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야?”
갸웃
흑미를 따라가려던 백야가 룬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손짓하자 능숙하게 날개를 펴 날아온 새가 룬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털 관리 좀 하자.”
“삐이약!”
태어났을 때 한번 털갈이를 한 뒤, 풍성하고 더 좋아진 깃.
룬은 털을 긁어줄 때마다 이젠 시원한 표정을 짓는 새의 협조로 불사조의 깃털을 잔뜩 수확했다.
이어 진주를 가루내고 백야의 눈물을 질 좋은 회복수에 희석시키자 괜찮은 치유제가 완성되었다.
룬은 이것을 병에 잔뜩 소분하여 아공간 주머니에 담아두었다.
포션 안에는 불사조의 깃을 하나씩 넣어두어서, 부정한 것을 태우는 효과까지 상승시켰다.
그리고.
“챙겨두길 잘했지.”
룬은 아무도 모르게 란드의 방에서 챙긴 포도주병을 꺼내며 눈을 반짝였다.
***
넓은 광장.
엘프들은 고통에 신음하며 모여 있었다.
대부분 눈을 마주치지 않거나, 때때로 옆에 있는 자들을 불신하는 눈으로 힐끔거렸다.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은 속삭이듯 조용히 웅얼거렸다.
“당신도 벨리아누스 님의 전언을 듣고 왔어?”
“그래. 오면 아픈 걸 가라앉혀 준다기에…….”
“저도 치료에 도움이 될 거란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사실을 아시는 분 있나요?”
“콜록! 힘들어. 치료가 되는 병이라면, 더 빨리 일러주시지.”
“혜택을 받으려면 꼭 당사자가 와야만 한다니. 상황도 안 좋은데 너무하신 처사 아닌가.”
“뭐든 좋아. 이 병든 몸이 나을 수만 있다면…….”
활기차게 다니던 사슴 같은 다리는 붓거나 흉하게 두드러기가 돋아있었다.
그 모습을 감추고자 제대로 빨지도 못한 더러운 로브나 천으로 흉측해진 모습을 가린 자들.
짜증과 불만스러운 기색을 비치기는 했으나, 그들 대부분은 얌전히 벨리아누스를 기다렸다.
종탑 위에서, 붉은 토끼 가면을 쓴 소년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리아누스에 대한 신뢰와 그들의 간절함, 무기력이 뒤섞인 광경.
그들에게 뭔가 해주리라는 믿음은 몰린 엘프들이 매달릴 마지막 동아줄 이었다.
“란드 자식, 여기서 기다리라더니 어쩌잔 건지.”
휘익!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이 바뀐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독수리가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가면을 쓴 페르디키온이 즉시 손을 내밀자, 독수리는 바로 앞에서 선회했다.
독수리의 의도를 눈치 챈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와라.”
위용 넘치는 날개짓이 몇 차례 이어지고, 굵은 다리가 페르디키온의 앞을 스쳤다.
다음 순간, 페르디키온은 종탑에서 사라졌다.
휘이잉!
페르디키온을 다리에 달고 독수리가 공중을 느리게 돌더니, 서서히 무대 단상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머리위에 큰 그림자가 졌다.
그들이 웅성이며 고개를 들려는 순간.
파닥파닥
파다다닥
새들의 날개짓 소리가 무수히 들렸다.
일렬로 날아든 작은 새들은 단상 앞쪽에 열을 지어 앉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엘프들은 같은 동작으로 맞춰 선 새들에게 시선이 끌렸다.
“웬…… 새?”
“어떻게 된 거야?”
작은 소란이 번졌다.
그들의 웅성거림에 아랑곳 않고 몸집이 비슷한 새들끼리 3열로 줄을 맞췄다.
가장 작은 몸집이 앞 1열, 중간 몸집 새들이 2열, 덩치 큰 몸집의 새가 3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몸집의 독수리가 페르디키온을 무대 위로 떨어뜨렸다.
“토끼 가면?”
페르디키온은 가면이 붉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으니까.
삐로로로 삐로로로
삐로~ 삐로~
구구구 구구구구
새들의 화음이 시작됐다.
1열은 소프라노, 2열은 메조, 3열은 알토.
심지어 그 안에서도, 음정과 박자가 나뉘었다.
그리고 단상위로 고양이와 얼룩 강아지가 올라왔다.
냐옹~ 냐옹~
우우- 우우우-
노래 전주를 완벽하게 구현한 동물들의 합창을 들으며, 페르디키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당근 모양 확성 마도구를 들고 가면 너머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놀란 눈, 지친 눈, 구원을 바라는 죽은 눈.
그들을 본 페르디키온은 당근 모양 마도구를 꽉 쥐었다.
“그대, 오늘 하루도 고되고 지쳤던가요.
이 마른 사막보다 더, 메마른 눈물은
내 심장을 옥죄는 시간들로 인해 이제 더 나오지 않나요.”
노래가 흘러나왔다.
특별한 ‘언령’들의 나열에 페르디키온은 어느 새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라앉아, 녹아들어가. 탁한 마음 안으로 스미는 덧없는 단어들.
밝아오지 않는 낮과 밤.
나를 위한 별 하나 없어서 차라리 다행인 그런 날.
못난 모습과, 마음을 들키지 않아도 괜찮아요.
꿈을 꾸라는 말도, 희망을 가지라는 말도 내겐 너무 힘이 드니까.”
엘프들은 노래 속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사막 두더지가 머리를 하나씩 내밀더니 길이가 다른 금속판이 달린 실로폰을 두드렸다.
퐁퐁
퐁퐁퐁
물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구슬펐던 도입부는 중반부로 접어들어 조금씩 부드러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난 눈을 감아요. 이슬비 내리는 숲길을 걸었던 나날과
나를 바라보던 아름다운 당신의 미소가 떠오를 테니.”
가벼운 탄식과 함께 엘프들은 병으로 짓무른 얼굴이 드러나는 것도 모른 채 멍하니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빗소리처럼 들리는 실로폰 소리.
율동처럼 움직이며 작은 북을 두드리는 저빌몬들.
냐옹 소리를 내던 고양이가 나무를 긁으며 사악 사악 박자를 넣었다.
거기에 사막여우가 모래주머니를 챡, 챡 흔들며 음악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아요. 꿈을 꾸어요. 자유롭게 풀잎 밟으며
하늘을 날던 그 때의- 행복한 당신으로 돌아갈 테니.”
고음이 끝나고, 서서히 반주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잠 들어도 괜찮아요. 눈을 뜨면, 행복하고픈 그대를 위한 세상이 보일 테니.”
마지막 노래 가락은 무반주로 흘러나왔다.
함께 연주하던 동물들이 모두 잠에 든 탓이었다.
“그댈 축복할, 세상이.”
엘프들도 자리에서 기절하듯 잠들어갔다.
이윽고 노래가 끝났을 때, 광장에는 깊게 잠든 숨소리만 가득했다.
그제야 한 쪽에서 얼굴을 내민 룬, 흑미, 듀라한이 페르디키온을 향해 엄지를 치켜올렸다.
흑미는 입 모양으로 ‘시작할게요!’ 라고 전하고는 엘프들의 몸에 박힌 마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듀라한도 갑옷 부딪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도록 움직이며 조심조심 작업했다.
일은 순조로웠다.
흡수하는 작업을 지켜보던 룬이 페르디키온 쪽으로 다가갔다.
“귀를 막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냥 듣고 싶을 정도로 멋지더라. 고생했어, 형.”
“흥. 필요한 일이니까 한 거다.”
토끼 가면을 끈 페르디키온의 얼굴은 가려져있었지만, 귀 끝이 붉어져있는 게 보였다.
룬이 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분 좋아 보이네.”
“…….”
토끼 가면을 쓴 페르디키온이 별다른 대꾸 없이 잠든 엘프들을 쭉 훑어보았다.
고통에 신음하며 악몽을 꾸던 그들.
지금은 페르디키온의 언령이 담긴 노래를 듣고 편안한 숙면에 잠겨있었다.
페르디키온은 팔짱을 척 하고 꼈다.
“저들의 얼굴을 보니, 조금은 전력을 다하고 싶었을 뿐이다. 타 민족의 일이라 하나 저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평범한 거주민에 불과하지 않나.”
“그런 말도 하는 거야? 진짜 멋있어졌네, 형.”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룬의 목소리를 듣고 페르디키온이 잠시 룬을 바라보았다.
비록 우스꽝스러운 토끼 가면을 쓰고 무대위에 혼자 서게 만든 치사한 녀석이었지만, 진심으로 존경해주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언젠 아니었다는 듯 말하는군. 뭐, 썩 괜찮은 경험이긴 했다.”
토끼 가면과 당근 확성 마도구를 든 채 무대에서 내려온 페르디키온.
귀여운 동물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자세나 행동에서 지배자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왔다.
그는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서서 고갯짓을 했다.
“저들이 깨기 전에 왕성으로 가도록 하자. 란드와 벨리아누스는 어디에 있지?”
“아, 실수로 귀를 막지 않아 벨리아누스가 살짝 졸았다더라고. 란드가 데리고 마차로 가고 있대.”
“알겠다.”
“응. 이제 무대에 이것만 두고 가자.”
흑미와 듀라한은 마기를 흡수하고, 엘프들의 곁에 룬이 만든 포션병을 하나씩 남기고 있었다.
마기는 제거했으나 엘프들의 병을 치유한 건 아니었기에 룬이 만든 치료약이었다.
이는 광장에 미처 오지 못한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정말 이거면 되는 거냐?”
마지막으로 페르디키온은 서 있던 무대에 룬이 만든 포션 사용법과 사용처 등.
필요한 정보를 적어둔 나무판을 남겼다.
판 위에는 페르디키온이 쓴 당근 모양의 확성 마도구를 올려두었다.
“충분해.”
이무기 시절에도, 위기에 처한 자들이 기적을 기대할 때가 있었다.
우연히든 아니든. 가장 간절한 순간 기적을 경험한 자들의 반응을 떠올린 룬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숙면에서 깬 이들은 페르디키온 덕분에 몸이 나았다고, 기적이 일어났다 여길 테니까.’
무대 위에 남은 것들은 그들이 겪은 기적의 증거이기도 했다.
배려도 때를 맞춰야
룬은 내기할 수도 있었다.
엘프들은 분명, 오늘 들은 페르디키온의 노래를 잊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거기에 이 당근 마도구와 치료약, 당부가 담긴 설명서를 무대에서 발견하면 페르디키온이 남겼을 거라고 여기게 될 거야. 그걸 어떤 녀석이 무시하겠어.’
실제로 이 예상은 맞아 들어갔다.
엘프들은 설명서를 숙지하고, 당부대로 자리에 오지 못한 엘프들에게 약을 나눠주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겪고, 목도한 노래와 기적을 신나게 떠들었다.
좀 더 먼 미래에는 ‘전설의 최강 토끼’ 라는 음유시인의 노래가 탄생하고 엘프를 통해 대륙에 ‘행운의 토끼’가 유행하게 된다.
이야기에는 살이 붙어, 엘프들의 구전을 통해 화자 될 터였다.
아직 이를 모르는 페르디키온은 어렴풋이 예감 하는 룬에게 일렀다.
“무대 위의 동물들이 깨려하고 있다. 엘프들까지 깨어나기 전에 슬슬 이동하지.”
“좋아. 너희들도 다 됐지?”
룬이 돌아보자 흑미가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V를 만들어보였다.
그간 제대로 잠에 든 날이 거의 없었던 엘프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의 성마른 재촉을 받으며 일행은 벨리아누스의 저택으로 이동했다.
미리 이야기 된 저택 뒤에 도착하자 란드가 서 있었다.
“내 퍼밀리어들을 통해 상황은 쭉…… 보고 있었어. 이쪽으로.”
어떤 상황일지 따로 설명할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룬이 즉시 란드의 뒤를 따랐다.
페르디키온은 잠시 란드는 노려보았지만, 이내 걸음을 마저 옮겼다.
이내 마중나온 벨리아누스와 멀리 마차가 보였다.
룬과 눈이 마주친 벨리아누스가 물었다.
“모여 있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소?”
“의논했던 대로 잘 진행됐어. 몸에 침식되었던 마기는 제거했고, 남아있는 병은 치료약으로 서서히 나아질 거야.”
“정말 고생이 많았소. 좀 전에 란드 씨에게 듣기로, 오전에 저수지에 가서 물을 회복약과 같은 것으로 조치해두셨다 들었소.”
“응. 흑미랑 듀라한이 마기가 전혀 없는 물로 바꿔준 덕분에.”
“히히. 흑미도, 듀라한도 열심히 했어요.”
철컥!
벨리아누스가 흑미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듀라한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무척 감사한 일이오. 어둠과 불의 일족 후계들에게도.”
“운이 좋았지 뭐. 누구 하나라도 없었으면 시도하지 못했을 거야.”
룬은 다른 이들에게 공을 돌리고, 그가 확인한 ‘물의 보주’의 성능을 떠올렸다.
사실은 듀라한과 흑미가 저수지에 새로 들어온 마기를 모두 삼키고 난 뒤.
룬은 보주를 저수지에 사용했다.
사용 결과는 약간의 놀라움과 만족도를 느끼게 했다.
‘물의 보주’는 백야의 눈물을 그대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대신 약하게 희석시킨 정도의 효능을 지닌 약물로 바꿀 수는 있었다.
‘본래는 세계수의 진액이 섞인 물이었기 때문일지도.’
가진 패를 모두 밝히고 싶진 않았기에, 마기를 모두 잡은 뒤 룬이 몰래 물의 보주를 사용했다는 말은 비밀로 할 셈이었다.
‘물을 술로 바꾸는 정도는 예상했었는데. 독으로도, 치료에 도움 되는 약수로도 바꾸는 힘이라.’
사용하기에 따라, 그가 ‘물의 보주’를 쓰면 눈앞에 있는 자가 마실 음료수를 독으로도, 약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었다.
진입자 개인의 공헌도에 맞춰 보상을 준다.
그 속뜻이 그가 지닌 특성 맞춤형 보상이라는 걸 실감하며 감탄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내가 선택하기에 따라 물의 레어가 구해질수도, 어둠에 물들어 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온 아티팩트 같은데.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보물이라는 게 아까울 정도인걸.’
속내를 숨긴 룬은 벨리아누스가 마련한 마차에 도착했다.
마부석이 비어 있어 조금 의아해하는데, 흑미가 말을 검지로 척 가리켰다.
“어라, 룬님! 말이 반짝여요.”
- 호오오! 이거 이거, 아주 희귀한 녀석이로군요! 제가 맞춰볼까요? 세계수에서만 산다는 유니콘 아종이 아닙니까?
“역시 제드 군. 대륙에서 많은 일을 하셨다더니, 역시 조의가 깊구려. 그렇소. 순혈의 유니콘에 비할 바는 아니나 대신 사람을 덜 가리는데다 엘프들과 친화적인 녀석들이지.”
- 역시! 캬, 생전에 보도 못한 걸 여기서 다 보다니! 직접 만질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걸 타면 하늘을 나는 듯 달린다는데 얼마나 빠를지!
흥분한 제드를 보아하니, 친화력이 없어도 유니콘 아종을 손으로 만져볼 기세였다.
‘말고삐가 신기하긴 한데.’
자세히 보니 고삐와 달린 장식조차 가죽으로 죄이는 것이 아닌, 실크 느낌이 나는 보드라운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차에 타시오. 내가 직접 움직일 테니.”
“직접 말이냐?”
“이 유니콘 아종들은 나와 교감을 나누며 움직이는 녀석들이라오. 다른 자들은 어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