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242)

페르디키온이 룬을 바라보았다.

“네가 생각해 낸 이름이라고? 생각보다 독특한 감각을 가지고 있군.”

“…….”

룬은 아련한 눈으로 말없이 흑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설마 진짜 그렇게 지을 줄은 몰랐다만.’

정령을 키우다가 이름을 지어주겠다며 흑미가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니던 때.

룬은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정령들에게 저런 이름이 지어진 것을 보며 안타까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

때는 크리스티나의 레어에서 함께 식사와 디저트를 즐기던 어느 날.

흑미는 달콤한 꿀과 바닐라 시럽, 크림이 들어간 와플을 들고 의견을 물어왔다.

“룬 님! 제 정령들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데, 뭔가 좋은 이름 없을까요?”

“나보다는 다른 녀석들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걸.”

“히잉!

흑미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룬은 그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진짜야. 내가 내봐야 일식이, 이식이, 삼식이 같은 이름밖에 못 내.”

“일식이……? 우움, 무슨 뜻이에요?”

사실은 떠오른 걸 그냥 입에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아끼는 정령의 이름을 짓고 싶어한 아이에게 ‘별 생각 없었어.’ 라는 말이 너무 성의 없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짧게 고민한 룬은 전생에 들었던 이야기를 말 해주었다.

“식, 이라는 단어는 식사 한다는 의미가 있었거든. 그 앞에 숫자가 붙으면 매 끼 함께 식사하고 싶을 정도의 존재라는 말이야.”

“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 낸 흑미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감탄하며 입을 벌렸다.

그러나, 룬은 설명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마지막으로 남은 커다란 딸기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안에 가득 밀어넣었다.

그때였다.

흑미가 결심한 듯 눈빛을 바꾸었다.

“좋아요! 저도 얘들하고 늘 함께 하고 싶어요! 다섯 끼를 먹게 되어도 좋아요!”

“뭐?”

“얘들아, 나와봐!”

흑미가 정령들을 불러내자 룬은 뒷일을 예감하고 말리려했다.

그러나, 입 안 가득 물린 케이크 때문에 말을 못한 사이 흑미가 선언했다.

“이제 너희는, 나랑 늘 함께 지내면서 맛있는 식사도 같이 하는 거야! 잘 부탁해, 일식, 이식, 삼식, 사식, 오식아!”

“야, 잠깐…… 켁, 콜록!”

마음이 급해진 룬은 케이크를 대충 씹어넘기다 목에 포슬한 빵과 딸기조각이 걸려 기침을 했다.

그 사이, 이름을 받은 흑미의 정령들은 자랑스럽다는 듯 꼬리를 꼿꼿이 세우며 의기양양한 얼굴을 해 보였다.

***

회상이 끝나고, 룬은 잠시 안타까운 기분을 느꼈다.

‘그랬었지. 그 때 케이크만 목에 걸리지 않았으면 그 이름만큼은 어떻게든 말렸을 텐데.’

한편, 흑미는 정령들과 실시간으로 교감을 하며 모인 일행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으음~일식이가 저희가 있는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구요, 바닥을 뚫고 들어가 본 이식이가 방 문 안에서 앓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요! 삼식이는 주방에 식사가 한창 준비 중이라 하고…… 앗, 사식이가 배고프다고 빵을 주워먹었어요!”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식사를 하는 엘프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모인 이들은 벨리아누스의 아들 아퀴르를 통해 마족화가 되면 엘프의 소박한 식사가 아닌 핏기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식이가…… 어어, 이건 뭔지 모르겠어요.”

미간을 구기며 눈을 감은 흑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앗…… 오식이가 더 이상은 못 가겠대요. 지하인데, 악취랑 크릉크릉 하는 소리가 들린대요. 그러고…… 불길한 기분이 들고 기분도 나쁜, 피부가 징그럽게 생긴 엘프들이 있다고 그러는데.”

“!”

설명을 들은 룬, 페르디키온, 벨리아누스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색욕과 탐닉의 마족

불의 다섯 번째 정령, 오식이가 더 이상 진입할 수 없었으므로 룬은 흑미에게 말했다.

“고생했다. 정령들은 그만 돌아오게 해.”

“네에, 으으. 뭔가 기분이 안 좋아요.”

흑미가 끙끙거리며 정령들을 불러오는 동안, 룬은 고생한 흑미를 소파에 앉게 했다.

“크리스티나가 챙겨 준 간식 주머니에서 음료 꺼내 마시고 있어.”

“네에.”

주머니를 열고 고민하던 흑미가 레몬허브티를 꺼내 마셨다.

룬은 흑미가 생각보다 힘들어했다는 걸 느꼈다.

어린 여우 수인은 가리지 않고 다 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본래 허브티는 잘 고르지 않았다.

맛 보다, 기분을 가라앉힐 용도로 선택했다는 의미였다.

그 사이 돌아온 불의 정령들이 각기 다른 얼굴로 흑미의 붉은 펜턴트 안으로 사라졌다.

“오식아, 고생했어.”

특히 표정이 지쳐보이는 정령을 흑미가 손 위에 올리고 토닥여 주었다.

한편, 룬은 정령들을 보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성 안의 엘프들 대부분이 제대로 거동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이 점은, 다행이기도 불행이기도 했다.

룬이 주변을 환기시킬 겸 입을 열었다.

“식당까지 내려가는 데에 걸림돌이 될 건 없을 것 같아. 오히려 시간을 지체할수록 문제가 커질 것 같은데.”

“그래 보이는군. 지하에 가둬둔 엘프들은 곧 마족화가 될 테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페르디키온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럼, 이야기한 대로 식당에 가서 음식에 룬이 가져온 치료수를 풀도록 하지. 벨리아누스, 앞장 서라.”

“알겠소. 한시가 급하니 조금 서둘러봅시다.”

말을 마친 벨리아누스가 ‘바람의 길’을 만들어냈다.

처음 마을에 진입할 때 다녀본 것이 임시로 깔린 샛길 같았다면, 벨리아누스의 길은 바람으로 감싸인 대로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 순간, 성 전체가 우르르 진동했다.

마치 괴물이 내는 것 같은, 불길한 소리였다.

“느낌이 좋지 않군.”

표정을 구기며 중얼거린 페르디키온의 말이 일행들의 기분을 대변했다.

게다가 룬은, 안 좋은 가정을 떠올린 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형, 벨리아누스. 아무래도 이 성 전체가 마족의 영역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뭐?”

“!”

말을 들은 이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당연했다. 성 전체가 마족의 영역이 된다는 건 상상해 본 적이 없던 이들이었으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형, 아멜리아 일가를 도운 일 기억나지? 그때 <저주받은 던전>을 떠올려 봐.”

“!”

긴 시간 어둠 속에 물들어 있던 <파도의 던전>이, 결국 제 모습과 색을 잃고 어둠 일족 속성의 <저주받은 던전>으로 바뀐 일.

벨리아누스 역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체감한 표정이었다.

“엘프의 성이 마족의 던전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오?”

룬이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완전히 던전화가 되면 성 밖으로 마기에 중독된 자들이 쏟아져나갈 테고, 이 성 안에서 마기를 지니지 못한 자는 버티지 못하겠지.”

성 주변을 두르고 있는 해자와 마을은 필드로.

엘프의 성 내부는 마기에 물든 던전으로.

세계수도 어찌될지 알 수 없었다.

‘성 안의 엘프들은 대부분 몬스터화 되어가고 있다 봐야겠지.’

이쯤 되니 숲의 인장과, 엘프왕의 상태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얼굴이 희게 질린 벨리아누스가 조급한 마음을 내비쳤다.

“허면, 엘프왕을 먼저 뵈어야 하지 않겠소? 도저히 손 쓸 수 없게 되기라도 하면, 우린 왕을 잃게 되오.”

“그가 이 성의 최종 보스화 되었을 수도 있어.”

룬의 말에 말문이 막힌 벨리아누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달려가다가는, 자칫 보스가 된 엘프왕에게 즉살당할 수 있었다.

팔짱을 낀 페르디키온이 답답하다는 듯 시선을 옮겼다.

“나 역시 적장부터 정리해버리고 싶다만. 원래 대장을 쓰러뜨리면 자잘한 녀석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벨리아누스의 방식에 찬성표를 드는 말이었으나, 룬이 만류했다.

“자칫하면 엘프의 왕을 죽인 드래곤족이 되어버려. 안 그래도 드래곤족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이 있으니 ‘마족’이 되었다 해도 엘프들의 원망은 형을 향할 거야.”

“허면, 내가 엘프들을 설득하겠다면 어찌하시겠소? 내가 함께 하면서 엘프왕의 생명을 함부로 좌시하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을거요.”

벨리아누스의 제안에도 룬이 회의적이었다.

“벨리아누스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감정이라는 건 타당한 논리로 설득되는 게 아니니까.”

논리적으로 맞는 말을 해도 마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존재한다.

시간을 들여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 나갈 수는 있겠으나, 이는 본래 힘들고 어려운 일.

한편으로는 무척 수고스럽기까지 했다.

오히려 반발심으로 다른 이야기와 생각을 말하는 자도 생길 수 있었다.

‘우리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란드는 엘프를 떠날 생각이 없어. 드래곤 족이라는 차별이 심해지면 란드의 상황은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 거야.’

심지어, 룬은 내심 짚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시도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벨리아누스가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룬이 입을 열었다.

“음식을 만들고 있다면 요리사들은 아직 마기에 완전히 오염되지 않았다는 말이야. 그들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단서가 나올 수 있어.”

‘짐작 가는 것도 있고.’

룬은 아공간 주머니에 챙겨왔던 포도주를 떠올렸다.

요리하는 엘프들은 룬의 짐작에 확신을 더해줄 자들이었다.

“알겠소. 조급해 한다고 일이 풀리는 것이 아니니.”

대답하는 벨리아누스의 목울대가 울럭거리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룬이 고개를 돌려 흑미를 보았다.

“흑미야, 속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졌어요!”

“삐이약!”

흑미는 백야를 품에 안고 한결 편해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룬이 바람의 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자.”

신중해야했으나 시간은 귀했다.

벨리아누스가 먼저 ‘윈드 러너’의 축복을 모두에게 내린 뒤 길 위로 발을 내디뎠다.

퉁!

순식간에 복도 끝으로 날아간 그를 따라, 일행들도 길을 밟았다.

***

집정관이 있는 4층에서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

일행들이 지나가는 길마다 엘프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박박 긁는 소음과 머리를 벽에 박는 울림도 종종 들려왔다.

‘벨리아누스가 영 안 좋은데.’

룬의 짐작대로였다.

유난히 귀가 좋은 엘프족인 벨리아누스는 동족들의 신음 소리를 더 생생하게 듣고 있었다.

- 으아악. 아악!

- 끄으…… 끅.

방문 옆을 지날 때마다 들리는 통증에 몸을 쥐어짜이는 소리.

강직한 성품의 벨리아누스로서는 외면키 어려울 만도 했다.

‘멀쩡한 녀석들이 있긴 할 텐데.’

음식을 먹을 정도로 마족화가 진행되지 않은 엘프는 2층에 있었다.

그리고 2층에 접어들자, 이들을 막는 엘프가 나타났다.

“멈추, 시오!”

경비 옷을 입은 엘프가 복도에 서 있었다.

하지만 경비를 서야할 그들은 눈을 까뒤집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을 향한 제지도 경비원으로서의 의무 때문이 아니었다.

“무, 물 좀…….”

가장 앞에 선 벨리아누스를 보며 자세조차 잡지 못한 그들은, 마치 사막에서 여행자를 만난 듯 도움을 구해왔다.

“자.”

룬이 만들어 둔 치료약을 무심히 건넸다.

멋모르고 투명한 액체를 들이켠 엘프가 목을 쥐고 바닥을 굴렀다.

“크악!”

왈칵!

썩은 피로 뭉쳐진 끈적한 마기를 토한 병사는 몸을 덜덜 떨며 엎드렸다.

룬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엘프에게 다가가, 천천히 마기를 흡수했다.

“저도 도울게요.”

놀란 눈으로 백야와 함께 있던 흑미가 다가왔다.

룬과 반대편에 선 흑미는 마기를 조심조심 흡수해내며 걱정스레 말을 붙였다.

“괜찮아요, 아저씨?”

“네, 네에…….”

벨리아누스가 엘프들의 등을 두드렸고, 병사들은 헐떡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레어아머와 체인메일을 적절히 석은 옷을 입은 짧은 레몬 머리색의 엘프 병사가 그제야 일행을 살피고는 눈을 깜빡였다.

“베, 벨리아…… 누스 님?”

“나를 기억하는 자가 있었구려.”

“무, 물론……입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 엘프 병사의 어깨를 힘 있게 쥐며, 벨리아누스가 말을 이었다.

“몸은 어떤가.”

“무겁고…… 겨우 숨을 쉬는 기분이, 듭니다. 그렇지만 좀 전에는…… 숨은커녕, 머릿속에서 이상한 말이 들려서. 아예 정신을 차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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