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242)

‘역시 테이머인가.’

고작 파랑새의 모습임에도 퍼밀리어와 교감하는 모습이 제법 유능해보였다.

등 뒤에서 엘프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느끼며 룬이 천 보따리를 묶었다.

“자, 됐다. 이 양 쪽 끝자락을 하나씩 물면 돼.”

“삐약!!”

“…….”

란드의 파랑새가 날렵하게 부리를 움직였다.

텁!

새들은 고개를 쭉 빼고 양 쪽에 한 마리씩 천 끄트머리를 물었다.

그리고 여유롭게 고개를 치켜올린다.

‘경량화 마법을 걸어두긴 했지만, 괜찮겠지?’

룬은 그런 생각을 하고 백야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새 주제에 룬과 눈을 마주치며 의욕에 찬 눈빛을 보내왔다.

볼에 홍조라도 띤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얀새는 온전히 제 임무가 생긴 것이 무척이나 기쁜 듯했다.

“삑- 삑-.”

심지어 다물린 부리로 콧노래까지 부르며 즐거워했다.

란드의 퍼밀리어인 파랑새는 묵묵히 눈동자를 굴려보였다.

그러더니 뭔가 우습다는 듯 픽 콧숨을 쉰다.

새는 이내 문 앞으로 백야를 이끌었다.

“형, 문 좀 열어줘.”

룬의 부탁에 마침 문 가까이 있던 페르디키온이 문을 열어주었다.

파랑새와 함께라지만 단독으로 임무를 맡은 건 처음인 백야.

새는 긴장으로 털을 한번 바짝 세웠다.

그리고는, 파랑새와 보조를 맞춰 날며 빠르게 문 밖으로 날았다.

“벨리아누스, 성의 다른 엘프들은 여기에 맡기자. 엘프왕이 있을 법한 곳으로 안내해줘.”

벨리아누스는 엘린의 넉살에 달조각을 맛보고 있었다.

마기에 물든 엘프들을 구할 음식이기 때문일까.

그의 표정은 제법 신중했다.

“이런 맛이군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벨리아누스.

마치 전장에 나서기 전, 의식을 치루는 듯한 얼굴이었다.

중년의 엘프는 엘린과 제프리, 켐벨과 메린에게 공들여 시선을 나누었다.

“엘프들을 잘 부탁하오. 갑시다.”

“알겠습니다!”

켐벨이 씩씩하게 대답한 그때였다.

우르르르!

우르르르릉!

성이 또 한번 불길하게 진동했다.

마치 제 몸 안에 원치 않는 자라도 들어와 있는 듯.

혹은, 재촉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지간히도 우리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성에 가득 찬 마기를 정화하고 엘프들을 회복시킬 간식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엘프들에게 대항할 방법까지 알려주고 다니니 달갑지 않을 건 당연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다니니 무시하기 힘들기도 하겠지.’

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여유는 없었다.

성의 울림은 시간 싸움의 신호탄이기도 했으니까.

“바로 움직입시다.”

위기를 느낀 벨리아누스가 바람의 길과 윈드 러너의 축복을 사용했다.

탕!

발구름이 바람으로 된 통로를 밟았다.

접견실, 왕성 연회실, 집무실, 교습방, 정원.

다양한 곳을 찾아다녔으나, 왕은 보이지 않았다.

“왕께서 다니시는 공간은 다 찾아본 것 같은데, 대체 어디에 계시는 건지.”

더는 떠오르는 게 없는 듯 벨리아누스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네 녀석이 모르면 누가 안다는 거냐? 잘 생각해 봐라.”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좁히면 조언했다.

룬은 생각에 잠겼다.

‘마기가 짙어서 장소를 특정 짓기가 어렵군. 세계수와 교감하고 싶을 만한 장소라면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남은 건…….’

왕의 특징을 생각해 본 룬이 어둡게 눈을 반짝였다.

“공주의 흔적이 남은 장소는?”

“공주님이라면, 제뉴아르 공주님의?”

벨리아누스의 되물음에 룬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공주의 아버지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않을까.”

마족은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단순히 재물과 권력이라면 좀 더 알기 쉬웠을 터다.

하지만, 흔적을 찾기 어렵다면 왕 개인적인 욕구와 관계 되었을 터.

보통 주변 가족부터 검증해봐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벨리아누스의 말은 다소 회의적이었다.

“으음. 왕께서 공주님을 아꼈다는 건 맞지만…….”

조금 망설인 벨리아누스가 말을 이었다.

“자식으로서 사랑했냐면, 아니오. 그분은 냉혈한 분이었소. 나 역시 자식 보기에 부족한 아비였지만 왕은 그보다 더했지. 엘프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죄라 여겼으니.”

‘그런 자가 엘프들 다 죽이는 짓을 하고 있다니. 참 잘하는 짓이네.’

돌아도 적당히 돌아야지.

그렇게 생각한 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말은 안했지만 벨리아누스 역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비틀린 자가 가장 원할 만한 것이라.’

마족에게 잠식 당한 자는 그 마족의 특징과 연관된 행동을 보이게 마련이었다.

전생에 귀신과 악령들을 상대했던 그였다.

상대는 술, 마약, 여자와 노름 따위로 지성체의 정신을 주무르는 데에 전문적인 자.

룬은 그가 시도할 가장 최선의 방법을 상상해보았다.

룬이 입을 떼었다.

“벨리아누스. 솔직하게 말해 봐.”

은회색 눈이 룬을 향했다.

“무엇을 묻고 싶소?”

“엘프왕이 란드와 공주의 결혼을 허락한 이유.”

“음.”

벨리아누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손으로 턱을 문지른 그가 침묵 속에서 룬을 바라보았다.

“기밀이오만.”

“그럼 이 순간은 엘프의 마지막이 되겠지.”

천진한 아이처럼 말하기엔 주제가 무거웠다.

벨리아누스는 처음으로, 이 작은 후계자의 속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단 하나, 룬의 말이 사실이라는 건 확실했다.

“자세히 말 해주길 바라오. 왜 그 기밀을 듣고 싶어하는지.”

벨리아누스의 말에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는 ‘하이 엘프’라는 특권계층 엘프들이 있지?”

“그렇소만.”

일반적인 엘프와 달리, 우수한 능력과 혈통을 지닌 자들.

‘하이 엘프’는 같은 엘프 중에서도 격이 다른 존재였다.

“엘프 공주였던 제뉴아르는 드래곤과 사랑을 한 순간부터 그녀는 ‘하프 엘프’가 돼.”

“……그렇소. 이종족과 피가 섞인 혼혈이 되는 것이니.”

목소리 톤이 낮아진 벨리아누스가 한숨을 삼켰다.

단순히 외국의 누군가와 혼인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엘프조차 암묵적으로 낮게 보는 ‘하프 엘프’.

가장 귀한 혈족을 드래곤의 수호와 맞바꾼 일이었다.

‘보통 이런 걸 ‘거래’ 혹은 ‘장사’라고 하지.’

룬의 붉은 시선이 그의 얼굴과 호흡, 간단한 손동작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해냈다.

절제된 호흡과 미미하게 움직인 손가락 근육.

진지하게 상대를 바라보는 눈.

속내를 감추고 여유를 제어하는 숙련된 모습이었다.

“‘하프 엘프’는 같은 엘프들 중에서도 좋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고 알고 있어. 그런데도 허락한 이유는 드래곤인 란드의 ‘수호 언령’ 때문에 감수한 거라는 소리지. 그리고 란드는 혼자가 아니야.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드래곤 장로 중 한명이 란드의 부탁을 기다리고 있었어.”

붉은 시선이 가만히 마주한 중년의 엘프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벨리아누스는 어린 어둠 후계의 눈 안에 깃든 어둠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란드는 격이 낮아졌을 뿐 여전히 ‘갈색 드래곤’이야. 엘프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란드를 이용해 란드와 친분이 있는 다른 드래곤을 통해서라도 수호를 부탁할 수 있었어.”

심지어 마족을 막기 위함이라면 크리스티나는 못마땅해 하면서도 분명 손을 빌려줬을 성정이었다.

하지만 엘프왕은 란드가 지닌 숲의 인장을 가져가고, 그에게 더 이상의 볼 일이 없다는 듯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란드가 오지 못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애초에 ‘드래곤의 수호’가 목적이 아니야. 제뉴아르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한 건.”

물끄러미 봐 오는 룬과 벨리아누스의 시선이 얽혔다.

여태껏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 보지 못한 페르디키온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흑미는 침묵이 주는 무거운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페르디키온 가까이 섰다.

“세계수는.”

시간이 촉박했기에, 고민을 길게 할 수 없었던 벨리아누스.

그는 엘프왕과의 서약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세계수는,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있소. 그리고 엘프왕이 정해지는 기준은, 늘 한 가지. 세계수의 예언을 들을 수 있는가, 요.”

엘프왕과 세계수의 예언.

둘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이야기는 이미 나온 셈이었다.

“란드가 세계수의 예언과 관계되었다는 소리야?”

룬이 살짝 커진 눈으로 묻자,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 역시 왕에게 단편적으로 전해들었을 뿐이나 확실했지. 허나 그 예언을 들은 후 내게 상담을 청해왔으니 거짓은 아니었을 거요.”

룬은 팔짱을 끼고 벨리아누스를 바라보았다.

“다 말해줘. 그때 뭘 들었던 건데?”

우르릉!

성의 진동이 은은하게 다시 울렸다.

벨리아누스가 바싹 마른 입술을 열고 말을 이었다.

“두 가지 미래였소. 엘프를 지키는 대신 세계의 위기에서 등을 돌리게 되리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은회색 눈이 어둑해졌다.

그 시선은 단단히 굳어버린 바위처럼 딱딱해보였다.

“위기에서 세상을 지켜내는 대신, 엘프족 대부분이 죽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 죽음에는 엘프왕의 목숨이 포함되어있었소.”

이어진 말은 룬과 페르디키온에게도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엘프 대부분의 존속과 세계의 위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양자택일의 예언이었다.

벨리아누스가 말을 이었다.

“다만.”

“다만?”

페르디키온이 재촉하듯 물었다.

“후자의 경우 제뉴아르 밀레. 즉, 우리의 공주가 스러진 엘프를 오랜 시간에 걸쳐 다시 회복시키리란 예언이었소. 이제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말이오. 그리고 엘프왕께서는 그 방식에 대해 무척이나, 반대한다는 듯 치를 떨곤 하였소.”

쓰디쓴 독을 끌어올리는 듯 벨리아누스의 표정은 쓰게 구겨졌다.

“하이 엘프의 개념이 사라지고 누구나 평등해지는 새로운 문화를 품게 된다는 예언이었기 때문이었지. 그래서야 흔한 인간과 다를 것이 무어냐며, 분노를 성토하시곤 하였다오.”

살아갈 시간을 위해

모셨던 왕의 치부를 입에 올리는 것이 불편한 듯, 벨리아누스가 미간을 구겼다.

세계수가 제시한 미래 두 가지.

엘프를 지킨다면 세계를 위기에 손대지 않게 된다.

혹은, 세계를 위기에서 구하려 한다면 엘프 대다수가 엘프왕과 함께 죽는다.

벨리아누스가 듣기엔 어느 쪽도 함부로 손들기 어려웠을 터였다.

“당시의 나는 왕께서 엘프들 존속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여겼소. 실제로, 마족과의 전쟁 때 종종 선두에 서 전쟁을 이끄셨지.”

때때로 벨리아누스는 엘프를 옹호하고 싶어 하는 면모를 보여왔다.

팔을 안으로 굽는 법.

그를 지금 와서 탓할 생각은 없었으나, 룬은 불편한 시선을 드러냈다.

“의심스럽지 않았어? 어쩌면 예언을 전부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설마 그러리라곤 생각지 못했소. 엘프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의논해 온 만큼, 설마 거기에 거짓이 있으리라곤…….”

“제정신이냐!?”

참지 못하고 일갈하듯 외친 페르디키온 심정이 이해되었다.

엘프왕에 대한 설명을 들은 룬 역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온전한 진실은 아니었겠군.’

벨리아누스는 능력도 있고, 엘프들을 위한 마음과 신념이 굳었다.

그 신념은 때론 맹목적이기까지 했다.

그게 문제였다.

과한 믿음은 아집이 되어 벨리아누스의 눈을 가렸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룬이 봐 온 엘프들은 의존적인 면모가 강한 치들이었다.

좋게 보면 순수하고 착하지만, 반대로 안 좋은 징조도 좋은쪽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 단점으로 인해 안 좋은 것들을 잘 인지조차 하지 못하며, 기피하고 외면하기도 쉬웠다.

룬은 고개를 약간 더 들었다.

“엘프 왕은 아마…… 속내를 제대로 말하지 않았을 거야.”

페르디키온이 룬을 홱 돌아보았다.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왕을 의심하고 제지 할 자가 없었잖아. 당연히 그럴 확률이 높아.”

벨리아누스는 그가 들은 예언을 곱씹어보았다.

“허나 예언은 틀리지 않았소. 물론 다른 일족들에게 면목은 없으나 거짓을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소.”

제뉴아르 밀레가 죽었다.

그리고 엘프 대부분은 살아남았다.

그 말은 엘프 대부분과 지배층을 유지하는 걸 택했다 볼 수는 있었다.

비록 왕의 선택이 이기적이었을지언정,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미래를 안다는 이점을 살려서 적어도 더 괜찮은 방식을 택할 수는 있었어.”

룬의 대답은 개운치 않은 무언가가 더 있음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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