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어떻게 아는데?”
“왜 모르나? 보면 아는 걸.”
“…….”
할 말을 잃은 룬이 페르디키온을 보고만 있자, 붉은 머리의 소년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설명을 덧붙였다.
“기괴해 보이긴 하나, 마기에 물든 인형일 뿐. 움직이고 있다 해도 그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 ‘움직임’에 의도가 있다면 미리 차단해 버리는 편이 나을 거라 여겼다.”
룬은 주변에 있는 장난감을 쭉 둘러보았다.
종이로 접은 거북이, 새, 고양이 같은 동물들.
책상 위에 있는 털이 다 빠져가는 깃펜.
작은 통 같은 물건 하나하나에 스민 마기가 느껴졌다.
드드드드!
마치 페르디키온의 말에 반응하듯 물건들이 제자리에서 떨었다.
“형 말은 알겠어. 그렇다면 이 방법을 쓰는 편이 나을거야.”
동시에, 룬은 흑미의 양 손을 들어 귀에 대어주었다.
“다들 귀를 막아.”
어느새 훅 부푼 가슴을 한 듀라한이 검은 입을 벌렸다.
뱃속에서 흘러나온 숨이 음산한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흐어어어!
유난히 낮고 소름이 끼치는 소리.
자잘한 인형과 장식물, 공중에 막 뜨려던 종이학 따위가 기절하듯 힘없이 제자리에 떨어졌다.
‘마기를 흡수해서인가. 소리는 크지 않지만 효과는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최근 <어둠에 물든 향기상자> 덕분에 행복하고 좋은 느낌을 많이 가져본 듀라한.
마기를 손에 넣은 그는 더 절망적인 울부짖음을 흘렸다.
룬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듀라한을 바라보았다.
‘그저 포효하던 짐승 같았는데, 이젠 낮은 으르렁거림으로 상대를 제압할 줄도 알게 됐군.’
꼭 칼을 휘두르는 놈만 무서운 게 아니다.
때론 등 뒤에 칼을 숨기고 가만히 지켜만 보는 자도 두려움을 주었다.
‘제법이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힘을 조절할 줄 알게 된 듀라한.
룬은 그의 성장을 눈여겨 본 후, 거울에 시선을 던졌다.
거울에는 여전히 이 방이 비쳐 보였다.
“뭔가 있소.”
벨리아누스가 말하며 어느 새 손에 쥔 자신의 스태프를 거울에 겨눴다.
달빛이 한 차례 거울을 스쳤다.
일렁이는 검은 연기.
그리고, 연기가 사라진 거울 속에 가면이 떠 있었다.
하얀 가면에 그려진 검은 초승달 모양의 두 눈과 입.
그 아래 그려진 보라색 별.
웃고 있으나,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거울 너머에 흰 장갑을 낀 손이 둥실 떠올랐다.
- 다들 미색이 제법 출중하군.
하얀 장갑손이 글자를 만들어보였다.
그 말을 이해했다는 의미로, 일행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미친 자를 보는 얼굴이 되었다.
흑미만 눈을 깜빡이며 물어왔다.
“미색이 무슨 말이에요? 다들 표정이 이상해요.”
순수한 물음에 룬은 조금 난감했다.
‘이걸 설명 해 줘야 하나.’
어린 생명체에게 영 해로운 영향이 가득했다.
하긴 마족이 그런 걸 신경 쓸 필요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룬이 설명 해주었다.
“……얼굴이 예쁘다는 뜻이긴 한데, 좋아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으으음.”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본 흑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흑미 이거 알겠어요. 예쁜 꼬마 아가씨, 사탕 줄 테니 아저씨 따라올래? 라고 물은 거 맞죠?”
“!”
‘저건 또 어디서 들었어?’
룬의 의문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흑미는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척 꼈다.
“빨간 모자 아가씨 동화책에서 봤어요. 하지만 흑미는 맛있는 사탕을 주시는 크리스티나 님이 있구, 훨씬 잘생긴 룬 님도 있어요. 이쁘다고 칭찬 해 주는 제드 아저씨도 있구요!”
그러더니 흥, 하고 당차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저런 거엔 안 넘어가요. 흑미는 하나도 아쉬운 게 없는걸요!”
그러자 하얀 장갑이 하나 올라가 가면의 웃는 입가에 대고 들썩였다.
마치 웃는 것처럼.
흰 장갑 손은 수화하듯 손으로 글자를 만들어 보였다.
- 재미있는 아이로군. 심지어 그 광녀, 크리스티나와 친해보이다니.
장갑은 끔찍하다는 듯 손사래를 쳐댔다.
- 내겐 유감스럽지만 걱정 안 해도 된다. 너희에겐 다행히도 나 역시 내 낙원에 골드 드래곤의 장로가 오는 건 질색이라서 말이야.
마치 불량배를 쫒아내듯 장갑 낀 손이 훠이훠이 손짓을 했다.
‘아무래도 이 마족에게 광녀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모두 지닌 모양이지.’
룬이 생각하는 사이 흰 장갑들은 다른 문장을 손으로 만들어냈다.
- 우린 서로에게 흥미가 있으니 대화나 하자꾸나. 이 대리자가 너희를 나에게 인도할 테니.
거울 너머 하얀 장갑손이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빠져나왔다.
샤샥
기교를 섞은 손짓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착
하얀 장갑손에 묘한 녹색 봉인이 찍힌 초대장이 인원수대로 들렸다.
가면이 고개를 기괴하게 흔들며 초대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그 초대장을 노려볼 뿐, 손 대지 않고 중얼거렸다.
“마족이 만든 공간으로의 초대라니. 기분 더럽군.”
“그러게.”
룬은 태연히 대답하며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괜찮겠냐?”
“응. 맨티코어를 잡으려면 맨티코어가 있는 굴에 가야하는 법이잖아. 우리라면 어떤 상황이든 ‘빠져나갈’ 수는 있겠지.”
“!”
그렇게 말한 룬이 슬쩍 페르디키온에게 시선을 주자, 화룡족 소년이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눈치 빠르게 룬의 말한 의미를 이해한 페르디키온 역시 초대장을 집었다.
룬은 듀라한 등에 매인 배틀 액스, 파라리엄을 살폈다.
이 성에서 다시 봤을 때부터 말 한마디 없는 것이, 잠이라도 든 것 같았다.
‘좋아. 눈치 빠르게 감각을 차단했나보군. 마기가 짙어 아예 말 한마디 못 할 상황이겠지.’
비록 제드의 초대장은 없었지만 듀라한의 무기 취급이니 상관없긴 했다.
다른 이들도 초대장을 나눠 받는 동안 룬은 방을 둘러보았다.
납치된 줄
다양한 소품들과 시간의 흔적이 남은 가구들.
그 중, 룬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책상이 있었다.
그 위를 살피던 룬은 나무색과 다른 붉은 자국을 살폈다.
‘물감, 혹은 핏자국……?’
그 때였다.
톡.
먼저 초대장을 받은 란드가 손가락으로 룬의 어깨를 건드려왔다.
“?”
돌아보는 룬을 보며 란드가 입을 움직였다.
위험해. 라고.
명백한 경고였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 할 수 없다는 말이군.’
초대장을 만져본 란드는 마족의 힘을 느끼고, 그의 능력 밖의 일이라 여겼다.
그는 타 종족을 배척하는 엘프들의 문화에 끼어들 수 있는 유일한 드래곤.
그리고 크리스티나에게 해츨링들을 부탁받은 자였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들어갔다간 란드의 처지가 곤란해질 터였다.
‘란드만 괜찮다면 안에 들어가서 직접 대면해 보고 싶었지만…….’
룬은 이해했다는 의미로 란드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에서 크리스티나가 줬던 노란 마법석을 꺼내 발동시키고 책상 구석에 슬쩍 올렸다.
‘아쉽지만 이걸로 끝내야겠군.’
속마음을 감춘 룬이 빙글, 몸을 돌려 가면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룬이 가면에게 다가가 손에 든 초대장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시선을 끌었다.
“백야는 불사조야. 빛과 불을 품은 신성한 새지. 속성이 이런데, 네 초대에 응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는걸.”
막 안내하려던 가면이 얼굴을 기울였다.
- 그 새가 불사조였다니. 평범한 새가 아니라 여겼지만…… 사실이라면 아주 흥미롭군.
싸구려 연극처럼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하얀 장갑이 손으로 글자를 그렸다.
초대장을 살피며 룬이 재차 입을 열었다.
“맞아. 그런데 마족이 만든 공간이라면 백야가 함께 들어갔을 때 괜한 피해를 볼 수 있잖아? 게다가 흑미는 본체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까지 한걸.”
능력이 의심스럽다는 듯 어조를 바꾼 룬이 떠보듯 말을 흘렸다.
“먼 곳에 본체가 있어도 문제가 없으려나.”
하얀 장갑손이 살짝 주먹을 쥐었다 펴며 탁탁 박수를 쳤다.
-잔망스럽긴. 문제 없다. 그 초대장을 들고 가진 마력을 발동하기만 하면 되니까.
무척 훌륭하다는 듯 룬 역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구나. 거기엔 엘프왕도 있어?”
-물론. 만약 너희와의 대화가 마음에 들면 내 줄 생각도 있다.
하얀 장갑이 여유를 보이듯 양쪽 손가락을 살포시 서로 대었다.
엘프왕을 순순히 내줄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확인을 하고 싶다면 누군가는 들어가야 했다.
장갑은 경쾌하게 다시 글자를 만들어냈다.
-자, 어서 건너와라. 애태우는 것도 너무 길면 흥이 식는 법이다.
고개를 끄덕인 룬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노란 마법석 위에 받은 초대장을 올렸다.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야.”
슉!
마력석과 룬의 초대장이 빠르게 사라졌다.
하얀 장갑손이 의문을 담은 글자를 만들어냈다.
- 무슨 짓이냐?
가면의 초승달 모양 입이 거꾸로 뒤집혔다.
거짓된 웃음이 만들어낸 불쾌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별건 아니야. 네가 준 초대장에 응했을 때 어떻게 될지 잘 알려줄 분이 계시거든.”
룬은 마음속으로 초를 세었다.
‘듀라한이 등장했을 때 크리스티나가 몇 초 만에 왔더라.’
그 때였다.
- !
가면과 손이 충격을 받은 듯 꼿꼿하게 서서 떨렸다.
그리고, 하얀 장갑이 터질 듯 부풀었다.
빠각!
가면 위에 실금이 가더니, 이마 부분이 조금 깨져나갔다.
이어 검은 초승달로 만들어진 눈과 입에서 하얀 빛이 터져나왔다.
음습하고 불길한 창조물이다보니, 안에서 터지는 하얀 축복의 빛이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룬은 그 하얀 빛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면 크리스티나한테 또 혼나겠네. 그래도 이번엔 자진신고 했으니 조금은 봐주려나.’
그 순간 일행들 손에 있던 초대장이 형태를 잃고 사라졌다.
벨리아누스가 상황을 묻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 보다 페르디키온이 더 빨랐다.
“룬. 그 마법석은 크리스티나 님이 주신 거냐?”
“응. 통신용 마법석이자 귀환석이야. 조금 전부터 켜놓고 있었으니 나머지는 크리스티나가 알아서 해 줄 거야.”
노란색 마법석은 룬이 외출할 때면 크리스티나가 반드시 챙겨주던 아티팩트였다.
‘돌려달라 한 적이 없어서 가지고 있었더니, 이렇게 쓰게 될 줄은.’
암묵적으로 지니고 있으라는 의미로 이해한 룬이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놨던 것을 이번에 요긴하게 써먹은 셈이었다.
페르디키온이 되물었다.
“흠, 원래 네 계획은 다르지 않았나.”
룬이 긍정하며 대답했다.
“물의 레어로 통하는 열쇠를 사용해 빠져나갈 셈이었어. 하지만 그건 란드가 감당 가능하다고 여기는 수준일 때만 유효한 계획이었거든.”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돌려 보자 팔짱을 낀 란드가 느슨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게 귀띔정도는 해주지 그랬나.”
퉁명스럽게 투덜거리는 페르디키온에게 룬이 어색하게 미소지어보였다.
“미안, 형. 자세히 설명하면 저 녀석이 눈치 챌 것 같아서 바로 말 해주지 못했어.”
“힝. 흑미도 몰랐어요.”
아무 말 듣지 못했던 흑미 역시 아쉬워 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