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242)

“그걸로는 너무 불안하다. 그래봐야 평범한 동물의 신체니까. 안에 있는 건 마족과 관련된 것들인데 그딴 새야 손짓 한번에 생명력이 빨려 죽을걸.”

바로 부정하며 고개를 젓는 페르디키온을 보며, 룬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동물…… 동물. 지금 우리 중 동물에 분류가 가능한 자라.’

한 가지, 스치듯 떠오른 것이 있었다.

굉장한 편법이었지만 가능성을 따지자면, 적어도 룬과 란드, 페르디키온은 통과할 수 있었다.

“형, 내가 생각 난 게 하나 있는데.”

“뭐냐?”

“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보려고.”

그닥 내키지 않는 얼굴로 룬이 팔찌를 쑥 뺐다.

즉시 룬은 까맣고 어린 해츨링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호오. 이 모습이 어둠 일족 후계자님의 본 모습이로군요. 밤을 품은 모습이라니, 무척 멋집니다.”

“뀩.”

‘말이라도 고맙다.’

벨리아누스의 말에 룬이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본모습으로 돌아간 룬의 겉모습은 영락없는 짐승, 아니. 해츨링의 모습이었다.

“뀨, 뀨.”

‘패 좀 보여줘.’

까만 앞발 하나를 내미는 의미를 이해한 벨리아누스가 무릎을 굽히고 패를 내밀었다.

룬의 발바닥이 패 위에 얹어졌다.

파앗!

“…….”

패가 반응하며 마력의 빛을 흘렸다.

룬은 반쯤 흐린 눈이 되어 그 광경을 응시했고, 페르디키온은 어이가 없는 눈을 했다.

“이게 된다고?”

“……뀨우우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묵묵히 ‘뀨욱’ 소리를 내는 룬을 보며, 페르디키온은 이를 까득 갈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치겠군. 여기 있는 누구라도 이 사실을 발설하면 가만 안두겠다.”

“크흠, 알겠소.”

벨리아누스가 결국 동요를 참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란드는 아예 몸을 돌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조용히 있던 룬은 고개를 느리게 흔들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더 신경 쓰이게 한다는 걸 모르다니.’

“와! 룬 님 본체다아!”

흑미가 신이 나서 얼른 룬을 끌어안았다.

백야까지 덩달아 와서 룬 근처를 돌고 있자니, 페르디키온이 결국 폴리모프 마법을 풀었다.

“큐악.”

란드는 까만 해츨링인 룬과 붉은 색 섞인 주홍색 해츨링인 페르디키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족 어린아이들을 보는 것도 간만이군. 자, 여기 이 새를 데려가.”

속도 모르는 듯 란드가 태연하게 파랑새를 건넸다.

“캭.”

[웃는 거 다 보인다, 입 꼬리 단속 안하냐.]

“흐음, 해츨링은 간만에 보는 지라 반가워서 그만.”

“캬악!”

[거짓말 하지 마!]

안 그래도 주홍빛인 해츨링이 캭캭 소리를 내자, 란드는 정말로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순순히 새를 넘기고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마음을 진정시킨 벨리아누스가 슬그머니 패를 내밀었다.

“고대 엘프의 개념 마법은 시전자의 주관에 따라 움직이는 마법이라 듣긴 했소만……, 태생과 외형이 생각보다 중요했던 모양이오. 어쩐지 조상님이 허물없이 느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말이오.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방식을 찾아낸 룬 님의 지혜로움에 감탄했소. 자, 시간이 귀하니 그만 들어갑시다.”

“뀨우우.”

“삐약!”

“뀨캭.”

“네에!”

패에 각자의 앞발, 혹은 손이 올라왔다.

파랑새는 가벼운 날개짓으로 벨리아누스의 어깨에 앉았다.

파앗!

패의 빛이 반짝이며, 자리에 모인 이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남아있게 된 란드는 마차로 돌아가 눈을 감으며, 그의 퍼밀리어와 감각을 공유해나갔다.

한편, 집무실 안에 무사히 도착한 엘프 하나와 다양한 새와 여우수인, 해츨링은 주위를 둘러보곤 벨리아누스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뀨.”

‘뭐 하던 엘프냐, 넌.’

룬은 재빨리 흑미의 눈을 가리고 지그시 벨리아누스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50년 전만 해도 나 역시 혈기 왕성한 자였던 지라. 잠시만 기다리시오.”

민망한 웃음을 흘린 엘프는 ‘어디 보자.’ 라며 책상 위에 널린 것들부터 집어넣었다.

좋은 징조네

‘뭘 저렇게 많이 죽여서 장식했어?’

벨리아누스의 책상과 벽에 걸린 것은 어린아이에게 보이기엔 너무 소름이 끼치는 장식물이었다.

마족을 척살하여 목을 통째로 뜯어낸 뿔 달린 해골.

마족화가 된 동물들의 목이 잘라 나무판에 붙인 채, 트로피처럼 벽에 주르르 붙인 벽장식.

거기에는 당장이라도 단말마를 지를 것 같은 공포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얼마나 생생한지, 지옥도에서 기어 올라온 듯 섬뜩했다.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취미로 저런 걸 모으는 놈인 줄은.”

해츨링들의 시선을 받은 벨리아누스는 난감한 눈치였다.

“취미는 아니오. 그저, 전쟁 당시엔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오. 병사들의 사기를 위한 일이었지만……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구려.”

룬은 벨리아누스의 말을 듣고 이 공포스러운 인테리어의 이유를 짐작해냈다.

기괴한 마족의 머리는 엘프에게 적을 무찌른 증거였다.

‘하긴, 벨리아누스는 전쟁 공로를 인정받아 집정관을 위임받았다고 했지. 마족 시체는 단순한 개인 취미가 아닌, 마족에게 맞서 싸워야 할 엘프들을 위함이었군.’

순탄치 않던 마족과의 싸움.

마족의 머리를 베어 올 만큼 강한 무력을 지닌 벨리아누스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 전투 중 그가 나옴으로써 엘프들의 사기를 올렸을 터였다.

무서운 마족을 대항할 무력이 존재한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용기를 내라.

이 방에 들어온 엘프들은 끔찍하게 생긴 마족들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를 장식한 벨리아누스에 대한 경외를 더 깊이 느꼈으리라.

룬이 생각하는 도중에도 벨리아누스는 부지런히 움직여, 크고 작은 흉물스러운 머리와 해골을 모두 떼어내 숨겼다.

룬은 그제야 흑미의 눈에서 손을 치웠다.

“으응? 뭐였어요?”

흑미의 물음에 벨리아누스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나이 든 엘프의 젊은 시절 흔적이라오. 숙녀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물건들이지.”

“벨리아누스 아저씨도 부끄러운 게 있구나. 그럴 수 있어요! 흑미도요, 밤에 자꾸 이불 차고 자곤 하는데. 어느 날은 아침에 몸이 이불에 돌돌 말려서 백야랑 눈만 마주쳤더니 쑥스러웠어요. 기억하지? 백야야.”

“삐이약!”

분홍 장밋빛 눈이 생기 넘치게 웃어보였다.

물론 그런 순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에 관해 굳이 말을 꺼내는 자는 없었다.

룬은 흑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앞발 하나를 들었다.

“뀨뀨.”

“아앗. 흑미 칭찬받을 일 했어요?”

까만 앞발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흑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뀨.”

[비슷해.]

“그렇구나아. 기분 좋아요.”

전음이 들리지 않는 벨리아누스는 뭔가 짐작한 듯 입술만 움직여 웃어보였다.

페르디키온은 잠시 상황을 지켜보더니 다시 인간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곧 밤인가. 다니는 자들이 줄어든다 해도 이 모습은 눈에 띈다. 방법을 찾지.”

왕성의 해자에 마기가 고일 정도라면, 성 내부의 엘프들 역시 마기에 중독되었을 터.

그에 비해, 성 안은 다른 소란 없이 조용했다.

룬은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봤던. 그리고 피로감에 물들어 페르디키온의 노래에 잠들었던 엘프들을 떠올렸다.

병이 들었거나, 마족화가 되어가고 있었던 모습.

누군가는 적이고, 누군가는 병자.

그들 모두가 피해자겠지만, 성에 어떤 이들이 존재하느냐에 따라 대응은 달라야했다.

‘우선, 성 내부 사정을 모른다는 게 문제인데.’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턱을 문지른 벨리아누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복직을 이유로 다닐 수 있겠지만, 그대들에 대한 설명을 어찌 해야 할지 고민스럽소. 상황이 어떨지 몰래 정찰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소만, 잘 훈련된 엘프를 속이기는 무척 어렵다오.”

‘엘프의 감각이라.’

룬의 시선이 흑미를 향했다.

마침, 흑미에게는 엘프에게 친숙한 정령을 다룰 수 있었다.

‘정찰은 해결되겠군.’

가져온 약병, 그리고 백야의 깃을 꺼내는 룬에게 일행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미리 대비하고 오길 잘 했지.’

룬이 변신용 황금 팔찌를 다시 착용하고 말문을 열었다.

“이런 건 어때?”

룬의 설명을 들은 일행들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먼저 의견을 말한 건 페르디키온이었다.

“괜찮아 보인다. 그 방법이면 마족화가 된 자도, 그저 병에 든 자도. 혹은 평범한 엘프를 만나도 상관없겠군.”

“같은 생각이오.”

말을 받은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어, 흑미가 위풍당당하게 자세를 잡았다.

“제 정령들이 언제든 불러달래요!”

파랑새가 벨리아누스의 어깨에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룬의 어깨 위로 자리를 옮겼다.

새와 눈이 마주친 룬은 어째서인지, 그를 기특해 한다고 느꼈다.

‘그러고 보니, 파랑새는 행복과 행운의 상징이기도 하지. 일부러 이 녀석을 퍼밀리어로 붙여준 건가.’

란드는 냉소적이었던 첫만남과 다른 온도를 지닌 호의였다.

문득, 아침에 술과 고통에 취해 울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울어 본 적은 없었다고 했지. 어쩌면 그게 란드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을지도.’

드래곤임을 부정해 온 그가 마차에서 선대 그린 드래곤의 비늘을 사용했던 점.

해츨링 외형으로 바뀐 룬과 페르디키온을 보며 생각지 못하게 웃었던 모습도 하나씩 떠올랐다.

‘좋은 징조네.’

룬이 검지를 들어 파랑새의 부리 밑을 슬슬 쓸어주었다.

파랑새는 손가락 주인을 힐끔 보곤 느슨하게 고개를 빼냈다.

“자, 허면 준비를 서둘러봅시다.”

벨리아누스가 미소를 지으며 독려했다.

이어, 흑미가 붉은 루비 마력석을 들고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얘들아, 나와봐! 너희가 할 일이 생겼어!”

쇽!

쇽!

쇽!

쇽!

쇽!

불 도마뱀 형태를 한 살라마다 다섯 마리가 흑미 앞에 쪼르륵 일렬로 나타났다.

불의 정령들은 한 눈에 봐도 잘 먹이고 키운 티가 났다.

처음 봤을 때 보다 덩치가 조금씩 늘었고, 때깔이 아주 고왔다.

심지어 몸에서 피어오르는 불길도 제법 강했다.

‘저 녀석들, 곧 중급으로 진화하겠는데?’

룬이 속으로 살짝 감탄하고 있자니, 흑미가 한 손을 허리에 척 얹었다.

“있지, 이 성에 어떤 자들이 있는지 확인 하고 와야 해! 그리구, 주방까지 가는 길도 찾아야 하구. 할 수 있지?”

끄덕!

끄덕!

끄덕!

끄덕!

끄덕!

작고 어린 여우수인과 색이 선명한 불도마뱀들이 비장하게 의사를 주고받는 모습.

크리스티나가 봤다면, 이 광경을 귀여워했을 터였다.

훌륭하게 불의 정령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백야의 깃털을 꺼내들었다.

“이걸 먹여. 마기에 당하지 않도록 해 줄 거야.”

깃 다섯 개를 내밀자, 흑미가 받아들며 대답했다.

“네! 얘들아, 이거 하나씩 먹자!”

불도마뱀들은 흑미가 내어주는 백야의 하얀 깃을 하나씩 물어 오물오물 삼켰다.

화르륵!

왠지 모르게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불을 한 차례 피워 올린 살라만다들.

정화의 힘과 해독 능력까지 갖춘 살라만다의 기세가 제법 대단했다.

“히히. 좋아! 일식, 이식, 삼식, 사식, 오식아. 다녀와!”

불 도마뱀들이 흑미의 명에 따라 문 밖으로 사라졌다.

엘프들 중 정령을 다루는 자는 종종 있었으니, 혹 들킨다 해도 크게 경계 받진 않을 터.

‘백야의 깃을 흡수해서 마기에 오염 될 염려도 없어졌으니, 이제 기다리기만 해면 되겠군.’

잠시 틈이 나자 벨리아누스가 물었다.

“정령 이름이 특이한데, 누가 지어준 거요?”

“룬 님이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