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242)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 벨리아누스가 물었다.

“설마, 지금 골드 드래곤의 장로인 크리스티나 님 이야기를 하는거요?”

“맞아. 내 보호자가 그녀거든.”

룬의 대답에 벨리아누스는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이럴수가…… 빛의 여제라니.”

빛의 여제. 즉 크리스티나의 명성은 종족을 뛰어넘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감탄한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흔드는데, 갑자기 가면 근처에 떨어진 하얀 장갑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강제로 움직여지는 듯, 장갑은 힘없이 늘어진 채 검지만 들려 글자를 적었다.

-엘프왕, 데려갈 예정.

지금까지와 다른 느낌의 문장에 모두가 생각했다.

크리스티나가 압승했다, 고.

-룬에게. 곧 갈 테니 얌전히 기다릴 것.

기분 탓일까?

룬은 목을 씻고 무릎이라도 꿇고 기다려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

어둠의 후계이자 어린 해츨링인 룬.

그는 흐린 눈으로 마지막 문장을 전한 후 툭 떨어진 흰 장갑을 바라보았다.

란드가 일행들을 둘러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이런, 어른들끼리도 이야기를 맞춰야 겠는걸.”

“그렇겠구려. 지하의 일도 정리해야 하겠고 말이오.”

심지어 엘프왕을 구한 크리스티나가 방문하겠다는 말을 남겼으니, 이에 대한 의논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둘은 일의 순서를 정리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방을 떠나기 전, 룬은 주변을 다시 살폈다.

장난감과 오르골. 액세서리.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식 인형.

룬이 사용해도 될 만큼 작은 책상.

그 위에 떨어진 붉은 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붉은 물감이어야 했지만, 점점이 떨어진 빛바랜 붉은색이 자꾸만 눈에 들었다.

‘오래전, 수정으로 된 오르골 같은 비싼 걸 가질 만한 아이라.’

짜투리 자리라 해도 성 안이었다.

그리고 이런 성에 상주하는 아이로 떠오르는 건 딱 한 명이었다.

방을 나서기 전, 룬은 란드의 얼굴을 살폈다.

이 공간이 룬의 생각대로 제뉴아르 밀레의 흔적이 있는 방이라면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란드는 생각보다 표정의 변화 없이 고요했다.

***

“……그럼, 감금 된 엘프들의 상황을 보고 이 상자를 사용하라는 말이군.”

룬은 란드에게 상자의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응. 안에 재료는 내가 채워넣었으니까. 퍼밀리어를 이용한다면 우리가 직접 가지 않아도 될 테고.”

그 말을 들은 벨리아누스가 한숨을 흘렸다.

그는 조금 전, 룬의 나이를 듣고 재차 충격을 받은 참이었다.

“이제 와서 이리 말 한들 면목 없는 걸 아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 올려야 할 말이기도 하겠지.”

페르디키온이야 얼마 안 있어 성년식을 치를 해츨링이라 하나, 룬은 까마득히 어린 해츨링.

충격은 룬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어서, 한동안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더랬다.

얼굴을 붉히거나 한숨만 쉬곤 하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하고, 무척 고맙소.”

“미안하다면 나중에 크리스티나가 왔을 때 꼭 말해줘.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서 그렇지, 원래는 해츨링이 다녀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고.”

룬의 말에 헛기침을 한 벨리아누스가 시선을 슬쩍 피했다.

“이런, 빛의 여제에 대한 이야기가 워낙 대단하여서 일게 집정관 엘프가 뭔가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려.”

노력은 해보리다, 라고 말을 맺는 그였으나 어째 기대가 되지 않았다.

꼬리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싶은 기분이 된 룬이 고개를 흔들었다.

‘벨리아누스야 허허 웃으면 되겠지만, 나는 큰일이라고.’

겨우 물의 일족의 일을 해결하고, 어둠의 인장을 온전히 완성한 룬.

어지간한 드래곤보다 뛰어난 성과를 냄으로서 겨우 신뢰를 얻었건만, 의도치 않게 또 사고를 친 기분이었다.

‘그저 권속인 제드의 몸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도와줄 수 있는 걸 해주고, 대신 숲의 인장과 세계수의 일부를 얻을 셈이었건만.’

대가가 큰 만큼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일했더니, 일이 틀어져 보상도 제대로 못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게 생긴 그의 처지가 한스러웠다.

‘란드의 처지는 좋아질테니, 다행이라 해야하나.’

여차하면 란드를 통해 세계수의 일부는 얻어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룬이 그를 바라보았다.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친 란드는 룬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에휴.’

그리고 성의 일들은 수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굳은 표정의 크리스티나와 성에서 만났다.

“룬?”

“어서와, 크리스티나.”

팔짱을 낀 그녀는 엄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룬을 봐 온 그녀가 한 말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간의 이야기는 란드와 페르디키온에게 들었단다. 여러 가지 말이 떠올랐지만, 우선 이 말부터 해야겠구나.”

툭.

룬의 검은 머리 위에 크리스티나의 하얀 손이 올라왔다.

“잘했어, 룬.”

“?”

시작부터 대판 혼이 날 줄 알았던 룬은 눈을 깜빡여보였다.

“이리 오렴.”

소파에 앉은 크리스티나가 옆 자리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앉으라는 신호였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룬은 소파 위에 몸을 묻고 크리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이건……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음성차단 마법인데.’

아무래도 그녀는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잘한 일과, 못한 일. 두 가지 모두 이야기 해볼 생각이란다.”

“응.”

룬이 대답하자, 크리스티나가 살며시 미소를 띄웠다.

“처음에는 네가 납치된 줄 알고 너무나 놀라 달려갔는데. 그건 아니어서 참 다행이야.”

‘납치까지 생각했다면…… 놀랐을 만도.’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크리스티나 입장에선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했다.

“룬, 네가 발견한 레파논이 어떤 마족인지, 내가 알려준 지식을 통해 본 적 있니?”

“있어.”

다정하고 맑은 크리스티나의 목소리 덕분일까.

룬은 그녀의 빛과 온기가 주변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저 곳인가

“그럼, 이야기하기 쉽겠구나. 어디 보자…….”

소파 앞 테이블 위에는 맑은 물이 담긴 유리컵이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손가락을 뻗어 손가락에 물을 조금 묻혔다.

퐁.

“자, 이게 세계수라고 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물로 나무 그림을 그렸다.

“엘프왕과 공주가 있었지.”

다시 한번 물을 묻힌 손가락이 남자 엘프와 젊은 여성 엘프를 간단하게 그렸다.

“세계수 예언 이후, 엘프왕은 공주님과 란드와의 결혼을 허락했어.”

란드를 닮은 얼굴이 공주얼굴 옆에 그려지고, 그 사이에 ♡ 가 자리했다.

“문제는 이 다음이란다. 마족과의 천년 전쟁. 엘프들을 도와 란드는 열심히 싸웠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크리스티나가 손을 펴서 물로 그린 공주의 그림을 지웠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룬, 엘프가 드래곤족을 적대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니?”

이미 아는 이야기였기에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엘프랑 드래곤 모두에게 외면 받았다는 것도 알아. 다만, 란드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가혹해보였어.”

룬은 물로 그려진 란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숲의 인장까지 주었는데도 모든 엘프들이 란드를 탓하고 사막에 버렸잖아. 그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기특하다는 시선이 룬에게 머물렀다.

“과했지. 룬. 나는 그 원인이 색욕과 탐닉의 마족, 레파논의 저주 때문이라 생각한단다.”

“그 놈이?”

“제대로 실토하기 전에 도망가 버렸지만, 확실해.”

크리스티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본 녀석이 진체가 아니었다는 점이 무척 아쉽더구나. 정신체의 일부에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룬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어쩐지 가면 너머로 빛이 몇 번이나 터지더라니.’

그녀는 즉사에 가까운 타격을 몇 번이나 입혔지만 아쉽게도 마족을 죽이진 못했다.

애초에 마족 본체가 아닌 ‘대리자’라 했으니 당연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회복하리라는 예상이 둘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어서, 룬은 또 다른 존재의 행방을 물었다.

“혹시 엘프왕은 거기 있었어?”

“……과거 그, 아니. 그였던 것의 일부가 있었지.”

룬은 어렵지 않게 그 속뜻을 이해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란 소리군.’

엘프왕은 무척 잔인하고,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레파논이 꽤나 악취미였던 모양이지.’

룬과 그 일행들을 초대하려 한 이유도 그들이 찾던 엘프왕이었던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터다.

반응을 기대하며 초대했더니 크리스티나가 소환되어 꽁지 빠져라 도망쳐야 했겠지만.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곧 엘프왕의 장례를 치뤄야한다며 벨리아누스라는 엘프가 내게 부탁을 하더구나. 돌아가신 왕의 유해를 정화하고 싶다면서.”

탁자 위에 물로 그린 엘프왕이 벌써 말라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방 안의 온도가 따뜻했다.

“란드도 함께 엘프왕의 장례를 참관해 달라고 부탁받았어. 우리 둘 다 참가하기로 정했단다.”

“그건 잘 됐네.”

룬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왕의 장례는 엘프들의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

정식으로 초대되었다는 건 란드를 더 이상 배척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컸다.

“언제 진행하는데?”

“5일 뒤란다. 벨리아누스는 너희에게도 엘프들이 감사를 표하고 싶어한다 했지만…… 혹시 불편하다면 먼저 내 레어로 돌려보내줄 수도 있어.”

잠깐 생각한 룬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도 참가할게.”

“그래.”

크리스티나가 까만 룬의 머리를 가볍게 흩어뜨렸다.

“형은?”

“네 부탁대로 흑미와 함께 엘프들 치유를 돕고 있어. 내켜하지 않는 것치곤 제법 열심히 하지 뭐니.”

살짝 웃어 보이는 크리스티나와 함께 룬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형 원래 그러잖아. 입으론 안 한다고 하면서 몸은 가만히 못 있더라고.”

“푸훗.”

크리스티나가 보기에는 룬도 똑같았다.

아이답지 않게 조용하고 세상사에 관심 없어 보이다가도, 때론 평범한 해츨링보다 더 사고뭉치가 되기 일쑤였다.

그런가 하면, 무심해 보이다가도 눈에 든 자가 곤경에 처한 걸 외면하지 못했다.

그녀의 미소가 깊어졌다.

‘언젠가 너희 모두가 장로가 될 날이 기대되는구나.’

크리스티나가 재차 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날을 직접 볼 수 있겠다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한편, 그녀의 속내를 모르는 룬은 무척 민망해 하는 중이었다.

‘간만에 봐서인가. 오늘따라 엄청 쓰다듬어주네.’

룬은 아직 크려면 먼 해츨링 신세였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룬은 묵묵히 쓰다듬을 감내했다.

하지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왠지 그 녀석이 어디로 도망갔을지 알 것 같은데.’

생각을 감추기 위해, 룬은 그녀의 쓰다듬을 즐기듯 살짝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손을 거둔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건 그거고. 마족과 관련 되었을 때 바로 내게 연락하지 않다니. 진작 연락 해 줬어야지.”

“……란드에게는 계속 알렸는데.”

룬의 항변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란드와 이야기를 좀 하고 온 참이란다. 해츨링들을 부탁한다고 그걸 곧이곧대로만 알아들다니. 당연히 보호자에게 말을 했어야지.”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그녀는 한숨을 훅 쉬었다.

물론, 룬 역시 그런 란드의 성향을 파악하고 적당히 아슬아슬한 선에서 일을 벌여왔다.

‘크리스티나가 함께였다면 턱도 없는 일들이었지.’

룬은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눈치가 아주 조금 부족했을 뿐인 란드를 동정했다.

다정하고 훈훈한 분위기는 크리스티나의 저녁 훈련 선언에 박살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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