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242)

“룬, 뭔가 생각한 게 있어서 들어가는 줄 알았더니. 설마 이 상황에 술이라도 한잔하려는 거냐?”

“음…… 비슷해.”

“뭐?”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불신으로 차올랐다.

그러나 룬은 미미한 웃음기 띄운 얼굴로 테이블 위에 가져온 치즈와 포도주를 올려두었다.

“형, 생각해 본 적 있어? 이 땅의 엘프들이 먹고 사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대접 받았던 벨리아누스 저택의 식사를 말하는 거냐?”

“응.”

식사에 대해 고민하는 페르디키온을 두고, 흑미가 쪼르르 다가왔다.

“룬 니임.”

어린 수인 여우가 룬의 소맷자락을 당겼다.

“왜?”

“으으음. 아까 룬 님 부탁을 받고 약을 가져간 엘프들이요, 먹고 마기를 토해낸 이들에게 약물을 또 먹이고 있어요!”

“…….”

“엄청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런데…… 혹시 약이 부족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걱정이 되어서 말 해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고개를 갸웃 거리는 흑미를 보며 룬은 생각했다.

약물 복용은 정량만 하라고 알려 줄 걸 그랬다, 고.

‘시간이 촉박하다 여겨서 그걸 미처 말 해주지 않았지만…….’

“괜찮아. 차라리 많이 먹여서 효과를 보는 게 낫기도 하고.”

깜빡.

동그랗게 떠진 분홍색 눈이 의문을 담고 있었다.

그 눈에 비친 룬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내비치고 있었다.

“마침 좋은 것들을 발견했거든.”

그런 효과가 있었다고요?

벨리아누스와 한창 떠들던 요리사 부부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화들짝 놀랐다.

과거의 영웅에게 정신이 팔린 그 잠깐 사이, 아이의 손에 술이 들리다니.

단순히 식재료를 건드려 난감한 정도가 아니었다.

“어머, 함부로 만지면 안 돼, 꼬마야! 성의 식재료들은 우리 부부가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구.”

심지어, 룬이 가져온 와인은 왕족이나 먹을 수 있는 천 년 전 제조된 와인.

처음 보는 소년이 멋모르고 집어왔다 여길 만했다.

하지만 이 와인은 룬이 마시려고 가져온 술이 아니었다.

“내가 마실 게 아니야. 엘프들을 위한 치료에 필요해서 가져왔어.”

룬은 가만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러자 제프리의 아내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말이 되니? 술을 어떻게 약으로 쓴다는 거니.”

“험, 험. 엘린.”

“?”

짚색 머리 요리사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잔소리를 하는 아내에게 눈치를 주었다.

입 모양과 눈짓이 빠르게 오갔다.

푸근한 인상의 엘프, 엘린은 그제야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어머나, 벨리아누스 님께서 데려온 아이들이었지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만 하세요. 호호!”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눈과 복스러운 얼굴.

통통했으나 장난스러워 보이는 얼굴은 피부가 고와 호감을 살 만한 외모였다.

그들에 비해 마른 체형과 큰 키를 가진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갑작스럽게 들어왔으니 놀랐을 게요. 긴 휴가를 끝내고 복직을 위해 온 건 사실이오. 허나, 여기 온 아이들은 우리 엘프들을 돕고자 나와 함께 와 주었다오. 어려보이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무척 의롭고 지혜로우니 이들도 나와 같이 믿어주길 바라오.”

“어머…… 이 인간 아이들이요?”

그녀는 룬과 일행들을 쭉 보긴 했으나, 믿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내 밀가루가 묻은 손을 앞치마에 털어내고 손을 내밀었다.

“난 엘린이라고 한단다. 저기 있는 토실토실한 엘프는 내 남편 제프리지. 우리는 여기서 먹고 자며 일하는 요리사들이야!”

“난 룬이라고 부르면 돼. 여긴 흑미, 그리고 형인 페르디키온.”

뒤이어, 흑미가 밝게 인사했고 페르디키온도 소개에 맞춰 고개를 까딱였다.

제프리가 수염을 검지와 엄지로 꼬아대며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뒤숭숭하고 심란한 시기에……. 거 참.”

퉁명스러운 어투였으나, 염려와 걱정이 드는 눈치였다.

잠시 어린 룬을 보던 제프리가 시선을 벨리아누스에게 옮겼다.

“벨리아누스 님. 이 아이들이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프리, 엘린이라고 했지.”

차분한 소년의 목소리.

제프리와 엘린은 룬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이어, 룬이 그들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왕에게 진상하는 가장 귀한 재료들을 보관하고, 관리할 뿐 아니라…… 너희도 먹지?”

순수하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제프리는 종종 그 특권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들어왔던 자.

다소 불편한 기분이 들어 미간을 좁혔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흠, 그렇지. 총 주방장으로서 허락받은 일이라 문제 될 건 없지만.”

그건 왜 묻는 거냐? 라고 묻는 눈이 룬을 바라보았다.

그에 답하듯, 룬이 입을 열었다.

“너희가 먹고 마신 이 포도주는 세계수에서 나온 물과 숲의 인장. 그 둘의 가호를 받아 땅이 비옥했던 시절 만들어진 거야. 이 말이 어떤 뜻이냐면.”

톡.

포도주병을 바라보던 룬이 병을 살짝 건드렸다.

“이 술에 세계수의 기운이 온전히 담겨있음을 뜻해. 그리고 아마, 몇 년 전까지도 세계수의 힘을 흡수한 재료들이 있었을 거야.”

자연이란 신기하게도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순리대로 흐르기 마련이다.

거대한 세계수는 수액이 섞인 신비로운 물을 내어주고, 그 물이 농지와 숲, 우물을 채웠다.

그 물은 엘프와 가축들, 포도와 허브. 과실과 아름다운 꽃을 키워냈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티나와 함께 가장 많이 다뤄 본 요리 재료도, 엘프가 사는 이 땅에서 난 동식물들이었지.’

그 경험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기에, 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룬의 이야기를 들은 엘린이 이해한 사실에 놀라 감탄했다.

“그럼…… 우리가 만든 식사에 마기에 저항할 수 있는, 뭐 그런 효과가 있었다고요?”

“맞아. 다만 신선한 야채나 고기는 오염되었을 거야. 엘린, 오늘 만든 것 중에 그런 요리가 있어?”

“아, 이 스프에는 신선한 야채를 좀 넣긴 했지만 많지는 않긴 한데…….”

“잠깐 확인해볼게.”

엘린은 서둘러 몸을 비켜주었다.

다가가 스프를 살핀 룬은, 스프에 소량의 마기가 섞인 것을 확인했다.

‘이 정도는 바로 해결할 수 있어.’

룬이 스프에서 좁쌀만 한 마기 몇 알을 손 안으로 흡수했다.

“이건 이제 괜찮아. 대신 이 약수를 섞어서 제조해 주면 좋겠어.”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투명한 약병들을 받은 제프리가 룬과 손 안의 약병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도저히 참기 어렵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나?”

일행들의 시선이 룬에게 모아졌다.

궁금하긴 마찬가지라는 듯.

룬은 어깨에 얌전히 앉아있는 파랑새 쪽을 슬쩍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동료인 란드 깨우러 갔을 때 알았어. 포도주 십 수병을 마시고 잔뜩 취해 있었거든.”

파랑새가 룬을 사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어둠의 후계는 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시다 바닥에 흘린 걸 보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어. 마을에 들어서고 난 뒤 늘 여기저기에 먼지가 낀 것처럼 탁한 느낌만 있었는데 맑고 선명한 느낌이 나더라고.”

풍미가 짙은 와인이라고만 여길 수 없던 마력의 이끌림.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빈 병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룬은 포도주에 힘이 깃들었음을 확신했다.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자, 크리스티나에게 보여줄 포도주를 한 병 챙기기까지 했더랬다.

‘그만큼 세계수의 힘이 대단하다는 거겠지.’

빛의 레어에서 그간 다양한 마력 요리 재료들을 활용해 온 그였기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포도주는 다른 마력요리 재료에 견줄 만한 훌륭한 힘을 품고 있다, 고.

룬은 이 포도주의 존재를 몰랐던 이유는, 본 적이 없어서.

크리스티나가 아직 어린 그에게 포도주를 권할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수의 수액이 희석된 물을 먹고 큰 포도라. 이 훌륭한 과실 덕분에 엘프들이 마기에 바로 침식되지 않고, 오랫동안 버텼던 거겠지.’

포도뿐만이 아니다.

꿀, 치즈, 사과 등.

다양한 먹거리가 세계수에서 비롯된 물을 흡수하여 자라났다.

이 축복받은 땅에서 얻은 일상적인 식사가 바로 그동안 엘프들을 지켜준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사실도 존재했다.

“문제는 최근 식사에서는 세계수의 힘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야. 벨리아누스의 식탁에서 먹은 음식들도 그래. 정령사의 힘으로 정화는 되어있었지만, 이 포도주만큼 특별한 힘이 느껴지진 않았어.”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최근 세계수는 마기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그리고 불길한 기운은 세계수를 타고 흘렀다.

결국 조금씩 마을에 퍼져나가 전염병을 일으키고, 가축과 식물 전반에 퍼져나갔다.

설명을 들은 벨리아누스가 뭔가를 눈치 채고 가볍게 탄성을 터트렸다.

“생각해 보니,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진 건 최근 몇 년 사이 일이었소.”

엘프들이 가진 능력으로 병을 고쳐나가긴 했지만, 낫는 건 그 순간뿐.

근래 얻은 작물과 식사에 섞여 들어간 마기는 식탁에 올라 엘프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매일같이 미량의 마기를 섭취해 온 엘프들은 전염병을 이겨낼 수 없었으리라.

‘벨리아누스의 저택에서 마기에 영향을 받은 건 포도주를 마실 수 없는 나이의 자녀들뿐이었어. 그나마도 아퀴르가 집 안의 식수를 늘 정화해 와서 그 정도였고.’

심지어 벨리아누스가 다스리던 마을은 피부병이 흉하게 생겼을 뿐.

시체를 태우거나 마족화가 된 자는 없었다.

유일하게 마족화가 된 건 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마기가 섞인 저수지로 갔던 아퀴르뿐이었다.

그가 정령의 힘으로 식수를 꾸준히 정화하지 않았다면, 벨리아누스의 마을은 더 심각한 피해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제프리와 엘린이 놀란 눈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린이었다.

“그동안 우리 음식을 먹고 복통이나 두통을 호소하던 엘프들이 늘었는데, 그럼 그 이유가?”

“으음. 그래.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준 게 오히려 문제가 됐다는 말인 것 같아.”

제프리가 말을 받으며 턱을 문질렀다.

“그런데 최근에는 포도주를 줬더니 토했는데…….”

이어진 제프리의 중얼거림에 답한 건 페르디키온이었다.

“당연히 그랬겠지. 이미 마기에 중독된 자에게 세계수의 힘은 거부하고 싶은 고통이었을 테니까.”

“어머나, 세상에!”

탄식을 터트린 엘린이 당황과 안타까움이 섞인 채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알음알음 들은 게 있기는 해요. 여보, 당신이 나한테 해줬던 말이었는데 이 이야기랑 딱 맞지 않아요?”

“으흠! 그렇지. 전쟁이 끝날 때, 세계수에 마족의 잘린 팔과 검이 박혔다던가? 흑마법이 걸려있어 뺄 수도 없다고 그랬지, 아마.”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벨리아누스가 놀라 되묻자, 제프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예, 벨리아누스 님. 이게 정확히 눈으로 본 자가 한 말이 아니고, 입소문으로 전해오는 걸 들은 경비가 지나가듯 말을 했던지라. 확인이 되지 않는 괴소문이야 여기저기 많기도 했고…… 저 역시 어쩌다 경비들이 몰래 이야기하는 걸 들은 처지라, 굳이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고 살았지요.”

실마리가 잡혔다고 느낀 일행들 중, 룬이 말했다.

“그럼, 세계수를 오염시키는 건 마족의 잘린 팔에서 나온 피겠네.”

“!”

마족의 피.

단 한 방울이라 해도 생명체를 죽이거나, 마족화시키는 독.

피는 마족의 일부분이며 강한 개체일수록 파급력이 상당했다.

이 정도로 사태가 커진 것을 보아, 필시 고위마족일 터였다.

“이거 안 좋은데…….”

룬이 난감함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뭣 때문에 그러는 거냐, 룬.”

상황을 진지하게 여긴 페르디키온의 말에 룬은 한숨을 얕게 쉬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숲의 인장을 지닌 엘프왕이 마족 측에 넘어간 게 아닐까 생각중이야.”

검은 머리 소년의 말에 인상이 와락 구겨진 페르디키온이 재촉했다.

“……자세히 말 해봐라, 룬.”

“마족의 잘린 팔에서 나온 피라 해도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지. 팔에 남은 피는 한정적이니 벌써 멈췄어야 정상이야. 그런데, 최근 들어 더 심하게 전염병과 마족화가 시작되었어. 이게 뭘 뜻하겠어?”

“그건…… 마족의 피가 더 진하게 흘러나왔다는 말이냐?”

페르디키온이 혐오스러운 듯 되물었다.

그때였다.

핏기가 싹 빠진 얼굴로 벨리아누스가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그 예상이 맞을 거요. 숲의 인장과 세계수를 레파논, 그 망할 마족 녀석이 차지했겠구려.”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운의 달 조각

“응. 아마 순서는 엘프왕이 먼저일 거야. 레파논은 정신에 간섭하는 게 특기인 마족이니까. 엘프왕을 손에 넣고 <숲의 인장>의 힘을 사용해 세계수에 간섭했겠지.”

룬의 대답에 이를 꽉 문 벨리아누스의 얼굴이 저승차사처럼 창백하게 굳어갔다.

“이 천벌 받을 놈!”

평소 화를 내지 않는 벨리아누스가 분노를 드러냈다.

그럴 만도 했다.

한 평생 마족과 목숨을 걸고 싸워 온 남자가 동족들과 자식들을 잃을 뻔했다.

심지어 그의 주군이 넘어간 상태.

그에게 마족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따로 없었으니.

‘당연히 피가 거꾸로 솟을 만하지.’

화가 난 벨리아누스를 말린 건 제프리와 엘린이었다.

“아이고! 진정하세요, 벨리아누스 님!”

룬은 벨리아누스를 진정시킬 역할을 제프리와 엘린에게 맡기고 생각에 잠겼다.

‘오행(五行)에서도 나무는 본래 생장을 뜻했지.’

룬은 ‘목(木)’ 속성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세계수는 마족의 기운에 맞설 정도로 크게 생장하고 강하게 뻗는 기운.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마족에게 이용당했을 터였다.

‘크리스티나가 알면 이거, 난리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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