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242)

벨리아누스는 알고 있던 중요한 것들이 깨져가는 것을 예감했다.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불안감이 커졌다.

“그럼, 어둠의 후계께서 생각하는 건 무엇이오.”

룬은 차분한 시선을 들어 흑미를 보았다.

만약 흑미가 좋아하는 짝을 만나고, 그 후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면.

모든 일이 끝난 후 흑미가 안타깝게 함께 하지 않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어찌했을까.

“엘프왕이 한 걸 봐.”

룬은 생각한 바를 하나씩 입에 올렸다.

“결혼을 허락한 이유조차 공주의 직계를 수호하겠다는 언령을 약속 받은 뒤였어. 전쟁 때 앞서 있던 모습? 드래곤의 수호 언령을 약속받았는데 두려울 것이 없겠지. 벨리아누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드래곤의 언령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야. 드래곤으로서의 능력과 삶을 걸고 하는 계약이지. 란드는 엘프왕에게 화살 하나라도 닿을 것 같다면 몸을 던져서라도 막았을 거야.”

엘프왕의 본성을 감각할수록, 룬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어남을 느꼈다.

“그만한 보호를 약속 받고 앞에 나선 건 용기도 희생도 아니야.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행동이지.”

“……!”

벨리아누스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지닌 충심은 전쟁에서 왕이 앞장서서 엘프들을 이끈 선봉장으로서의 면모를 보며 생긴 것이다.

그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영웅들 못지않았으며, 드래곤의 호의까지 얻은 위풍당당한 모습을 동경했다.

하지만 그게 모두, 미래를 알고 드래곤의 수호로 그 자신이 무사할 것을 알기에 할 수 있었다니.

몇 초 뒤, 벨리아누스가 겨우 입을 떼었다.

“변명 같겠지만…… 상상도 하지 못했소.”

룬 역시 입에 올릴수록 불편하고 씁쓸했다.

“벨리아누스, 당신은 왕과 반대의 성정을 지녔으니까. 당신은 엘프로서의 긍지를 지켜 명예로운 죽음을 택해야 한다는 걸 이미 내 눈앞에서 증명했지.”

마족화가 되어가던 아퀴르를 죽이려 들었던 때.

끝의 끝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 아들을 지하에 가둬놓았던 그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마족이 되어 사람을 해치며 살게 두느니, 숲의 엘프로서 죽음을 택해야 한다 생각한 자였다.

평생 마족을 퇴치하며 산 그 답게 어찌보면 지독하고 한편으로는 절대로 마족에게 넘어가지 않을 선택이었다.

”누구나 당신처럼 생각하고, 엘프의 명예와 긍지를 귀하게 여기지는 않아. 엘프왕이라 해도 당신과 같은 성정을 지녔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그 독단 속에는 마족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욕망이 그득했다.

그렇기에 세계수에 남겨진 마족의 꾀에 넘어가 이 상황을 초래한 건 엘프왕 본인이었다.

페르디키온이 못마땅한 눈치로 벨리아누스를 바라보며 평했다.

“뭐 눈에 뭐만 보인 꼴이었군.”

룬은 얕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지. 우리 드래곤은 다양한 종족을 만나는 유희를 반드시 다녀오게 되어있지만, 원래 엘프는 다른 종족과 교류가 전혀 없다 시피 하니까. 엄청나게 닫혀있었잖아.”

닫힌 관계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한정적인 경험을 해 온 이들이 지닌 고질적인 특성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끼리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일도 무척 중요했다.

누구나 그렇게 원하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행복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당연히 누군가는 불행을 원하는 자도 있게 마련이다.

“크리스티나가, 그러니까. 내 보호자가 그랬거든.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다고. 아마 그 말은 세상은 이해하기 힘든 자들까지 품고 있을 만큼 넓다는 말이었을 거야.”

우르르릉!

쿠르릉!

성 내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났다.

주변에 불길한 기운이 돌며 마기가 위액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괴로워하는 일행들을 위해 룬은 어둠의 힘을 끌어 주변에 막을 쳐 주었다.

심경이 복잡해진 벨리아누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란드는…… 나의 왕에게 이용당한 후 버려졌을 뿐이라는 것이구려.”

“그렇지.”

“허어…….”

감탄스러울 만치 깔끔한 꼬리 자르기였다.

이용가치가 다했다 여겨진 란드를 버리기 얼마나 쉬웠을까.

아무리 착한 성정이라 해도, 전쟁을 겪은 후 성인군자가 되는 자는 흔치 않다.

엘프왕은 그저, 분노와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을 엘프들 앞에 란드를 던져놓기만 하면 되었다.

지친 엘프들에게 씹고 뜯길 좋은 미끼가 되어주었을 테니까.

“그런 지경이 되었음에도 언령에 묶여 엘프를 보호해야 하는 처지라는 사실이 참, 바보 같아졌지.”

반쪽짜리 드래곤이자, 드래곤일 수 없어진 란드.

하지만 그게 철이 없어보였을지언정 엘프왕의 노예처럼 살아야 할 이유는 아니었다.

문득 크리스티나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룬에게 말했던 드래곤답게 자유롭게, 멋지게 살아가라는 이야기.

종족은 드래곤이나 온전한 드래곤의 삶을 잃어버린 란드의 일을 보았기 때문에 해 준 말이리라.

“예언이 결과를 정해두었다 한들, 예언을 이뤄나가는 과정은 엘프왕이 고를 수 있었을텐데.”

룬의 말 하나하나가 벨리아누스의 양심을 들쑤셨다.

벨리아누스의 얼굴이 점차 죄인의 그것처럼 변해갔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서 그는 가족들과 행복했고, 주민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선망을 받았다.

전쟁이 끝났다며 함께 축하하고, 축배를 들었다.

아내와 함께 포근한 잠들었고 따뜻한 정을 통해 치유받기도 했다.

냉혈하다 여겼지만, 결단 있고 전쟁을 앞장 서 뛰었던 왕과 함께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경험을 자랑스레 식탁에서 나누었다.

그리고 그 생활의 바깥에, 엘프들의 경멸을 받으며 사막으로 쫓겨 난 란드가 존재했다.

“수호의 언령을 지키지 못한 란드는 지금 해츨링인 나나 페르디키온보다도 격이 낮아. 왕은 쓸모를 다했다고 여겨 란드를 공주와 왕자가 될 아이를 죽게 만든 드래곤으로 낙인 찍고 추방했어.”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룬은 란드의 처지가 다소 안타까워졌다.

“약속 때문에 숲의 일족으로서 당연히 지녔던 숲의 인장까지 내어줘야 했고, 엘프도 드래곤에도 섞이지 못하게 됐지. 비겁한 결정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최소한의 도의는 지킬 수 있었잖아.”

벨리아누스는 묵묵히 들었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몰랐다지만 사막에 버려진 란드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은 것 또한 그의 죄였다.

잠자코 이야기를 곱씹던 벨리아누스가 입을 열었다.

“왕이 되겠소.”

이번 말은 그 무게가 달랐다.

어린 해츨링의 말이라 넘기기에는, 때때로 왕이 보여왔던 그 면모를 너무나 정확히 읽어냈다.

그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조차 경계해야할 때였다.

“그저 엘프들만이 아닌, 엘프에게 호의를 베푼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회개하며 살아갈 것이오.”

엘프들 중 누구도 떠올리지 못하며 누린 평범한 생활의 진실.

벨리아누스가 이제라도 알게 해 준 드래곤 족의 후계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의 자녀와 후손들에게 우리가 외면했던 죄를 이야기해 주고, 위기를 외면해 온 우리가 어떠했는지 기록을 남길 것이오.”

상상도 하지 못한 가장 치욕스러운 일을 상처처럼 남기겠다는 말.

그건 벨리아누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철컥! 철그럭!

“삐이약!”

란드와 듀라한, 그리고 백야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벨리아누스가 란드를 돌아보았다.

“?”

란드는 오던 걸음을 멈칫하고는 벨리아누스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조금 갸웃 하고는 다시 일행들에게 다가왔다.

“의논이라도 하던 중이었나?”

느리고 나른한 말투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초연함.

한때 공주와의 사랑에 행복해했던 청년은 그에게 쏟아진 일행들의 시선에 의문스러워 했다.

그리고 페르디키온이 성큼성큼 다가가 란드의 등을 퍽 쳤다.

“미련한 놈.”

“……갑자기 무슨 말인지.”

영문 모르는 란드에게 벨리아누스가 다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오. 이 말만으로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대의 어려움과 고난. 그 모든 것들을 모르고 산 나로서는 이 말밖에 할 수가 없구료.”

“대체…… 왜 이래?”

“란드 님, 흑미가요. 나중에 제일 맛있는 딸기 파르페 드릴게요.”

흑미와 페르디키온. 그리고 벨리아누스를 본 란드의 시선이 룬에게 옮겨졌다.

“꼬마야.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 해 주지 않겠니.”

룬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우선은 잘됐다고 해줄게. 자세한 이야기는 엘프왕과 마족부터 처리하고 해도 늦지 않으니까.”

비록 늦었지만, 그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적응하기 어려운걸

룬의 말에 란드는 고개를 조금 기울여보였다.

사르륵

갈색 머리카락이 보드라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가 갈색 드래곤이 된 후 익숙해져 있던 불유쾌한 시선들.

경계, 불편, 경멸, 약간의 죄책감 혹은 분노.

그랬을 터인데, 여기 모인 자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호의와 동정이었다.

란드가 룬에게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꼬마가 뭘 해둔 건지…… 적응하기 어려운걸.”

의아한 눈을 해 보이는 란드에게 흑미가 분홍 장밋빛 눈을 반짝였다.

“란드 아저씨가 당연히 가져야 했던 것들을 되찾을 시간이라고 했어요! 속상하고 슬퍼하는 이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 들이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남편에게 보내야 할 안타까움과 걱정.

엘프들을 위해 헌신했던 자에게 가져야 할 감사.

배신당했을 때 진실을 함께 알아보아 줄 정의.

버려져있던 란드에게 필요 했던 것들을 이제라도 돌려받을 시간이었다.

“아프면 병나요. 참기만 하면 더 아프구요. 사고를 당했으면 쉬어야 하고, 간호도 필요해요!”

란드는 흑미가 간단간단하게 이야기하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아이의 단어는 단순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걸 전달하기에 큰 부족함은 없었다.

“……나는 그저, 쫓겨난 이유가 공주와 자식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여기고 살았었는데.”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 란드가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지키지 못한 순간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세월 사이사이에 스민 눈물과 한숨.

거기에 새겨진 죄책감이 욱신거려왔다.

위로 받아도 괜찮다는 말이 가뭄처럼 갈라진 마음에 비처럼 스몄다.

룬은 그런 란드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그럼 엘프들의 왕이란 작자가 부른 재앙. 마족이 어디에 있을까.’

목적이 뚜렷하니 묘한 의욕이 생겼다.

엘프왕이든, 마족이든. 있는 곳은 단순한 장소가 아닐 터.

그렇다고 왕성이 커서 모든 곳을 뒤지려면 며칠이 걸려도 모자랄 터였다.

최악의 경우 자칫 술래잡기처럼 그들은 도망치고 룬은 쫒기만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닭 쫒는 개처럼 될 생각은 없었다.

‘빠르게 놈들을 찾을 만한 방법이 없을까?’

문득, 룬의 시선이 듀라한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머릿속에 섬광처럼 생각이 스쳤다.

“듀라한.”

철컥!

듀라한이 룬을 향해 투구를 내려보였다.

마왕의 기사였던 듀라한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룬이 운을 떼었다.

“엘프왕은 마족과 깊게 연결되어있어. 그닥 기분 좋진 않겠지만.”

몸을 숨긴 마족을 찾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할 터.

룬은 듀라한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마기가 흘러나오는 근원이 있을 거야. 감지해볼 수 있겠어?”

철컹!

자세를 바로 세운 듀라한이 녹빛 안광을 번뜩였다.

검은 기사는 큰 갑옷의 가슴 부분을 훅 부풀리며 음울한 기운을 끌어올렸다.

한때 마왕의 기사였던 듀라한.

당시 그는 마왕과 다닐 만큼 격이 높았다.

최근 마기를 조금씩 흡수하며 마기를 다루는 데에도 익숙해진 그에게서 자신감까지 엿보였다.

스웅!

녹빛 안광의 음울함이 아닌, 날카로운 살의가 자리했다.

과거 마왕과 함께하던 때가 상상되는 무시무시한 검붉은 핏빛.

절도 있으면서 음산한 분위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철컹!

듀라한의 손이 복도의 끝을 가리켰다.

가까웠다.

“저기라고?”

페르디키온이 영 믿기 어렵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룬 역시 의문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짜투리 자리에 만든 창고로, 도저히 왕이 갈 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곳인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룬은 문을 여는 듀라한 너머를 살폈다.

얼핏 봐서는 창고로 보였다.

불길함을 가진 거대한 왕성의 방과 응접실과 달리 무척 작고 초라한 방.

선반에는 어린 아이들의 장난감과 동화책이 꽂혀있었다.

“와아. 왠지 귀여운 물건들이 많아요.”

흑미가 춤추는 크리스탈 요정이 장식된 작은 오르골을 보며 신기해했다.

청소만 간신히 되어있는 작은 방은 일행들이 들어가자 방이 꽉 찼다.

페르디키온이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룬, 느낌이 좋지 않다.”

“……그러게.”

전투에 익숙한 자가 느낄 수 있는 묘한 시선.

그를 느낀 건 룬과 페르디키온 뿐만이 아니었다.

룬은 흑미를 자신의 뒤로 물렸다.

철그럭!

듀라한이 고개를 휙 돌렸다.

노려본 곳에는 거울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하얀 토끼인형이 있었다.

조용하던 토끼가 듀라한의 시선을 받자 눈동자를 스르륵 굴렀다.

“힉!?”

흑미가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눈이 동그랗게 된 여우수인을 돌아본 토끼가 솜과 천으로 싸인 앞발을 흔들어보였다.

반갑다는 인사였다.

즉시 페르디키온이 손에 불을 일으켰고, 룬은 그런 페르디키온의 손목을 잡았다.

“놔라, 룬.”

“안 돼. 형은 지금 저 토끼를 태워버리려는 거잖아.”

“당연하지. 저런 수상한 걸 그냥 둘 필요 없다.”

‘이 자식이. 이 좁은 방에 불 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불의 저항이 있다지만, 혹시 모를 단서나 마족의 함정을 건드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룬은 짧게 위험을 언급했다.

“그러다 함정이면 어쩌게.”

“그럴 리 없다.”

묘하게 단호하고 자신감이 있어보였다.

룬은 분위기도 잠시 잊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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