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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132/242)

-마음에 드는군. 나는 거침없고 버릇없는 놈을 싫어하지 않아. 위험할수록 끌리는 맛이 남다르거든.

잠시 할 말을 잃었던 페르디키온이 분을 참으며 말을 뱉었다.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하고 꺼지던가, 아니면 당장 우릴 보내라.”

페르디키온은 좀 전과 달리 당장 뛰어들기보단 경계를 늦추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룬이 입을 열었다.

“그 모습. 역시 엘프왕을 먹은 거지?”

-호오.

그 순간, 엘프왕의 형상이 눈에 이체가 어렸다.

룬과 페르디키온의 등줄기가 긴장으로 선득하게 곤두섰다.

불길한 힘을 품은 진홍의 눈동자에 검은자위.

엘프왕의 모습으로 마족의 혁안을 완전히 드러낸 레파논이 룬을 응시했다.

- 고작 새끼 짐승이라 생각했건만, 똑똑하군.

레파논이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그래. 놈을 먹었다. 특식이긴 했지만, 맛은 영 없었지. 내 취향도 아닌 늙어빠진 놈이었어.

레파논은 뭔가를 떠올리는 얼굴로 느린 허밍을 흘렸다.

솜털을 곤두서는 목소리가 나무동굴 안을 울렸다.

- 질기고 딱딱한 육포 같은 식감이었지.

흉흉한 웃음이 나무동굴을 울렸다.

“혼만 얻은 건 아니겠지.”

룬의 말에 레파논이 되물었다.

- 얻다니, 뭘 말이냐?

룬은 짐작하고 있던 바를 입에 올렸다.

“숲의 인장.”

- 호오…….

제법이라는 듯 재차 감탄을 흘린 레파논이 룬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 눈치가 제법 좋군.

-

레파논의 시선이 무심해 보이는 룬을 훑었다.

-한데, 네 혼은 특이하군. 왠지 이제껏 맡아본 적 없는 혼의 냄새가 나.

즉시 페르디키온이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 더러운 눈 치워라. 역겹다.”

하지만 그 말에 레파논은 불길한 마기를 점차 퍼트릴 뿐이었다.

진홍빛 동공이 페르디키온을 향하더니 고개가 비정상적으로 비틀렸다.

-저 어둠을 두른 혼과는 다르지만, 네게도 탐나는 맛이 느껴지는군.

페르디키온에게 시선을 둔 레파논이 입맛을 다셨다.

“저 마족 새끼가……!”

결국 울컥 터진 성미를 본 룬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니가 도발에 넘어가면 어쩌냐.’

크리스티나의 사탕을 물게 했지만, 워낙 상성이 좋지 않았다.

시간을 끌수록 좋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 룬이 손에 어둠을 담아냈다.

“팔에서 피를 뽑아 오염시키던 건 그만 둔 모양인데. 왜지? 엘프왕 하나로 만족할 것 같진 않고.”

- 흐으음. 역시 눈치가 제법 빠른 새끼 짐승이로군.

의도를 파악당한 것을 불쾌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체가 담겨있었다.

-그래. 고고한 엘프놈들의 같잖은 콧대를 엉망으로 짓이겨주는 맛은…… 꽤 좋았지만.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나무굴을 울렸다.

- 더 괜찮은 게 내 손에 들어왔거든.

씨익.

기분 나쁜 미소를 지은 레파논이 손 끝에 나뭇잎을 피워 올렸다.

이내 그 일부분을 드러낸 녹빛의 권능.

약동하는 생장의 울림이 느껴지는 녹빛의 숲의 인장이 드러났다.

그 모습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더 없이 어울렸다.

- 숲의 인장을 이용하면 이 세계수조차 내가 가질 수 있으니.

그 말에 응수하듯 페르디키온이 일갈했다.

“거짓말이다! 마족이 드래곤의 권능을 쓸 수 있을 리 없어!”

-큭큭. 어린 불의 짐승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

레파논은 대답 대신 찢어진 입술을 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형, 저 녀석은 엘프왕의 혼을 먹었어.

룬의 말에 칭찬이라도 하듯 나무동굴이 꿈틀거렸다.

불길한 예감이 맞아들었다.

우드득

꾸득. 꾸드득!

동굴에서 나무뿌리와 가지가 자잘하게 튀어나와 룬과 페르디키온을 노렸다.

아니, 정확히는 놀리듯 근처를 맴돌며 날카롭게 찔러왔다.

‘장난을 치고 있군.’

마치 덫 안에 든 새를 찔러보며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그러다 힘이라도 빠지면 가차 없이 버려버릴 수 있는 눈이었다.

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삿된 놈 중에서도 함부로 상대하면 안 되는 놈이 걸렸군.’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죽여 버려야 했지만, 살심에 휘말려 함부로 싸우려드는 건 레파논이 원하는 바일 터.

룬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했다.

‘말을 섞을수록 놈의 흐름에 말려들어가겠어. 일단 그의 욕망을 파악하는 게 우선인데.’

만드라고라를 먹고 탈이 났을 때, 그린 드래곤 리즈에가 영약과 함께 먹인 숲의 힘.

소화시키지 않고 그걸 활용해 몸을 낫게 했던 후로, 숲의 힘은 룬의 몸속에 잔존해있었다.

룬은 그 힘을 이용해 세계수를 살폈다.

‘!’

그리고 세계수의 격통을 느끼고 숨을 헉 삼켰다.

놀란 페르디키온이 급히 룬을 살폈다.

“룬! 괜찮은 거냐?”

하나뿐인 아우가 급작스럽게 안색이 질리자, 페르디키온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시선은 그대로 레파논을 향했다.

“이 자식, 내 아우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전신을 마력의 불길로 감싼 페르디키온이 눈이 뒤집히기 전.

룬이 급히 어깨를 잡아 제지했다.

“……아니. 나 괜찮아, 형.”

그러자 아쉬운 듯 레파논이 말했다.

-덤벼도 좋았는데 말이지.

마검을 쥔 손이 싱겁다는 듯 X 자를 그리며 휭휭 휘저어졌다.

그는 이어진 룬의 말에 움직임이 뚝, 멈췄다.

“너, 세계수도 숲의 인장도 제대로 못쓰겠지?”

-…….

처음으로 마족의 얼굴에 의외성이 떠올랐다.

즐거움을 발견한 듯 한쪽 입꼬리가 살짝 일그러졌다.

불길한 미소를 지은 레파논이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숨길 생각도 없는 말에 룬이 대답했다.

“세계수의 기억을 조금 읽었어.”

레파논의 눈에 띈 것은 미미한 희열.

오랜만에 그가 탐닉하고 싶은 대상이 눈 앞에 둔, 포식자의 눈이었다.

핏빛 진홍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세계수와 공명을 했다……라. 넌 숲의 일족이 아닐 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울림과 힘만 아니라면 다정하게 느껴질 어조.

그와 대조되는 불길한 기운이 공간을 채웠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페르디키온이 자신의 검을 소환했다.

그는 룬보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만약의 경우 일격에 베어낼 수 있도록 발도 자세를 잡았다.

‘이건 위험한데.’

살기를 느낀 룬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맺혔다.

완전한 진체가 아닌데다, 크리스티나에게 타격을 입었음에도 이 정도라니.

룬은 고위 마족이라는 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피부로 깨닫는 중이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세계수의 고통을 그대로 느낀 탓이기도, 마족의 불쾌한 살기와 압박감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룬은 여유롭게 미소 지어 보였다.

“예전에 숲의 일족에게 신세를 좀 졌거든. 그때 힘을 좀 받았지.”

마족의 눈이 움찔거렸다.

그는 만족감과 탐미를 채운 기분에 몸을 떨었다.

마치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혹은 진귀한 장식품을 발견한 듯 희열에 찬 눈을 불길하게 일렁였다.

-어둠의 일족이 숲의 힘을 쓸 수 있다라. 이건 흥미롭고 굉장한 재능이군.

레파논은 룬에게 진득한 시선을 두었다.

마치 잉크를 묻혀두듯.

침 발라놓기

레파논은 간만에 식욕이 도는 걸 느꼈다.

이 어둠 일족 해츨링은 뭔가 특이했다.

왜 다른지, 무엇이 다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탐닉의 마족인 그가 이 혼을 그냥 지나친다면 죽는 날까지 후회할 것이다.

-크크크큭……재미있군.

한편, 룬은 레바논의 기운을 느끼고 내심 각오를 다졌다.

‘여차하면 전력으로 상대 해야겠어.’

지금까지야 힘을 감춰왔지만, 생존이 더 중요한 법.

최악의 경우, 페르디키온에게 크리스티나가 준 연락석을 맡겨야 할지도 몰랐다.

‘아멜리아의 물의 레어에 보내기만 해도 귀환석은 제대로 작동하겠지.’

페르디키온 역시 언제 전투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음을 느꼈다.

‘아직 어린 룬보다는 내가 상대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응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은 페르디키온이 숨을 훅 쉬었다.

어둑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두 해츨링의 모습에서 각오를 읽은 레파논이 그들을 제지했다.

-아서라.

“?”

레파논의 말에 룬은 의문 섞인 시선을 던졌다.

입을 연 페르디키온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무슨 헛소리를 할 셈이지.”

페르디키온의 말은 들고 있는 칼만큼이나 날이 서 있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낮게 웃음을 삼킨 레파논이 천천히 오른쪽 검지를 들어올렸다.

-너.

손가락 끝은 정확히 룬을 향해 있었다.

- 숲, 그리고 또 다른 힘은 뭘 다루지?

확신하는 어조에 룬은 미간을 구겼다.

마족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 확인하는 기색을 느끼긴 했지만, 제 입으로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껄끄러웠다.

잠시 침묵하던 룬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물, 그리고 빛과 불. 완전히 똑같이 쓰는 건 아니지만.”

레파논의 입술이 탄성과 함께 서서히 입 꼬리를 길게 늘였다.

대리자 가면이 짓곤 하던 미소와 비슷했다.

거짓과 진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고작해야 200살이 되지 않았을 어린 짐승이.

“…….”

룬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이를 파악한 건 손목에 마기가 감겼을 때, 드래곤 스킨을 사용했을 순간일 터.

하지만 이 불쾌한 기분은 그 탓이 아니다.

룬은 마족인 레파논이 드래곤의 비늘만 보고 나이를 짐작할 만한 이유를 떠올렸다.

‘드래곤의 피부를 얼마나 많이 봤으면 마기에 닿았던 그 찰나, 고작 해츨링일 내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거지.’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이었다.

새삼, 크리스티나가 마족을 그토록 경계했던 게 이해가 갔다.

한편, 엘프왕의 모습을 한 레파논은 정중하게 손을 내려 고개숙여보였다.

-나의 이름은 레파논. 색욕과 탐닉의 군주라고 하지.

새삼스레 자기소개를 한 레파논의 진홍빛 눈.

거기에 깃든 사심의 깊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동요할 룬이 아니었다.

“나한테 관심이 꽤 많네.”

룬은 느슨하게 시선을 들어 레파논의 진홍빛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레파논이 어떤 점을 보고 흥미를 느낀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잘만 하면 이 대화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어보였다.

-나는 특이한 혼을 먹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 그런데 네 혼이 아주 특별하고, 맛있어 보이는구나.

감출 생각 없는 욕망이 줄줄 흐르는 말이었다.

레파논의 말이 끝나자마자 페르디키온이 눈을 부라렸다.

“저 미친 새끼가.”

룬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짐작했겠지만, 크리스티나는 내 보호룡이야.”

룬은 레파논에게 치명적이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어 말했다.

- 골치 아픈 광녀가 붙어있구나.

레파논은 그의 정신체를 태우던 빛의 여제를 떠올렸다.

지독한 격통.

몸을 난도질해 대는 심판의 빛.

벌써 삼 일이나 지난 일이건만, 떠올리자면 절로 혀를 차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크리스티나 때문에 정신체 상당 부분에 타격을 입은 그였다.

곧 회복될 것이라 하나, 껄끄러운 상대임엔 틀림이 없었다.

- 그녀는 미쳐 날뛰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드래곤이지.

하필 크리스티나는 인간계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는 드래곤이기도 했다.

제대로 찍혔다간 대륙에 계약자 한 명 둘 수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레파논은 갈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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