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242)

***

삼 일 뒤 저녁.

노을 지는 마을에는 마지막 장사를 마무리하려는 자들과, 귀가를 서두르는 자들이 모여 제법 북적였다.

마을은 병자와 썩은 내가 풍기던 일주일 전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밖에 나오니 너무 좋다. 바람이 이렇게 상쾌했구나.”

“하마터면 우리 다시는 못 볼 뻔했어.”

“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동물 마스크와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며 수다를 떠는 그들은 마족화가 될 뻔했던 엘프들로, 대부분 왕성 지하에 갇혀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회복한 후 일상의 기운을 맛보며 웃음과 활기를 되찾아갔다.

그들 사이로, 빨간 고양이가면과 까만 토끼 가면을 쓴 소년들이 걷고 있었다.

그 중 빨간 고양이 가면을 쓴 소년이 심통이라도 난 듯 불퉁하게 말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또 쓰게 될 줄은.”

“뭐 어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니 편하긴 하잖아.”

키가 좀 더 작은 검은 머리 소년이 여유롭게 대꾸했다.

빨간 고양이 가면은 검은 토끼 가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성을 냈다.

“대체 왜 이딴 애들 장난 같은 게 유행을 타는거냐?”

그랬다.

동물가면과 마스크는 최근 활력을 되찾은 엘프들의 대세가 되었다.

하얀새와 파란새가 함께 치유의 축복을 뿌렸다는 목격담과, 벨리아누의 마을에서 시작된 ‘행운의 토끼 가면’ 이야기가 합쳐진 결과였다.

‘하필 가면인건 피부병이 남아있는 얼굴을 가리기 위한 게 크겠지만.’

심지어 벨리아누스가 이 유행을 교묘하게 부추겼다.

과연 전쟁 때 엘프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자기 집무실에 마족의 머리를 장식했던 그다웠다.

‘아무리 봐도 군중심리를 잘 아는 녀석이란 말이지.’

정치질에 소질이 있어보였다.

냉정하게 동물 가면 대유행의 이유를 분석하며 룬은 길거리에서 파는 꼬치를 샀다.

고기와 양념이 적절하게 어우러지고, 향신료를 추가로 뿌린 제법 맛이 잘 든 고기꼬치였다.

“맵군.”

가면을 살짝 어긋나게 들고 꼬치를 한 입 베어 문 페르디키온.

그는 너무 맵게 만들어졌다 말하면서도 꼬치를 쉼 없이 먹어치웠다.

“그래도 맛있네.”

담담한 룬의 말에 페르디키온이 치하하면서 입을 우물 거렸다.

“그때 본 요리사들 작품이랬던가? 이 정도면 제법 괜찮군.”

고기꼬치는 왕성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요리사 부부, 엘린과 제프의 작품이었다.

그들은 룬의 조언을 받아 왕성에 남은 포도주를 털어 고기꼬치 양념소스를 만들었다.

양념이다 보니 야채며 고기 어디에 넣어도 잘 어울렸다.

“그러고보니, 하얀 새끼 새 녀석은 오늘도 성에 간 거냐?”

마지막 꼬치고기를 해치우고 불로 꼬치막대기를 태워치운 페르디키온이 물었다.

“응. 매번 재료 소진으로 난리래. 달라는 곳이 워낙 많아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더라고.”

요즘 백야는 매일 왕성으로 출근해서 포도주가 담긴 거대한 통에 눈물을 떨궜다.

덕분에 룬은 새삼 이 새가 눈물 연기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걸 즐기는 듯하니 그냥 두고 있긴 하다만.’

지시를 내린 후엔 매번 우는 것도 힘들겠다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건만, 지금은 새가 아침마다 삐약 거리며 룬을 깨웠다.

‘빨리 배웅 해 달라고 꽤나 성화였지.’

백야의 인기는 엄청나서, 성에 새가 들어올 때 마다 엘프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엘프 경비원인 켐벨과 메린이 룬 일행과 함께한 무용담을 신나게 풀었기 때문이었다.

입담이 어찌나 쏠쏠한지 룬과 다른 일행들의 인기가 함께 높아질 지경이었다.

“그 쪼그만 놈도 고생이군.”

빨간 고양이가면이 좌우로 가볍게 흔들렸다.

“덕분에 란드도 편해졌으니까, 여러모로 잘 된 결과기는 해.”

여러 호평을 받으며 벨리아누스는 성에서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증언했다.

룬과 다른 일행들의 공로는 물론이고 란드에 대한 엘프들의 반전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를 명예 엘프로 임명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말 다한 셈이다.

이에 대해 페르디키온은 그닥 좋게만 보진 않았다.

“꼭 편하다고만은 못하지 않나.”

“그건 그래.”

‘여태껏 란드를 오해해서 박대했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라는 이유가 없다곤 못하지.’

그걸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있을 란드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룬은 다 먹은 꼬치막대를 어둠속에 치워냈다.

둘은 어느 새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여기냐? 네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장소가.”

“응. 거의 다 왔어.”

마을 외각.

마을과 사뭇 다른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였다.

세계수의 집채만 한 굵은 뿌리가 드러난 곳.

이곳은 엘프들의 전통 장례인 ‘수목장’을 치르는 장소였다.

“많이 죽었군.”

“아무래도.”

살아남은 엘프들이 가면을 쓰고 조금이라도 삶을 만끽하고 싶어 하는 이면.

누군가의 죽음과 슬픔이 모인 자리이자 어머니인 신목에게 돌려보낸 엘프들이 묻힌 곳이었다.

문득 페르디키온이 묘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언짢은 기분이 들긴 하는군. 이건 무덤이라서가 아니다.”

“나도 그래.”

룬의 시선이 세계수의 굵직한 뿌리를 향했다.

겉으로 보기엔 조금 마른 느낌이 들 뿐, 큰 이변은 없어보였다.

‘역시 저 곳인가.’

마기를 흡수한 룬에게만 보이는 누군가의 발자국 같은 힘의 자취.

탁.

확인을 위해 룬은 가볍게 뛰어 나무 기둥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나무를 짚고 흡수했던 마기를 공명시켰다.

우웅!

세계수 가장 깊은 곳에서 다른 마기가 꿈틀 거리며 반응했다.

‘찾았다.’

나무 안을 파먹고 있는 벌레 같은 놈들이 나무의 중심에 가득 들어 찬 상태였다.

룬은 불쾌한 놈들이 이어진 선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

‘저 위에 있겠군. 레파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세계수 저 위를 본 룬이 손을 떼려는 순간.

촤라락!

“!”

“룬!”

룬의 손목에 마기가 감겼다.

잉크를 묻혀두듯

손목에 감긴 동시에 룬의 어둠이 흘러나와 역으로 마기를 쥐었다.

능숙한 대처였다.

덕분에 룬의 손목을 파고들려던 마기가 오히려 어둠에 휘감겼다.

마기와 어둠의 기운이 서로 줄다리기 하듯 뒤엉켰다.

‘이것 봐라.’

룬은 실소를 흘렸다.

마기는 방어를 했음에도 틈만 보이면 어떻게든 룬에게 파고들려했다.

강력하게 찔러 오다가도, 간드러지게 룬의 신경을 건드려왔다.

만약, 룬이 힘을 다루는 데 능숙하지 않았다면 즉시 마기에 감염되었을 터였다.

‘내가 평범한 해츨링이었다면 버티기 힘들었겠어.’

팽!

룬이 드래곤 스킨을 발동해 버티어내며 손목을 당겼다.

그 모습을 본 페르디키온의 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 새끼가, 감히 내 아우를!”

살기를 품은 눈이 번뜩였다.

어린 화룡족의 후계의 손에 불길이 일었다.

화륵!

순수한 불꽃을 두른 손이 룬과 연결된 마기의 끈을 쥐었다.

이어, 다른 손에도 불길을 일으켜 마기가 뻗어 나온 뿌리기둥에 대려던 순간.

촤락!

“!”

마기가 페르디키온의 손을 휘감아 저지했다.

이를 악 문 페르디키온이 불길을 더욱 거세게 일으켰다.

‘이런. 이건 좀 위험한데’

페르디키온은 성체인 레드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아직 퍼스트 네임도 완성하지 못한 불의 일족 해츨링이었다.

마기가 직접 닿는 건 해로울 터.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사납게 으르렁 거렸다.

“감히, 내가 이 따위 마족에게 굴종할 듯싶으냐!”

화르륵!

그의 불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불길로 마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맹렬한 불꽃이 튀자 룬은 생각했다.

‘마기가 문제가 아니라, 나무 타겠는데?’

페르디키온의 불길은 아직 해츨링임을 감안하면 무척 훌륭했다.

문제는 너무 강해서 세계수까지 태워버릴 기세라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불을 거두라 하면 마기에 해를 당할지도 모를 일.

‘마족이 손을 뻗칠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할 수 없군.’

결단을 내린 룬이 페르디키온의 손을 잡고 주변을 어둠으로 감쌌다.

“! 시야가!?”

깜짝 놀란 페르디키온이 무어라 말 할 틈도 없이 마기로 이루어진 수십 가닥의 끈이 그들을 휘감았다.

질끈 감은 눈을 떴을 뜨자, 속이 썩거나 곰팡이가 핀 나무동굴이처럼 보였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구름이 안개처럼 깔린 너머로 멀리 엘프의 수도가 내려다 보였다.

그 너머에는 평야, 작은 마을과 강이 펼쳐져있었다.

휘잉

거칠 것 없이 질주하는 바람이 사막모래 향을 품고 지나갔다.

“여긴…… 세계수 안인 모양이다.”

페르디키온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디키온이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입을 열었다.

“젠장. 주변에 결계가 쳐져있다.”

“뚫을 수 있을까?”

룬의 물음에 페르디키온이 손에 불을 만들어 던져보았다.

퉁!

던져진 불은 보이지 않는 막에 막혀 사그라들었다.

이동마법을 사용해 본 룬도 입을 열었다.

“이동 마법도 쓸 수 없어.”

마기를 감지한 룬은 크리스티나의 귀환석도 쓰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안쪽을 향했다.

“룬, 조심해라.”

“응.”

한 눈에 봐도 사악한 마기가 풍기는 검.

그리고 거칠게 뜯긴 두터운 괴물의 팔 하나가 통째로 검을 쥐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그 검을 쥔 팔이 공중에 떠 있었다.

호러스러운 광경에 페르디키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손에 불을 일으켜 당장이라도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말이 들려왔다.

- 불을 던지다니. 되바라지고 버릇없는 새끼 짐승이로군.

마족의 팔에서부터 반투명한 인영이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왕관을 쓴 긴 엘프 귀를 가진 노인.

룬은 그 모습이 성에서 초상화로 본 엘프 왕임을 눈치 챘다.

물론, 엘프왕일 리 없었다. 룬은 태연히 응수했다.

“거짓된 모습으로 애들 꼬시는 납치범이 할 말은 아닌데.”

룬과 페르디키온은 그가 색욕과 탐닉의 마족 <레파논>임을 직감했다.

그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아……. 이거 기분이 너무 좋아지려 하는걸.

쿠우우!

일순 룬과 페르디키온이 움찔 몸을 굳힐 만큼 흉흉한 기운이 풍겼다.

잠시 후, 엘프왕의 얼굴을 한 레파논이 안되지, 안돼. 라고 중얼거리며 음험한 살기를 억눌렀다.

‘저게 마족.’

처음으로 생생하게 마주친 마족은 불길함의 극치였다.

악의를 가장 불길한 독기와 사특함을 뒤섞은 무언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가장 지독한 죄악을 덩어리로 뭉쳐 놓은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의 전승 지식에서 읽은 것 보다 더 소름끼치는데.’

직접 대면하니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형.”

“?”

룬은 즉시 페르디키온에게 레몬 사탕을 하나 던져주었다.

엉겁결에 사탕을 받은 그가 룬에게 의문어린 시선을 던졌다.

“크리스티나의 빛의 힘이 담긴 사탕이야.”

“고맙다, 룬.”

당장이라도 목을 쥐러 튀어나가려던 페르디키온이 사탕을 물었다.

룬도 우유맛 사탕을 입에 던져넣자, 그걸 본 레파논이 큭큭,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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