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42)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룬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호흡을 겨우 정리한 엘프 병사가 흐린 시선을 공중에 던졌다.

“스산하고 소름끼치는 속삭임이었죠. ‘죽여라. 목을 베어라. 살을 찢고 삼켜라.’라는…… 말이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허기가 몰려들었죠. 뭐라도 먹고, 마시고 싶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색욕과 탐닉의 마족.”

룬의 중얼거림에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그 역겨운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되다니.”

“지긋지긋한 놈들이 기어이!”

벨리아누스가 인자했던 얼굴에 분노를 드러냈다.

색욕과 탐닉의 마족.

마족들 중에서도 유난히 엘프들에게 집착했던 이들이었다.

‘색욕과 탐닉의 마족을 이끄는 자라면…… 하반신은 뱀의 몸이고, 상반신은 인간 형태의 모습을 한 고위마족이겠군. 이름이 아마, 레파논이었던가.’

크리스티나의 전승 지식으로 알고 있는 정보로만 보아도, 레파논의 업적은 징그러울 정도로 끔찍했다.

- 그가 지배하는 땅은 언뜻 들으면 인간의 욕망을 모두 구현한 낙원처럼 들렸다. 마음껏 먹고 마시며 게으르게 살 수 있었고, 남녀 구분 없이 뒤엉키기도 했다. 그들은 타락하면서도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귀족처럼 치장했으나 치장품을 사기 위해 몸을 판 여자들, 그 보석을 도적질하는 자들.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하며 살지고 술 취한 자들. 몸을 술병처럼 굴리며 환호하는 자들 사이로, 마족들은 그들이 내뿜는 부정한 에너지를 흡수하고, 때론 바닥을 기는 복속자들을 발로 차고 재미를 위해 살해했다. 죄악을 통해 편을 늘리고, 세상을 점령하려는 기생충 같은 자들의 지옥에는 땀과 피가 강처럼 흘렀다.

사악한 마족들 역시 속성과 특징에 따라 계열이 나뉘었다.

그 중 ‘색욕과 탐닉’을 숭상하는 마족들을 대표하는 단어는 주색잡기와 술, 노름.

현실을 왜곡시키고 지성체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특기를 지닌 마족들이었다.

“그토록 목을 베었건만, 어찌 왕성을 이리 물들이게 되었단 말이오!”

노여움을 터트린 벨리아누스는 물론, 페르디키온 역시 이를 아는지 혐오스러운 눈치를 숨기지 않았다.

그 와중에 흑미가 새로운 단어에 눈을 깜빡였다.

“룬 님, 색욕과 탐닉의 족속이 뭐예요?”

룬은 미간을 구겼지만, 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높은 자.

경계를 위해서라도 설명을 해 둘 필요를 느꼈다.

“……한 마디로 똑똑하고 멀쩡한 자의 지능을 아메바나 다름없는 상태로 만드는 녀석들이야. 게다가 사람이고 엘프고 가리지 않고 불행하게 만들고, 손속이 잔인하기까지 해.”

“헉! 진짜 나쁜 놈들이네요! 백야도 그렇게 생각하지?”

“삐약!”

백야가 덩달아 울음소리를 내었다.

흑미는 꿀밤이라도 먹이겠다는 눈으로 작은 주먹을 꼬옥 움켜쥐었다.

약물 복용은 정량만

“그럼, 그 나쁜 자들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가지고 싶은 거나, 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뭔가가 있어서겠지.”

“그렇다고 남의 것을 가져가려는 건 나빠요! 빼앗긴 이들이 너무너무 슬퍼할 거예요.”

불만스레 볼을 부풀린 흑미가 두 개의 꼬리를 바짝 세웠다.

“그런 나쁜 짓을 한 녀석들은 혼나야 돼요! 그죠, 룬 님?”

“응. 혼나야지.”

룬은 기특하다는 의미로 흑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불쾌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흑미는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분해내고 있었다.

‘판단은 훈련이 필요한 능력이지.’

룬은 병사들에게 치료약을 몇 개 더 넘기며 당부했다.

“이걸 아직 상태가 괜찮은 녀석들에게 써 줘. 정신 차리게 하는 데에 효과 있을 거야.”

“고, 고맙다…….”

병사는 얼떨떨한 눈치였다.

다른 한 명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며 말없이 숨을 헐떡였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는 벨리아누스를 한 차례 보곤 약병을 받아들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벨리아누스가 병사를 지그시 보았다.

“자네들의 이름이 뭔가?”

“켐벨 가드온입니다!”

“메, 메린 포렐입니다!”

젊은 엘프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몸을 세우고 대답했다.

“그래. 켐벨, 메린. 왕께선 어찌 되셨는가.”

“그것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본래도 얼굴을 잘 비추지 않으신 지 오래였는 데다, 존안을 쉽게 뵐 만한 위치도 아니어서…….”

“그랬는가.”

벨리아누스가 그들의 어깨에 손을 하나씩 얹었다.

“왕은 우리가 찾아보겠네. 켐벨. 메린. 이 약으로 부디 성 안에 다른 엘프들을 구해주게.”

“!”

엘프들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과거,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들의 영웅. 벨리아누스.

마음속에 우상으로 남았던 그의 부탁은 병사들에게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고양감에 휩싸이게 했다.

“맡겨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긍지와 자부심이 되살아난 엘프들의 눈빛이 한층 반짝였다.

“최대한 많은 엘프들을 봐 주면 좋겠어. 심하다 싶으면 약 아끼지 말고.”

타이밍 좋게 룬이 끼어들었다.

혹시라도 약을 아까워 하다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할까 주의를 주자, 병사들은 비장한 각오를 다진 눈으로 바뀌었다.

“고맙구나, 꼬마야.”

“우리만 믿으려무나. 부디 벨리아누스 님을 잘 도와드리렴.”

룬은 말없이 병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남몰래 흑미에게 눈짓을 했다.

[흑미야, 저 녀석들에게 오식이 좀 붙여 놔. 혹시 특이한 걸 목격하게 되면 나에게 알려주면 돼.]

[네에!]

흑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펜던트에 손을 올렸다.

벨리아누스와 룬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엘프 병사들은 작은 불 도마뱀이 그들 허리춤으로 사라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약에 조의가 깊은 꼬마인데, 벨리아누스 님께서 찾아내신 거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 난 말이야, 사실 집정관님이 돌아오시리라 믿고 있었다고.”

룬의 순순한 행동에 엘프들은, 룬이 드래곤 족일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룬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어울리네.”

“무엇이 말이오?”

룬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집정관, 혹은 그보다 더 뛰어난 자리에.”

그 말에 허허, 웃은 벨리아누스가 입을 열었다.

“이것 참. 아직 어린 후계가 벌써 그런 감상을 이야기할 줄이야.”

사실, 룬의 말은 자칫 엘프왕에 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그저 어린 후계자의 감상이라 넘기며 벨리아누스가 허허 웃자 룬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나도 일단은 어둠의 일족 장로가 될 자인걸. 나름대로 느껴지는 게 있지.”

이 정도면 적당히 둥글둥글하게 한 말이었다.

벨리아누스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한 룬이 주머니를 갈무리 했다.

주제를 옮길 겸, 벨리아누스가 다시 바람의 길을 만들며 물어왔다.

“그러고보니 괜찮겠소?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장생하는 드래곤 족이라 하나, 아직 어린 해츨링.

엄청난 호의를 베풀며 자랑하고 싶을 만도 했다.

하지만, 약을 건낸 어둠의 후계는 미련이 없어보였다.

“됐어. 드래곤 족이라 밝혀봐야 찜찜해 할 텐데. 나중에 일이 해결되고 나면 그때나 알려주든가.”

“흠, 그러리다.”

퍽 어른스러운 대처였다.

속에 천년 묵은 능구렁이가 들어있나 싶을 정도로.

벨리아누스는 ‘윈드 러너’를 다시 걸며 생각했다.

‘형제라지만, 어둠의 후계는 불의 후계와 꽤나 다른 성격이로군.’

형이라 부르고 있으니, 불의 후계보다 어린 나이일 터.

한데, 어딘지 모르게 아이답지가 않았다.

블랙 드래곤 족이 멸절 했음을 알기에, 처음에는 일족을 잃은 아픔 탓이라 생각했다.

본의 아니게 철이 빨리 들었을 테고, 타고나길 침착한 성격이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렇게 여기기엔, 왠지 모를 현기가 느껴졌다.

벨리아누스는 룬을 볼 때마다 그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친구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나 가까운 동생 뻘이라 느껴진다니. 이것 참, 참 묘한 느낌이 드는 후계자야.’

겉모습과 다른 성숙함은 자꾸만 룬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왠지 모르게 친숙한 기분이 참 요상할 지경이었다.

퉁!

벨리아누스는 쫒아오는 이들의 기척을 확인하며 바람으로 된 길 위에 발을 올렸다.

***

그들은 식당이 있는 2층에 도달했다.

그들 앞에 있는 닫힌 문 너머로 야채 스프의 향과 구운 빵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왠지 모를 푸근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 느낌은, 단순히 음식 냄새 탓이 아니었다.

‘이 근처는 유난히 마기가 옅기 때문이야.’

룬은 문을 두드렸다.

“누구?”

유난히 뱃살이 두드러진 빵집 아저씨 같은 엘프가 문을 벌컥 열었다.

다른 손에는 프라이팬을 무기처럼 든 채였다.

탁한 짚색 머리 엘프가 마주친 것은 하얗고 통통한 새였다.

“삐이약?”

“?”

주방장 옷을 입은 엘프가 코를 실룩였다.

광경만 치면 다소 신기할 만도 했다.

파랑새를 어깨에 얹고 서 있는 소년, 분홍 눈빛을 순진하게 깜빡이는 수인족 아이, 그리고 붉은 눈과 머리의 눈초리가 사나워 보이는 소년.

“이건 무슨 모임이지?”

마지막으로 주름이 진 중년의 엘프까지 확인한 그가 중얼거렸다.

그때, 주방 안쪽에서 다급한 여성 엘프가 외쳤다.

“제프리! 또 이상한 놈들이 왔으면 얼른 쫒아내고 와!”

“어어! 이상하긴 한데, 좀 달라서!”

칙칙한 마기가 깔린 성 안에서 유일하게 생기가 있는 자들이었다.

벨리아누스가 예의 바르게 소개와 인사부터 나누려는 걸 본 룬은 그들 사이로 빠르게 지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깐 실례 좀.”

“아니 뭐냐, 꼬마? 여길 왜 들어 와?”

황당해하면서도, 주방장 옷을 입은 엘프는 저도 모르게 발을 한 발자국 뒤로 발을 물렸다.

작은 생물이 다리에 닿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인데, 그 틈으로 다른 이들도 빠르게 지나들어왔다.

“흑미도 들어갈게요!”

“들어가마.”

폴짝, 가볍게 뛰어들어가는 흑미와 당연하다는 듯 제집처럼 쑥 들어가는 이들.

주방장 엘프는 어이가 없어져 콧수염을 실룩거렸다.

“나도 좀 들어가도 되겠나?”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자세와 정중한 말투에서 특권층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났다.

왠지 거부하기 힘든 기세에 짚색 머리의 엘프가 미간을 움찔거렸다.

“당신만 밖에 둘 수도 없으니 일단 들인다만……”

엘프는 주방장 모자 너머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쩔 수 없이 출입을 허가했다.

몸을 비켜주자, 벨리아누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볼수록 묘한 조합인데. 대체 댁들은 대체 누구시오?”

나무문을 닫으며 묻는 말에 벨리아누스가 대답했다.

“나는 벨리아누스라고 하네. 휴가를 끝내고 복직을 위해 막 성에 온 참일세.”

“허?”

“아니, 뭐라고요. 벨리아누스 님?”

짚색 머리 엘프는 얼띤 허밍음을 내었고, 안에서 커다란 솥에 스프를 저어주던 녹색머리 부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토실토실한 볼에 건장한 풍채였다.

“세상에, 벨리아누스 님! 이런 누추한 주방에 이런 귀하신 분이!”

녹색 머리의 중년 엘프는 벨리아누스에게 버선발로 뛰어나갈 기세였다.

치맛자락을 쥐고 황급히 다가온 그녀가 남편으로 보이는 주방장 엘프를 꾸짖었다.

“아니, 여보! 뭐해요? 얼른 고개 숙이지 않고!”

“어어?”

“인사를 해야죠! 아휴, 안녕하세요. 벨리아누스 님!”

성마른 재촉에 엉겁결에 고개를 함께 숙여 인사하는 엘프 부부와 벨리아누스를 두고, 룬은 빠르게 재료들을 살폈다.

‘인사나 자질구레한 건 저쪽에서 이목을 끌어주겠지.’

주방 안을 신기해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내 안에 있는 숲의 기운과 닮은 걸 찾아야 해.’

포도주, 오크통에 담긴 맥주가 전용 창고 가득 들어있었다.

다른 창고로 들어가자, 거기엔 다량의 숙성된 치즈, 마른 육포가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역시 최근 수확한 걸로 보이는 고기나 야채는 못써먹겠지만.’

자연 친화적인 식성을 지닌 엘프들이다 보니, 보관된 식재료 양은 기대 이상이었다.

하기야, 지금은 다들 병자가 되어 격리 되었거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상당히 많은 자들이 거주하는 장소.

본래 엘프들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풍족한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이들이다 보니 자연에서 직접 채취한 것들이 풍성했을 터였다.

‘다행이네. 혹시라도 양이 부족하진 않을 까 걱정했었는데.’

꿀, 건조 된 찻잎, 향신료 용 허브 등을 찾아낸 룬은 무척 만족스러워 했다.

그가 원하는 것들이 여기에 가득했다.

‘여기가 보물창고네.’

룬은 허브찻잎이 담긴 유리병을 들어보이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 중에서도, 룬은 아주 오래 숙성 되어 보이는 포도주와 치즈 한 덩어리를 허리에 끼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벨리아누스는 호들갑스러운 엘프 주방장 부부에게 여전히 잡혀있었다.

그리고, 페르디키온은 기다렸다는 듯 창고에서 나오는 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룬의 손에 잡힌 포도주병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