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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242)

- 어……. 룬 님께서 그렇게 까지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요. 이거 참! 걱정해 주시는 건 기분 좋은데 미안해하실 것 까지는 없지요.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제게 시간이야 이제 넉넉합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룬 님.

유쾌하게 말 했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닐 터였다.

나이가 들며 속이 더 깊어진 건지, 제드의 말에서 묘한 배려를 느낀 룬이 피식 웃었다.

“그래. 대신 쓸 만한 방법은 알려줄게.”

- 아니, 룬 님! 그런 방법이 있으면 진작 말씀을 해 주셔야죠! 이거 들었다 놨다를 너무 잘 하시네!

“불만이라도?”

-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급격하게 정중해진 제드를 물끄러미 본 룬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진주들이 달린 백야의 깃을 꺼냈다.

란드가 손수 엮어준 장식이었는데, 손재주가 꽤 좋아 파라리엄의 외형과 잘 어울리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자. 불의 힘이 깃든 불사조의 깃이랑 진주야. 이걸 사용하면 마기에 대항할 수 있어.”

-오오!

룬의 권속이 되어 지니게 된 어둠속성의 흑진주.

그리고 제드의 혼이 담긴 진주와 같은 속성의 백진주.

그리고 강한 생명과 불의 힘을 지닌 불사조의 깃.

셋 모두 불과 친한 드워프의 혼, 제드가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물건들이었다.

“수호와 공격계 특화라서, 몸을 보호하기엔 충분할 거야. 세계수의 가지를 얻어 돌아가게 되면 힘을 다룰 다른 방법들도 알려줄게.”

- 물론이죠! 그건 꽤 기대하고 있다구요?

파라리엄에 진주 깃 장식을 달아주자, 듀라한이 파라리엄을 어깨에 척 메었다.

철그럭!

위풍당당한 모습을 한 검은 기사가 룬의 지시를 기다렸다.

“저수지에 약하게 잔존해 있는 마기들을 흡수해. 그리고 너희 안에 깃든 어둠 속에 융화 시키는 연습을 충분히 해 봐. 혹시 기분이 불쾌해지면 즉시 하얀 진주를 사용하고.”

“네! 라한아, 가자아!”

“삐이약!”

철컥!

물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숨 쉴 수 있는 등. 부가 마법을 받은 듀라한과 흑미가 저수지 안으로 시원하게 뛰어들었다.

풍덩!

퐁당!

거대한 바위 떨어지는 소리와, 작은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잠수해 들어간 듀라한과 흑미.

투명한 물 안에서, 둘은 룬이 시범을 보였던 대로 마기를 조금씩 찾아 흡수했다.

순조롭게 해내는 둘을 지켜보며 페르디키온이 칭찬했다.

“설마, 태생이 마족이었던 녀석들을 이렇게 활약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잘도 생각해냈군, 룬.”

“운이 좋았지. 이제 형이 마음만 굳히면 돼.”

“……한다고 했잖나.”

대답은 영 탐탁치 않아보였으나, 룬은 각오를 굳힌 그를 격려했다.

“형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잘 부탁해. 형.”

“하-.”

드물게 한숨을 내쉰 페르디키온이 맑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였다.

<이렇게 하는 건가?>

“왔다.”

란드에게 빌려 준 모코지석에서 연락이 왔다.

<맞아. 어떻게 됐어?>

<전령은 오지 않았어. 예상대로 중간에 병에 걸렸거나, 최악의 경우 마족화가 되었을지도.>

“서둘러야겠네.”

“그렇겠군.”

함께 내용을 확인한 페르디키온의 대답을 듣고, 룬이 모코지석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벨리아누스 쪽은 어떻게 되었어?>

<잘 되고 있어. 꼬마의 말 대로 엘프들도 광장에 모이도록 지시해 두었다던데. 두어 시간이면 마을 내의 엘프는 모두 모일 거라더군.>

<알겠어. 란드도 준비 잘 부탁해.>

<나름대로 즐겁더군. 기대해.>

란드의 답문을 본 페르디키온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룬은 저수지 안을 돌아다니는 듀라한과 흑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듀라한과 흑미의 성과는 제법 좋았다.

“파하!”

저수지 안에 있는 마기를 꼼꼼하게 챙겨 흡수한 듀라한과 흑미가 물 밖으로 헤엄쳐 나왔다.

나오자마자 몸을 말리는 마법을 사용할 새도 없이, 귀와 꼬리털을 푸다다닥 털어낸 흑미가 히죽 웃어보였다.

“안에 마기 하나도 안보이게 다 잡았어요! 흑미 잘 했어요?”

“응. 잘했어.”

룬은 물에서 나온 흑미와 듀라한이 몸을 말리며 대답해주었다.

폼만 보면 실컷 수영하고 나온 아이 같았다.

칭찬을 들은 흑미가 눈을 반짝이며 양 손을 작게 만들어보였다.

“막막, 요만한 까만 알갱이들이 돌아다니는데요. 손으로 얍! 하고 쥐었더니 뿅! 하고 사라졌어요! 그런데 몸 안에 쏙! 들어오더니 힘이 더 나서 재밌었어요!”

철컥!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친 듀라한과 흑미는, 마기를 흡수하는 일에 재미가 붙은 모양이었다.

‘물에서 놀기 좋은 날씨기는 하네.’

벌써 정오가 넘은 때.

뜨거운 해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슬슬 벨리아누스에게 부탁해 뒀던, 마을 엘프들을 한 장소에 모아달라는 일도 충분히 진행됐을 시간이었다.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 그럼 이제 세 번째 부탁을 해보려는데.”

“뭔데요?”

또 어떤 재미있는 일일까, 기대하는 순수한 눈이 룬을 바라보았다.

룬은 그대로 시선을 페르디키온에게 돌렸다.

미간을 계속 구기고 있던 화룡족 꼬마가 말을 뱉었다.

“내가 엘프 녀석들을 재울거다. 그러면, 잠든 녀석들 안에 깃든 마기를 흡수하면 된다.”

“재워요? 페르디키온 님이요?”

“그래.”

불퉁한 말투는 ‘영원히 재워주지.’ 같은 느낌이었지만, 말 그대로 정말로 재우겠다는 말이었다.

갸웃 하는 얼굴로 ‘낮잠 시간이에요?’라고 묻는 흑미에게 룬이 설명을 보탰다.

“형은 내가 아는 자들 중 노래를 제일 잘 하거든. 어찌나 잘 하는지 자장가를 부르면 사나운 몬스터들도 잠들 정도야.”

“진짜요?”

무려 해츨링을 잠들게 만든 힘.

저항력 약해진 엘프가 몇이든 효과는 확실히 보장 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흑미는 페르디키온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지.’

노래하겠다는 페르디키온을 신기한 눈으로 보는 흑미는 벌써 호기심 가득해보였다.

모코지석을 확인한 룬이 페르디키온에게 알렸다.

“형, 벨리아누스가 마을 주민들을 한 장소에 모았대.”

“후우-.”

“눈 딱 감고 한번만 불러 줘. 잘 되면 아무 피해 없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잖아?”

“…….”

막상 엘프 군중들 앞에서 노래 불러야 하는 현실을 실감하게 되자, 페르디키온이 이를 꽉 물었다.

얼굴만 보면 불편한 술자리에 내키지 않게 떠밀려가는 사람 같았다.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룬은 슬슬 페르디키온을 다독였다.

“어차피 가면에 마스크까지 쓰고 나올 거잖아. 순식간에 잠이 들어버리면 형인지도 잘 모를 거야.”

“급조해서 만든 가면따위. 믿을 수 없다.”

‘까다로운 녀석. 이해는 된다만.’

시중에 파는 가면을 사면 소문이 날 거라는 페르디키온의 반박에, 손재주 좋은 란드가 나무를 깎아 가면을 만들어 주기로 했었다.

아마도 지금쯤 저택에서는 한창 페르디키온이 쓸 가면을 제작 중일 터였다.

시간이 촉박한 탓에,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못한 페르디키온은 결국 란드에게 맡겨야 했다.

그나마도 파라리엄에 잘 어울리는 진주 장식을 순식간에 만들어준 실력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승낙 한 참이었다.

“어차피 형은 엘프족이 아니라서, 찾으려 해도 못 찾을거야. 어쩌면 형과 비슷한 빨간 머리 엘프라고 소문 날수도 있고. 목소리만으로 형을 어떻게 찾겠어?”

한참 뒤, 페르디키온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이 따위 걸 나보고 쓰라고?”

저택에 돌아온 페르디키온은 가면을 보자마자 패대기치고 싶은 얼굴로 외쳤다.

그의 손에는 빨간 토끼 가면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뻐근한 어깨를 풀던 란드는 여전히 느슨한 얼굴로 대꾸했다.

“귀엽지 않니, 불의 꼬마야?”

“이게 뭐가 귀엽습니까!”

‘귀엽긴 귀여운데.’

그러나 페르디키온은 악마의 가면이라도 쥔 양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에, 란드는 고개를 스르륵 기울여 보이며 의뭉스럽게 말할 뿐이었다.

“아무도 네가 불의 일족 장로임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맡긴 일로 아는데……. 아닌가?”

“…….”

가면은 부정할 여지 없이 귀여웠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평소 페르디키온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귀여운 빨간 토끼가면 이었다.

“이…… 따위 토끼를.”

불의 기운이 깃든 살벌한 붉은 눈.

그야말로 살기가 엿보였다.

페르디키온은 가면을 진짜로 부숴버릴 듯 힘주어 쥐기 시작했다.

진짜로 금이 가기 전, 룬이 영혼 없는 목소리와 흐린 눈을 하고 말했다.

“왜, 형. 잘 어울리는데. 와아. 진짜, 아무도 형인 줄 모를 만큼 귀엽…… 아니, 괜찮네.”

“ ! 그래. 그럼 룬, 네가 가면을 끼고 서라! 노래는 뒤에서 내가 부를 테니!”

“그건 안 되겠고.”

정색을 한 룬이 즉시 발을 뺐다.

페르디키온은 드물게 분노한 눈으로 룬을 보았지만, 그쯤이야 외면하면 될 일.

‘전에 흑미 앞에서 같이 본체화 하다가 혼자 도망간 업보…… 같은 거 아닐까.’

가면에 열을 내는 페르디키온이 안쓰러웠는지, 흑미가 나름대로 페르디키온을 응원했다.

“흑미도 토끼 좋아해요, 페르디키온 님!”

“!”

안타깝게도 작은 여우 수인의 응원은 페르디키온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이게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죽는 꼴인가?’

무려 불의 지배자로서 고귀하게 자라왔던 녀석에게 이는 분명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전설의 최강 토끼

심지어 란드는 한 술 더 떠서, 이번엔 적당한 그립감이 있는 마도구까지 꺼내주었다.

“자.”

“…….”

귀여운 당근 모양 장식을 덮은 음성 증폭 마도구.

페르디키온은 당근 모양의 음성 마도구를 씹어버릴 듯 입가를 실룩였다.

용맹한 화룡족의 패기가 엿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이내, 란드의 녹안을 노려보았다.

“혼자는 못 올라간다. 정 안되겠으면 네 녀석의 동물들이라도 올려 보내서 신경을 분산시키던가!”

“생각보다 수줍음 많은 꼬마였나.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 도와주지.”

수락한 란드가 룬을 바라보았다.

“퍼밀리어들을 데려와야 하니 잠시 밖에 다녀와야겠다.”

“그렇게 해.”

고개를 까닥인 란드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를 본 페르디키온이 중얼거렸다.

“뭔가 찜찜하군.”

“음…….”

페르디키온의 곁에서 턱을 문지른 룬은 그 찜찜함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원하는 게 신경 분산이라면, 좀 힘들 수도 있지 않을까.’

페르디키온은 무대에 여럿이 서 있다면 봐야할 것이 많아지니 시선이 분산되리라 여겼다.

하지만 화룡족 장로 후계가 활약할 곳은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무대.

노래하는 명창과 그 보조자로 역할이 나뉘는 게 일반적이었다.

‘보통은…… 보조자는, 가수의 소리에 더 집중하도록 만들어 주니까.’

전생에 사당패 구경을 하곤 했던 룬은 그 사실을 떠올리며 슬쩍 란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역시나, 란드는 웃음기가 은은하게 남은 얼굴을 하고 제 입가에 검지를 올렸다.

입모양이 움직였다.

‘쉿.’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떴다.

‘……란드도 알고 있는 모양인데.’

차라리 흑미가 함께 무대에 오른다면 원하는 효과를 봤을 터.

하지만, 작은 여우수인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준비는 잘되셨소? 거동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모아 두었다오.”

마침 엘프들을 광장에 인솔해 온 벨리아누스가 시간이 되었다며 들어왔다.

결국, 찜찜해하면서도 페르디키온은 고양이 가면을 쥐고 무대 위에 오를 준비를 했다.

그 사이 룬은 시선을 돌렸다.

‘이 틈에 내가 할 일을 해야지.’

“백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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