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족을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드래곤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룬을 데려갔을 터.
이 생각을 한건 페르디키온도 마찬가지였는지 룬을 바라보았다.
“룬, 감당할 수 있는 거냐? 이 상황을 크리스티나 님께서 안다면 즉시 돌아오라 할 거다.”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직은 상황을 더 지켜봐도 될 것 같아. 마족의 진체(眞體)가 소환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거든.”
“알겠다. 하지만 엘프왕이 마족의 계약에 응했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걸 명심해라. 만약의 경우, 물의 레어와 연결된 장소로 즉시 이동해.”
마족이 소환되었다면, 이미 일대에 전조가 보였을 터.
마력을 읽는 능력이 뛰어난 룬이 그 전조를 놓칠 리 없었다.
페르디키온도 한 차례 귀환을 언급했을 뿐 당장 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진체가 소환될 정도라면 일이 커지는데.’
패배해버린 마족들은 계약이 아니면 대륙에 현현할 수 없었다.
마계에 쫓겨 난 그들이 다양한 종족이 사는 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허가와 대가’가 필요했다.
대륙에 사는 자의 ‘허가’
대륙에 현신하는 대신 치러야 할 ‘대가’
그리고 이 계약을 진행할 수 있고 마족을 소환할 수 있는 ‘계약자’ 자질을 가진 자는 많지 않았다.
대륙에 함부로 발 들일 수 없는 그들은 번거로운 과정을 모두 거쳐야만 겨우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마족의 팔이었다.
‘그게 전쟁 때 남은 레파논 진체의 일부라면…….’
신중해야 했다. 룬은 가볍게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걸 본 페르디키온이 눈을 찌푸리며 말을 걸었다.
“혹시라도…… 무모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무모한 생각이라니?”
입가에서 손을 뗀 룬이 되묻자 화룡족 소년의 눈이 강하게 부딪혀왔다.
“네 일족을 해한 원수라고 여겨서 복수를 하겠다던가.”
복수의 화신이 되기엔 룬은 마족과 직접적으로 얽힌 것이 없었다.
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마음 없어.”
“거짓은 아니겠지?”
“응. 무모한 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페르디키온은 반신반의한 눈치였다. 룬은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때, 벨리아누스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행동임을 어린 후계도 알건만, 나의 왕께서는 어째서 이런 사태를 두고 보신건지 모르겠구려.”
마른 손이 얼굴을 쓸었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벨리아누스에게, 룬은 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부분을 언급했다.
“벨리아누스, 과거에 왕을 모셔온 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걸 알아. 하지만 최근 겪은 일들과 당장 우리가 본 걸 떠올려 봐. 그게 엘프들의 왕이 만들 풍경인지.”
“!”
벨리아누스는 반박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명예롭게 죽여야 할지 고민하고
딸은 꽃피는 나이가 되기도 전에 스러질 뻔했다.
살이 썩어가는 동족들은 불신, 불안이 팽배하였고
동족들을 악마의 속삭임을 들으며 고통스러워 했다.
일순 탈력감이 든 그가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왕이시여…….”
얼굴을 감쌌던 손으로 회갈색 머리를 움켜쥔 벨리아누스.
모셨던 왕을 잃어버린 자의 모습은 바싹 마른 낙엽처럼 덧없어보였다.
‘머리가 복잡하겠군.’
그에게는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과거에 매여 있어선 바뀌어가는 미래에 대응 할 수 없는 법.
룬은 이미 알고 있을 사실을 일러주었다.
“예전의 엘프왕은 뛰어났을지도 몰라. 하지만, 벨리아누스. 당신은 엘프들의 목숨을 버리는 왕에게 엘프의 미래를 맡길 수 있겠어?”
“…….”
미래를 살아갈 엘프.
거기에는 벨리아누스의 아들과 딸 역시 포함 되어있다.
룬은 벨리아누스 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 차례 토닥여주었다.
“그 말이 옳소.”
긴 숨을 내쉬며 수긍한 벨리아누스가 눈을 감았다.
잠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룬은 벨리아누스가 이미 결단을 내렸음을 눈치 챘다.
엘프들을 아끼고 헌신하는 군주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면 잠깐은 시간이 있어. 마침 할 일이 있거든.”
“또 뭔가 생각해 낸 모양이구려.”
대답대신 은은하게 웃어보인 룬.
그는 벨리아누스를 두고 흑미와 페르디키온을 불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제프리와 엘린도 함께였다.
불려오면서도 제프리는 어찌 할 바를 몰라했다.
“이거 참, 어찌해야 하나.”
“그러게요. 우리같이 평생 요리만 해 온 엘프들이 무슨 도움이라도 될까 싶어요.”
“무슨 소리야? 지금 할 일이 엄청난 도움이 될 건데.”
룬의 말에 제프리와 엘린이 난감하게 눈을 굴렸다.
룬은 그들에게 할 일을 일렀다.
“저장고에 있던 음식들 중 세계수의 힘이 남아 있는 걸 가져올게. 그리고 내가 시범을 보이는 걸 잘 보고 만들면 돼. 그리고 흑미.”
“넵!”
“아까 만난 병사들에게 붙여둔 오식이를 통해 여기로 내려오도록 해.”
“알겠숩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흑미가 루비 펜던트를 한 손으로 쥐고 불의 정령, 오식이와 교감을 시작했다.
***
흑미가 불의 정령을 이용해 병사들을 불러왔을 때.
나머지 일행들은 룬이 고른 재료들을 이용해 묘한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약물에 하얀 진주를 하나 넣고. 중간에 이 향나무 판자를 넣고. 허브 쭉 깔고 반죽한 걸 올린 뒤 이렇게 푹푹 익히면 되는 거지요?”
야무지게 손을 놀리며 엘린이 솥단지 뚜껑을 닫았다.
그녀가 확인하듯 룬에게 묻자, 반죽에 약물을 부어 찰기를 확인한 룬이 대답했다.
“응. 그럼 쫀쫀한 감촉을 지닌 간식이 나와.”
“어머 신기해라. 뭐 이런 음식이 다 있담. 요즘 인간계에 유행이라도 하는 음식인가?”
포도주를 마시기 어려운 자들을 위해, 룬은 세계수의 힘이 느껴지는 재료로 간식을 만들었다.
백야의 눈물이 희석된 약수를 사용한 찜 요리였다.
‘이거면 마기도 제거되고 몸이 나을 약수의 효과도 보고. 꿩 먹고 알 먹는 셈이지.’
수증기가 빠져나가자 윤기 반지르르한 반달 모양이 나왔다.
옆에서 거들던 제프리가 완성된 걸 하나 집어올렸다.
“맛있는데? 꿀을 넣어서 그런지 달콤하기까지 해.”
자연스럽게 입 안으로 쑥 넣은 제프리가 쩝쩝 소리를 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둬서 쟁반 위에 깔아야지, 냉큼 주워 먹으면 어떻게 해요!”
엘린이 제프리를 나무라는 사이, 흑미가 신기한 듯 룬을 바라보았다.
“룬 님, 이건 이름이 뭐예요?”
순진하게 묻는 흑미에게 룬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생김새로 보면 만두나 송편과 비슷했다.
하지만 안에 든 재료가 치즈나 과일, 견과처럼 엘프들에게 친숙한 재료가 주로 들어가 있었다.
‘떡이라는 개념은 잘 모를 것 같은데.’
고민하던 룬은 보이는 그대로 말했다.
“행운의 달 조각이라 할까.”
“그러고 보니, 드워프 아저씨들이 만들어 준 반달 모양 정등이랑 비슷하게 생겼네요!”
흑미가 생글 웃어보였다.
이름을 들은 엘린과 제프리도 피식 웃었다.
“그래요, 그럼 이게 있으면 종종 보이던 이상해진 녀석들도 정신 돌릴 수 있다는거죠?”
엘런이 흥겹게 말하자 제프리가 팔짱을 끼며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좋아, 좋아. 잘 먹이는 데도 눈들이 퀭 해선 왜 그런가 싶었는데. 정신 차리게 해 줄 수 있겠어.”
“그러게요. 이번에도 꼼짝없이 당신이 후라이팬으로 후려쳐줘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미안하게도 다들 병이 든 거였잖아요.
“그러게. 우린 포도주 마시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지.”
“호호! 제프리 당신이랑 술친구로 만나서 결혼한 게 잘했다고 느껴질 날이 올 줄은 몰랐지 뭐예요?”
“술 아니어도 난 원래 매력적이야!”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제프리 씨.”
티격태격 하는 것 같으면서도, 쿵짝이 잘 맞는 부부였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아누스가 눈에 생기를 되찾았다.
평범한 요리사 부부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지키고 싶은 풍경이었다.
아니, 엘프 모두의 평화로운 일상을 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벨리아누스가 룬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개의치 말라며 룬이 고개를 저었다.
믿고 있던 것이 갑자기 변하면, 누구나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게 마련이었다.
중요한 건, 그 상황에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고, 대처할 수 있느냐 일 뿐이다.
‘간식 레시피 한번 일러줄 동안 자신을 추스린 게 대단한 거지.’
룬이 벨리아누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음은 정했어?”
벨리아누스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좋아.”
룬은 만들어져 나온 반달 모양 간식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 판을 만들기 시작한 남은 엘프들에게 당부했다.
“창고의 포도주에 내가 지닌 보물로 치료효과를 더했어. 그걸 기본으로 나누어 주되, 도저히 술을 마시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행운 달조각 간식을 나눠 줘.”
주의 사항에 더해, 룬은 각 층에 대한 정보도 함께 공유해 주었다.
지하에 마족화가 진행된 엘프가 갇혀있을 거란 이야기에 병사들과 요리사 부부 모두 놀라 입을 벌렸다.
“잘 알겠어, 영특한 꼬마야. 우리만 믿으렴!”
엘린이 당차게 주먹을 쥐고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이어 제프리도 주먹을 가볍게 쥐어 입가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어험! 물러날 수도 없겠군. 어차피 그들이 당하면 우리라고 무사할 리 없을 테니까. 안그런가들?”
“그렇습니다! 성의 경비로서 의무를 다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독려했다.
이제부터 할 일은 마기에 먹힌 엘프들을 회복시켜야 할 중요한 역할이었다.
‘대단한 영웅이 아닌 자들이 동족을 구하게 되는 순간이라.’
정령사나 드루이드. 마법사가 아닌 눈앞의 평범한 직업의 엘프들이 서로 엘프들을 구하자며 움직이는 모습.
룬은 이 순간이 엘프 후대에 전설처럼 화자 되리라 짐작했다.
엘프의 마지막
속으로 피식 웃은 룬이 이번엔 파랑새에게 눈짓을 보냈다.
“란드. 이 천보따리 안에 든 건 설탕과 백진주를 단 백야의 깃털이야. 이걸 성 주변의 해자에 뿌려줘.”
파다닥
날갯짓과 함께 몸을 ‘O’ 모양으로 한번 슥 돌려보인 파랑새.
이어 룬은 백야에게 고개를 돌렸다.
“란드와 듀라한을 데려와. 할 수 있지?”
“삐약!”
씩씩하게 대답한 백야가 하얀 가슴털을 당당하게 폈다.
하얀새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은 있군.’
사뭇 비장하게 보였지만, 백야의 생김새가 통통해 부푼 털이 귀여움을 더했다.
룬이 손을 내밀자 백야가 그 위에 앉았다.
우웅
마력을 움직이자 새의 발찌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흑미가 까만 귀를 쫑긋 세웠다.
“어! 백야 발찌가 반짝여요!”
“추적과 은신 마법이 담긴 거라서 그래.”
흑미의 물음에 대꾸한 룬이 손을 흔들어 새를 가볍게 띄웠다.
“어디 있든 내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거야. 우린 왕을 찾고 있을테니, 녀석들을 데려와.”
“백야, 힘내!”
백야에게 힘을 주고 싶었는지, 코 위에 하얀 전분 가루를 묻힌 흑미가 웃으며 응원을 보내왔다.
백야는 노란 눈을 반짝였다.
“삐약, 삐삐삐삐!”
파닥파닥
파다닥
하얀새는 힘차게 날개를 흔들며 의욕적으로 공중을 휙 돌았다.
의기양양한 표정과 더불어 자신 있어 보이는 눈빛은 긴장감 풀릴 정도로 귀여웠다.
‘대충 맡겨달라는 것 같은데.’
의욕이 과해 실수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나, 옆에서 함께 날고 있는 란드의 파랑새가 조용히 백야를 발로 툭 건드려 주었다.
“삐약?”
돌아보는 백야 주변을 란드의 파랑새는 느슨하게 날개를 흔들며 맴돌았다.
“삐삐! 삐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