미 님. 말해 뭐합니까? 흑미 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제가 이래보여도 룬 님에게 여성의 마음에 대한 조언까지 해 드렸다구요.
“호오. 블랙 드래곤의 장로 후계가 여성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다는 거요?”
페르디키온은 아예 이 상황에 끼고 싶지 않은 듯 조용히 물만 마시고 있었고, 흑미는 가끔 의문을 던졌으나 설득당하는 중이었다.
‘제드 저 자식이 진짜.’
벨리아누스가 눈에 띄게 흥미로워 했고, 란드조차 묘한 눈으로 룬을 내려다보았다.
제드의 입부터 막아야 겠다는 생각에, 룬은 일부러 기척을 냈다.
“나 왔어.”
“앗! 룬 님이랑 란드 님이다!”
“삐이!”
철컥!
일행들은 하나같이 반갑게 란드와 룬을 반겼다.
좀 전의 자조적인 기운은 많이 사라진 란드는, 인사해오는 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특히 에고 웨폰인 파라리엄, 제드 쪽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았다.
룬은 어렴풋이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렇게라도 아내가 되살아올 수 없을까, 를 떠올리고 있으려나.’
아끼고 사랑했던 만큼, 그리운 순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늦어서 미안. 배고팠겠다.”
“히히. 괜찮아요. 제드 아저씨 이야기 들으면서 기다렸어요!”
룬의 말에 흑미가 밝게 대답했다.
상념이 깨진 란드가 룬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어서 오시오.”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벨리아누스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어조가 훨씬 정중하게 바뀐 것을 알아채고 룬이 지그시 바라보자, 엘프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한 태도를 취할 뿐이라오. 두 분께서 이룬 업적은 엘프 모두를 구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드워프가 상대를 얼마나 인정하는가를 기준으로 존중의 유무를 판단한다면, 엘프들은 얼마나 그들에게 은혜와 호감을 샀는가로 판단했다.
‘나름대로 인정했다는 거겠지.’
노렸던 것은 아니었지만, 은혜를 새겨두어 나쁠 것은 없었다.
이어, 벨리아누스는 간단한 축언 후, 기다렸던 그들을 위해 식사의 시작을 알렸다.
“귀한 분들을 모시게 됨에 감사드리며.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숲의 은혜가 머물기를.”
“잘 먹겠습니다!”
“삐약!”
달그락 거리는 식기 소리와 먹고 마시는 소리.
정갈했던 공간이 금세 소란스러워 졌다.
“그러고 보니 사실, 나 역시 엘프왕을 뵈러 가는 것이 무척 오랜만이라오.”
“얼마만인데?”
의문을 담긴 물음에 가늠하듯 잠시 뜸을 들였다.
“보자, 기간으로 치면 50년 정도인가…….”
“50년이나?”
엘프들이 장수하는 점과는 별개였다.
왕궁의 2인자라는 집정관이 왕을 이렇게 오래 못 봤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기에, 룬은 은근한 당혹스러움을 담아 되물었다.
“사실 전쟁 이후, 왕국을 회복시키는 데에 공을 들인 귀족 엘프들은 돌아가며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다오. 마족과의 싸움에서 고된 경험을 한 엘프들을 위한 처사이기도 했지.”
이어지는 말은 중년의 애환이 엿보였다.
“몸이 낡아 이제 나이가 들어 명예직으로 남겠다고 의사를 말씀드렸더니, 무기한 휴가가 내려졌었소. 집정관으로서의 권리를 회수하지 않을 테니 잘 쉬고 다시 돌아오란 이야기였을 테지만, 고향에 남은 전란의 상흔들을 치유하고 보니 시간이 이리 흘러버렸지 뭐요.”
인간들과 달리 엘프의 귀족들은 명예가 있을 뿐.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사욕을 채울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왕궁의 귀족 엘프라는 건 이러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고급 인력으로 휴가도, 휴식 보장도 없는 노예의 삶을 살다 탈출한 셈이었군.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일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었고.’
인간들처럼 100년도 못 사는 경우가 아닌, 천년도 넘게 사는 엘프.
단순히 환산해도 근 천년 가까이 근로자의 삶을 살았다는 뜻이었다.
페르디키온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군. 유능한 자가 중직을 맡아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자로 구성된다는 점은.”
룬은 동의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함께 떠올렸다.
‘엘프니까 가능한 이야기야. 심신이 갈려나가는 건 둘째 치고, 실익에 눈 먼 녀석이 생기면 유지하기 힘들걸. 명예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놈들이 하나만 있어도 물은 흐려지게 되니까.’
괜히 엘프를 두고 고고한 종족이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답답한 구석도 있지만, 동시에 엘프라는 종족에 대해 색다른 감상이 들게 했다.
‘이걸 청렴하다 해야 하나? 그러니까 재물이나 상권에 대한 욕심 없이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게 가능했던 거겠지.’
청렴결백하지만 까다롭고 융통성 없는 종족으로도 유명한 자들다웠다.
드워프들 역시 한 고집했지만, 이건 고집의 종류가 달랐다.
벨리아누스가 허허 웃곤 말을 이었다.
“한데 고향으로 내려와 쉬는 동안, 갑자기 마기에 의한 피해가 발생한 거요. 가장 먼저 돌림병이 시작됐지. 나는 즉시 왕궁으로 연락 가능한 수정구를 이용해 귀환을 알리려 했지만…… 왕은 내게 복귀를 허락지 않았소.”
“왜? 긴급상황이었을 텐데.”
“다른 유능한 엘프들이 있고 숲의 인장으로 보호받는 왕궁은 괜찮다시며, 대신 지원이 어려운 내 고향을 위해 애쓰라는 전언이 돌아왔었다오. 게다가 이곳은 엘프들의 가장 큰 식수공급처가 있는 곳. 이곳이 막히면 엘프들의 물과 식량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소.”
맞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 덕분에 50년에 가까운 시간을 버틴 것일 터.
페르디키온은 어느 새 팔짱을 끼고 검지로 팔을 느리게 툭툭 건드리며 주의 깊게 들었다.
“하여, 왕의 전언을 받고 식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소만…… 내 아들이 저수지의 식수가 마기에 오염되는 걸 끝까지 막다가 병에 걸리고 말았지. 나의 부탁 때문에.”
침통한 목소리였지만, 아들이 회복되어 가고 있기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안도가 섞여있었다.
마른 숨소리를 길게 흘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마터면, 나는 그 일을 두고 평생 후회할 뻔했소. 드래곤 족의 호의는 평생 잊지 못할 거요.”
“안다면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해라. 그런 행운은 두 번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페르디키온이 대답했고, 룬은 치즈를 곁들인 빵을 한 입에 삼켰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수정구로 왕궁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간밤에 저수지에서 식수를 확보한 이야기도 이미 전했어?”
“그 점이 조금 이상하긴 했소만…… 오늘 아침에 수정구를 작동했으나, 연락이 닿질 않았다오. 이런 일이 없었건만…… 불길한 느낌이 드는구료.”
페르디키온과 룬이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같은 생각이냐?]
[응. 형님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건 란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룬이 물었다.
“……전령이 오기로 한 때는?”
“점심 무렵이라 들었소.”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란드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흘렸다.
“확인하고 가면 되겠군. 어차피, 준비를 할 시간이……필요하니까. 그렇지, 꼬마들?”
란드의 녹안이 룬을 향했다.
고개를 끄덕인 룬이 입을 열었다.
“전령이 점심때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바로 왕궁으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전령이 도착하지 않는다니, 무슨 의미요?”
벨리아누스의 되물음에 이미 생각을 마친 룬이 대답했다.
“마족을 직접 상대했던 자가 일러준 적이 있거든. 마족은 부정적이고 혼을 타락시키는 것들이 많을수록 힘이 강해진다 해. 두려워할수록, 우울할수록, 좌절하게 될수록 마족의 힘은 증폭되지. 모든 마법 중 가장 효과적이지만, 가장 기괴한 방식을 쓰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마족의 흑마법이 관련되어 있어.”
란드가 온기 없는 눈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서 마족들이 즐겨 쓰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전염병.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솟아나는 절망. 누군가 병을 옮겼을 때 일어나는 비난. 불치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의 비탄. 가장 부정적인 감정을 죽어가는 순간까지 꺼내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지.”
과거 마족을 직접 상대한 전적이 있던 란드의 말은, 실제로 그 광경을 눈 앞에서 보는 듯 생생했다.
“마족화가 된 자는 부정한 감정을 모두 제 힘으로 바꾸어 강력한 마족으로 탄생하게 돼. 세계수로부터 시작된 마기라면, 당연히 신목과 가까운 곳부터 영향을 끼치며 여기까지 도달했을…… 터이니.”
느슨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란드가 고개를 기울이며 손 끝을 테이블 위에 톡톡 두드렸다.
“세계수와 영향을 깊이 주고받는 숲의 인장 때문에, 엘프왕은 세계수를 오염시킨 마기에 누구보다 오래, 가장 깊게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뭐, 뭐라고.”
벨리아누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엘프들이 마족들에게 희생되긴 했으나, 그 방식은 실체를 앞에 둔 전투.
즉 전면전에 가까웠기에 이런 경우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럼…… 엘프왕은 왕궁 한가운데에서 마족화가 될 수도 있다는 소리요?”
“각오는 해 두는 게 나을 거다.”
페르디키온의 말은 확신에 가까웠다.
“그,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엘프왕이 오염되면 엘프들 역시 위험하오!”
“무조건 급하게 간다고 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 엘프에 너도 포함되잖아? 벨리아누스.”
룬과 시선이 마주친 벨리아누스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멈췄다.
본래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명예를 지키려했을 그가, 룬의 시선이 닿자 주장을 더 내세우지 못했다.
“목숨을 소중히 해, 벨리아누스. 안가겠다는 게 아니야. 전령이 오기로 한 시간까지만 기다리자. 우리도 대비책 마련과 아뮬렛을 만들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룬의 말에, 엉거주춤하게 섰던 벨리아누스가 자리에 털썩 앉고 말았다.
이후 식사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묵묵하게 각자 생각을 정리하며 마무리되었다.
***
“우웅. 흑미가 여기서 뭘 하면 돼요?”
란드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룬이 간밤에 정화해 둔 저수지에 도착했다.
팔목에 룬이 만들어준 흑진주 팔찌와 백진주 팔찌를 각각 착용한 흑미가 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페르디키온은 미간을 잔뜩 구기며 팔짱을 끼고 있었고, 듀라한 역시 룬에게 진주 목걸이를 받았다.
‘뭔가 묵주처럼 되어버리긴 했는데, 할 수 없지.’
그나마 흑미는 여성의 액세서리다운 디자인의 진주 팔찌였다.
하지만 듀라한은 목걸이가 길고 주렁주렁하여 두 번이나 감았더니, 영락없이 묵주 목걸이였다.
스님 옷 걸치고 다녀도 어울릴 법한 모습이 보기 묘했으나, 다시 고쳐주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 마족의 힘을 흡수하는 법을 가르쳐 줄 거야. 크게 어렵진 않을 테니까 잘 보고 따라해 봐.”
“앗, 이게 혹시 두 번째 부탁이에요?”
“응.”
룬의 대답에 헤헷, 하고 웃은 흑미가 작은 양 손을 꼬옥 말아쥐었다.
“좋아요! 흑미 힘내서 열씨미 할게요!”
“삐약!”
철컹!
듀라한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고, 보호를 위해 흑미의 머리 위에 올라간 하얀 새가 함께 울었다.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자, 봐봐.”
룬이 검은 진주를 손에 쥐고 저수지 가까이 다가갔다.
무심코 던진 돌
댐 위에서 바로 물에 들어갔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수풀과 뭍이 있는 곳이었다.
흑미와 듀라한이 뒤에서 룬을 빤히 지켜보았다.
“대충 이런 느낌이야.”
진주를 들지 않은 다른 손에서 흉흉하고 불길한 기운이 작게 번져나왔다.
어제 룬이 흡수했던 마기의 일부였다.
룬이 가진 어둠에 뒤섞여 순수한 마기보다는 약했지만,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불쾌한 느낌이 들게 했다.
“으. 이거 하나도 안 예뻐요.”
“삐이이.”
흑미가 근처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가져와 쿡쿡 찌르자, 룬이 흑미의 손을 잡아 당겼다.
파삭!
“앗?”
찔렀던 나뭇가지 끄트머리가 말라비틀어졌다.
놀란 흑미와 듀라한이 시선을 룬에게 향했다.
“산 것의 생기를 빨아먹는 성질을 가져서 그래. 어제 내가 손을 좀 봐서, 물 안에 있는 건 이만큼의 힘은 없을 거야.”
“이런 걸 혼자서 다 했어요?”
흑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끄떡없어. 이걸 봐.”
룬이 흑진주를 들고 안에 깃든 어두운 힘을 깨웠다.
이어 부르르 떨던 마기가, 가까이 있는 흑진주 안으로 쏙 빨려들어갔다.
“이렇게, 어둠을 가진 진주를 사용해서 마기를 삼키는 거야.”
“호오오!”
함께 지켜보고 있던 제드도 말을 얹었다.
- 이거이거, 드디어 저도 실전을 해보나 싶었는데! 보기만 해야 하니 아쉽네요. 혹시 저는 할 게 없습니까? 제가 살아있을 적에 마족의 방식에 대한 연구라면 꽤 해 뒀었는데요.
“가능하면 넌 듀라한을 보조하는 정도로만 도와줘. 네 혼은 날것의 마족의 기운을 마주치기엔 너무 약해.”
- 에이잉. 이번에도요? 뭐 예상은 좀 했습니다만.
제드야 아쉬워했지만, 안 그래도 몸이 무기로 바뀐 뒤 망각의 부작용이 온 참.
함부로 마기에 닿았다가 흑화라도 하면 답이 없었다.
“널 두 번 잃어버리는 건 사양이라서.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