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42)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벨리아누스를 보던 페르디키온은 일단 알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벨리아누스 말고는 말을 듣지 않는다, 라.’

비록 휴식기라하나 집정관을 모시는 엘프 사용인이 없던 게 아니었다.

말을 타고 사냥하던 종족이니만큼, 벨리아누스가 원했다면 안전을 위해서라도 마부역을 할 자가 있었을 터.

하지만 벨리아누스는 결국, 직접 마부석에 올라 부드러운 턴 고삐를 잡았다.

란드는 익숙한 듯 즉시 마차에 올라타며 한 마디 남겼다.

“잠깐 졸고 일어났더니, 무척 기운이 나는 모양이야. 빨간 꼬맹이의 노래, 효과 좋던걸.”

“시끄럽다. 요상한 가면이나 만든 놈은 닥치고 있어.”

페르디키온이 대꾸하고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마차에 탄 룬은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왕궁으로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수단을 고른 것일 텐데, 너무 눈에 띄는 마차라 조금 걱정인걸.’

마차 앞을 뛰어들 미친 녀석들은 없겠지만, 보고 제지하거나 검문을 일일이 하려들면 귀찮아질 터였다.

최초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마을에 들어올 때 까지 여섯시간은 걸렸을 정도다.

왕궁으로 갈수록 검문이 삼엄해 지기 마련이니, 시간을 꽤 잡아먹지 않을까 염려가 들었다.

“자, 그럼 출발하겠소.”

가벼운 재촉과 함께 유니콘 아종 네 마리가 발을 굴렀다.

마차는 흔들림 하나 없는 부드러움을 선사하며 왕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룬은 자신의 걱정은 염려할 필요 없었다는 걸, 좋지 않은 광경을 통해 깨달았다.

“히이잉. 또 이상한 냄새 나요.”

흑미가 끙끙 거리며 또다시 코를 쥐었다.

벨리아누스의 마을은 세계수와 제법 먼 곳에 있었다.

엘프들의 왕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연히, 세계수 방향으로 쭉 가야했다.

그리고, 일행들은 세계수와 가까운 마을을 지날수록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걸 느꼈다.

‘이건 썩은 시체 냄새잖아.’

심지어 불에 태운 재 냄새도 나고 있었다.

룬은 흑미에게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도록 일렀다.

귀를 잔뜩 접은 흑미가 시무룩하니 중얼거렸다.

“룬 님, 저 뭔가 기분이 안 좋아요.”

“자, 백야라도 끌어안고 있어. 마스크 꺼내 쓰자.”

“삐약.”

악취 때문에 코를 꼭 쥐고 있던 흑미가 얼른 마스크를 끼고 백야를 불러 품에 안았다.

마스크에 마법이 걸려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기분 나쁜 냄새를 다 잡을 수는 없었다.

“……도와주마.”

란드가 목 안에 걸린 줄을 꺼냈다.

이제 보니,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목걸이에 장식처럼 걸린 것은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숲의 일족, 그린 드래곤의 비늘이 달려있었다.

“이거 그린 드래곤 비늘이잖아?”

“선대 그린 드래곤 장로가 내게 준 비늘이다. 성체가 되는 날, 라스트 네임을 완성하며 받은 선물이었지.”

한 때 란델 에페스트로 였던 란드.

이제 이름은 버렸지만, 전대 그린 드래곤 장로의 가호가 담긴 비늘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손을 꾹, 쥔 란드가 낡은 용언을 읊자 비늘이 은은한 옥빛을 내었다.

“바람이다…….”

흑미의 중얼거림과 함께 숲과 바람의 일족의 가호가 천천히 그들을 감쌌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며 공기를 환기 시켰다.

한층 숨 쉬기 편해지며, 은은한 숲 향기가 감돌았다.

“임시 방편이지만.”

힘을 쓴 란드가 피로한 기색을 비추며 한숨을 쉬었다.

물러났던 악취가 바람이 사라진 공간 사이로 슬금슬금 끼어들었다.

“내 걸 쓰자.”

룬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향기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안에 오렌지 사탕과 꿀을 묻힌 꽃을 넣고 닫았다.

잠시 기다리자 두 가지 향이 어우러지며 방향제 역할을 해 주었다.

덕분에 일행들은 숨통을 틔웠다.

목걸이를 품에 갈무리 한 란드가 상자를 물끄러미 보며 감상을 말했다.

“효과가 좋구나, 그 아티팩트.”

“응. 어둠 일족의 유품이야. 내가 손을 좀 더 봤지만.”

“……흐응.”

블랙 드래곤 일족의 유품이란 말에, 란드가 흥미로운지 말없이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흥미를 잃고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벨리아누스도 마스크를 쓰고, 창으로 조금씩 넘어오는 향에 기대 숨을 들이켰다.

“다들 마스크는 꼭 쓰도록 하시오. 향기를 맡아보니 조치를 취한 듯하나, 주변 상황이 영 좋지 않소. 치안을 유지할 만한 자들이 전혀 보이지가 않는 것도 이상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오.”

히잉!

히히잉!

유니콘 아종들의 투레질 소리가, 얼마나 괴로운 상황인지 말 해주었다.

룬은 향기상자를 들어 벨리아누스가 보이는 창 쪽으로 최대한 밀었다.

“자. 이걸 말들도 향을 맡을 수 있게 거기 둬. 바람 때문에 이쪽으로 향이 잘 건너오니까.”

“……! 호의 감사히 받겠소. 안 그래도 말들이 점점 힘들어 하고 있던 참이라오.”

“응. 진동이 심해지더라. 이거면 금방 괜찮아 질 거야.”

벨리아누스가 상자를 받아 옆자리에 두고 떨어지지 않게 붙들어 매두었다.

통제력을 잃어가던 말들이 정말로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왕성까지 더 빨리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마음 같아서야 그러고 싶지만, 말들도 힘들어 하고 있으니…….”

히히잉!

히힝!

유니콘 아종들이 콧숨을 푹푹 내쉬더니, 고개를 거칠게 털어대었다.

이어, 달리는 속도가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아니 이건! 말들이 엄청나게 질주하기 시작했소!”

“상자 제대로 묶어, 벨리아누스.”

신기하게 여긴 벨리아누스가 감탄스러운 듯 탄성을 터트렸다.

한 손으로 고삐를 쥔 그가 룬의 말에 따라 상자를 더욱 고정시키자마자 말들이 상체를 한 차례 들며 힘차게 발을 굴렀다.

“허억!”

이내, 마부석의 집정관은 잡담 한번 할 틈 없이 고삐를 쥐고 말에 집중해야만 했다.

물론 룬이 예상한 바였다.

‘향기 상자 효과가 돌기 시작했군. 다행이네. 혹시 돌발 상황이 일어나도 말들이 내 말은 듣겠지.’

유니콘 아종의 신체 능력은 무척 뛰어났다.

그러나 벨리아누스만 다룰 수 있다는 단점이 유일한 흠이었다.

하지만 향기상자를 이용하면, 적어도 룬이 다루게 되었을 때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을 터였다.

‘배려도 때를 맞춰야 좋은 거지.’

시간도 시간이지만 말에게도 잘 통할지 써본 것인데, 고고한 모습을 유지하던 유니콘 아종들은 경주마라도 된 양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된다고?

달리는 속도가 올라갔지만 마차의 진동은 그다지 심해지지 않았다.

유니콘 아종들은 그들이 이끄는 마차에 룬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주 섬세하게, 그러면서도 빠르게 발을 굴러대는 중이었다.

이를 모르는 벨리아누스는 말들이 의욕적이고, 그와 동조가 잘 되고 있다 여겼다.

실제로 기수의 실력 역시 유니콘들의 컨디션을 최고로 이끌어 주는 건 사실이었다.

마부석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벨리아누스가 겨우 말을 뱉었다.

“이거, 말들이 더 힘을 내 주는군요! 놀라운 무, 물건이오.”

“응, 효과가 좋기는 해.”

“대단하시오, 룬 님. 드, 드래곤 족은 원래 이런 보물을 많이 가진 게요?”

“내가 아는 자들 대부분은. 모든 드래곤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실제 란드만해도,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성체가 된 기념으로 선물 받은 그린 일족 장로의 비늘 하나가 그의 전부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드래곤으로서 그를 상징하는 것들을 다 버렸기에 그럴 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저 비늘은 지닌 걸 보니 <드래곤 란델>이었던 시절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었군.’

누구나 과거를 완전히 버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룬의 조치로 더욱 힘을 낸 말들의 활약과 벨리아누스의 부림 덕분에 어느 새 왕궁에 도착했다.

시간으로 치면 벌써 저녁때였다.

완전히 지쳐버린 말들이 몸에서 김을 내며 푸푸, 소리를 냈다.

얼마나 달렸는지 한 녀석은 정신이 혼미해 보일 정도였다.

벨리아누스가 워워, 하고 말들을 다독이며 등을 문질러주었다.

“이런. 왕성의 도개교가 올라가 있소.”

엘프 왕궁은 세계수에서 나오는 물이 주변을 흐르고 있는 하얀 성이었다.

달빛을 받아 흰빛과 은빛이 번갈아 반짝이는 성은, 하늘의 별을 깎아 만든 것처럼 아름다웠다.

문제는, 그 아름다움이 어딘가 기이했다는 것이었다.

강에는 마족화 된 물고기와 풀들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흔들거렸다.

물 저변에 검보라빛으로 고여 있는 것은, 저수지에서 봤던 마기보다 더욱 찐득했다.

“아무리 비상상황이라 하나, 도개교 앞을 지키는 병사조차 없는 건 무언가 이상하오.”

미간을 찌푸린 벨리아누스가 삭신이 쑤시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성은 여전히 달빛을 받아 아름다웠다.

하지만, 속에 품은 것들은 얼마나 흉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차피 정면으로 들어가는 건 좋은 수가 아닐 거야. 성에 보호마법이 걸린 것 같은데, 이걸 해제할 방법은 없을까?”

“없다오. 나 역시 룬 님 말대로 되면 벌써 이야기 했을 거요. 하지만 반드시 이 도개교를 지나야만 보호마법에 걸리지 않지. 날아가거나, 정령이나 마법. 모두 불가하오.”

“란드의 테이밍으로 그리핀을 타고 가는 건 어때. 하늘을 나는 새까지 잡진 못할 것 같은데.”

“도개교가 열리지 않을 때엔, 동물들이 기피하게 되는 마법이 걸려 있소. 엘프 조상들의 고대개념 마법이라, 당장은 방법도 없지만, 설령 안다 해도 그를 풀기 어려울 거요.”

‘골치 아프게 됐는데.’

그 때, 벨리아누스가 턱을 문지르더니 다소 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만, 내 집정관 직위가 박탈된 것은 아니니…… 시도해 볼 방법이 하나 있긴 하오.”

“뭔데?”

“원래라면 병사에게 패를 보여주고 사용해야 하지만, 병사가 없는 마당이니.”

벨리아누스가 품에서 은색의 작은 패를 꺼내들었다.

- 아아니, 그건 미스리일!?

“아하. 역시. 드워프족은 알아보겠구려.”

룬과 페르디키온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귀한 무구로 만들어진 것들 중, 그 소재가 미스릴인 경우가 있었고 고대에는 미스릴 동전이 화폐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둘 모두 아주 귀했다.

지금 구하려면 골드 드래곤의 보물창고쯤은 뒤적여야 할 정도로.

“초대 엘프 왕과 가신들이 정해졌을 때 엘프들의 개념마법으로 만들어진 건국패라오. 이 성과 함께 제작되어, 이걸 쓰면 이 패와 연결된 집무실까지 이동이 가능하지. 문제는 이게 1인용이란 거요.”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구겼다.

“보안 한번…… 철저하군.”

씁쓸한 미소를 띈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라도 문을 열 수 있도록 시도 해 볼 순 있을 거요. 복귀하기로 마음먹고 왔다 하면 큰 문제가 생길 일도 아니니 말이오. 큼! 다만…….”

“?”

뜸을 들인 마른 엘프가 다음 말을 이었다.

“이 패가 동물까지 막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소. 조상들 중 아마,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분이 계셨던 모양인지라.”

“!”

페르디키온과 룬이 서로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뭘로 동물의 기준을 나누지?”

“룬, 따지자면 인간도 동물이지 않나?”

둘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때 아닌 동물 토론이 벌어졌다.

“인간은 둘째 치고, 수인족도 동물로 볼 수 있는 것이냐?”

“수인족은 동물의 특징을 가진 지성체라고 알고 있어. 종족으로 구분하면 인외종족이긴 할건데. 애매해.”

“그럼 흑미는 가능하단 말인가.”

“그럴지도 몰라. 짐승이 아니라 동물이라며.”

토론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럼 몬스터 중에서도 애완용 몬스터가 있는데, 그럼 그것도 여지가 있다는 소리 아니냐. 사람만 아니면 된다는 말인 거냐?”

“모르겠어, 기준이 대체 뭐지.”

크리스티나의 전승마법을 통해 개념 마법을 경험해 본 룬도,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심지어 태초의 엘프 기준이라 더욱 애매했다.

그들의 견해와 관점을 알기에는, 너무나 시대를 초월한 존재들이었다.

결국 상황을 정리한 건 벨리아누스였다.

“하면, 간단히 확인부터 해 보면 어떻겠소. 패에 손을 올리면, 이동이 가능한지 확인 가능하오. 마력이 작동하면 동물로 인식 한다는 거고, 반응이 없다면 인식하지 않는다는 거요. 완전히 시전 되기 전에 취소하는 건 내가 조금 신경 쓰면 가능하오.”

“좋아, 빨리 해보지.”

페르디키온이 대답하고 가장 먼저 패 위에 손을 내밀었다.

시간을 들여 기다렸으나, 패는 반응이 없었다.

“칫.”

안타까워 보였지만, 페르디키온은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다음은 흑미요!”

손을 번쩍 든 흑미가 쪼르르 달려와 꼬리를 살랑거렸다.

패 위에 조그마한 손을 얹자, 마력의 빛이 돌며 은푸른 빛을 내었다.

“어! 흑미 통과인 거 맞죠?”

해맑게 웃는 모습으로 귀를 쫑긋 거린 흑미가 손을 떼었다.

다음은 룬의 차례였다.

페르디키온과 마찬가지로, 룬에게도 패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흑미는 되고, 페르디키온과 나는 안된다라.’

혹시나 하여 백야도 발을 대어보았으나, 역시나 쉽게 패의 빛을 밝혔다.

듀라한과 제드는 아예 논외였고, 란드는 불통이었다.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결과를 정리해 주었다.

“그럼…… 룬 님, 페르디키온 님, 란드 씨와 듀라한 씨는 불통. 백야와 흑미 양이 가능하겠소.”

“안되겠는데. 흑미랑 백야만 보낼 수는 없잖아.”

룬의 말에 란드가 파랑새를 불러들였다.

“퍼밀리어로 나와 연결 되어있으니, 안의 상황을 볼 수도 있고 의사를 전달하는 것도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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