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242)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말이지.

붉은 혁안에 맺힌 갈망.

당장이라도 룬의 혼을 탐닉하고 마음껏 뜯고 씹고 싶어 하는 눈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룬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였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이 말이지.’

룬 역시 자신 같은 영혼이 없으리라 여겼다.

애초에 그는 다른 세계의 전생을 기억하는 혼이었다.

룬은 남모르게 눈을 반짝였다.

‘좋아. 시도해보자.’

너무 능숙해 보이면 도리어 의심할 지도 몰랐다.

협상카드를 쥔 룬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한테 들은 적 있어. 마족은 혼을 걸고 계약이란 걸 한다지?”

-호오. 나와 계약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룬, 너 설마.”

묘한 기대를 드러낸 레파논과 당장이라도 뜯어 말릴 기세의 페르디키온이 동시에 말했다.

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해. 계약을 할 정도면 약속을 지키긴 한단 거니까. 그걸 확인한 것뿐이야.”

그 말에 페르디키온은 안도한 얼굴을 했다.

레파논은 기대가 식은 얼굴로 콧방귀를 작게 흘렸다.

살짝 시선을 내렸다가 고개를 든

룬은 약간 여유를 두고 입을 열었다.

“난 내 혼을 내줄 생각이 없어.

여차하면 여기서 빠져나가 크리스티나에게 말하면 그만이야.”

-호오…… 내 결계를 벗어날 수 있다니, 오만이 지나친 것 같은데.

“할 수 있어. 난 요정의 길을 소유하고 있거든.”

이 말이 놀라웠는지 진홍빛 동공이 일순 커졌다.

이내 다시 가늘어지긴 했지만.

-알면 알수록 욕심이 솟는 구나…….

당장 부셔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말은 속으로 삼키며 마족은 입술을 혀로 축였다.

본성인 탐닉을 참으라니, 레파논에겐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보이네. 그럼, 네가 이대로 놔줄 생각도 없어 보이니까.”

뒤틀린 욕망과 살의 앞에 선 룬은 손을 들어 아공간 주머니를 쥐었다.

“제안을 하나 할게.”

룬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자.”

겉보기에는 크기가 상당한 마력석으로 보였다.

하지만 레파논은 그 마력석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눈치 챘다.

-아티팩트로군.

룬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모코지석이라고 해. 간단히 말해서, 연락용 아티팩트야.”

룬이 꺼낸 마력석은 제드의 유품상자 안에 있던 예비 모코지석 중 하나였다.

“!?”

룬의 생각을 짐작한 페르디키온이 경악하는 동안 룬은 모코지석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이걸 쓰면 나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어.”

-흐음.

간단히 사용법을 설명한 룬의 당돌하고 야무진 제안이 이어졌다.

“어차피 나는 마족과 계약 같은 건 절대 안 해. 네 녀석과 연결되는 것도, 어떤 식으로든 흔적 남는 것도 사양이고.”

팔짱을 푼 룬이 모코지석을 던졌다 받았다.

“하지만 나와 연락할 수단 정도라면 내 줄 수 있어.”

-연락수단이라.

뜸을 들이는 레파논에게 룬이 이점을 덧붙였다.

“이게 있으면 내가 성체가 됐을 때라도 연락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내게 해코지를 한다면 크리스티나의 원한을 사겠지.”

페르디키온이 룬의 앞을 반쯤 가로막듯 섰다.

“꿈도 꾸지 마라. 나 역시 가만있을 생각 없다.”

레파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 어린 어둠 일족 생명체의 당돌함을 꺾어 주고 싶은 욕구에 휩싸였다.

안되지.

레파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처럼 그의 식욕을 돋우는 혼이었다.

여태껏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향을 풍기는 특상품 혼.

이런 귀한 혼을 욕심 때문에 상하게 만들 수 없었다.

얼마쯤 지나서, 레파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제안에 응한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뭔지 궁금하군.

‘!’

미끼를 물었음을 직감 한 룬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가 가진 숲의 인장과 엘프왕의 혼. 그리고 세계수.”

-이런. 욕심이 많기도 하지.

거침없는 제안에 레파논이 고민하듯 손으로 제 턱을 쓸었다.

아직 성장도 다 마치지 않은 해츨링들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혼을 받을 수 있는 계약.

그리고 혼은 반드시 계약을 통해 받아야만 했다.

즉답하지 않는 레파논에게 룬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지금 당장 내 혼을 얻진 못하겠지만, 우린 수명이 아주 길어. 어쩌면 그 시간 안에 기회를 잡을지도 모르지.”

해츨링은 자라 성체가 되고, 그 때가 되면 크리스티나에게서 독립할 터.

긴 생을 사는 마족과 드래곤이라면 언제고 마주치게 될 가능성도 높았다.

요정의 길을 가졌다면 당장 도망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단지 레파논이 세계수를 쥐고 있기에 거래를 제안한 것뿐.

안 그래도 영 손에 맞지 않는 힘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쓰기 어려운 힘을 넘기고 탐스러운 혼을 점찍어두는 건 레파논에게도 괜찮은 제안이었다.

레파논이 한동안 말이 없자, 룬이 싸울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손에 어둠을 드러냈다.

그리고.

-좋아. 응하겠다.

“!”

세계수를 말려 죽이는 것도, 어차피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 숲의 인장도.

마족인 그가 가져봐야 흔하디흔한 엘프들 혼을 먹을 도구일 뿐이었다.

그런 흔한 엘프들의 혼 수천, 수 만개야 또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룬의 혼은 이 세상 하나뿐.

그 혼이 못 견디게 탐났다.

더욱 맛있어지도록.

혼을 찢어 삼킬 순간 더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레파논은 탐닉을 위해 얼마든지 공을 들일 수 있는 자였다.

-성장하게 될 때가 기대되는군.

마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단, 엘프왕의 혼은 계약에 따라 이미 거래가 끝난 일. 그건 내어 줄 수 없다.

‘역시 안 되나.’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마족의 계약은 드래곤의 언령에 필적하는 일.

엘프왕의 혼은 계약대로 이행된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 기색을 읽은 것인지, 레파논이 말을 덧붙였다.

-대신 나도 제안을 하지.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머리 소년의 눈이 마족의 혁안을 담아냈다.

“뭔데?”

- 나의 검을 가져가라.

마족의 검.

흉흉하고 무시무시하다지만, 어쨌든 귀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 것을 그냥 넘긴다니 오히려 수상했다.

“이유는?”

룬이 묻자 레파논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혹시라도 다른 마족을 만났을 때를 위해서지. 그 검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나보다 서열이 낮은 녀석들은 얼씬도 하지 못 할 테니.

룬은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침 발라놓기 용도로군.’

대륙에서 마족을 만날 일은 아주 희박하다지만, 앞일은 모르는 법.

“모코지석 작동은 대륙에서만 가능하니까 그건 알아서 해.”

휘익.

룬이 먼저 레파논에게 모코지석을 던졌다.

탁.

모코지석을 쥔 레파논이 반짝이는 마법석을 살폈다.

-희한한 것을 만들었구나. 어린 짐승아.

레파논은 몇 번 손장난을 하다 코모지석을 쥐었다.

이어, 마검을 세계수 바닥에 꽂은 레파논이 한 걸음 물러났다.

-내 오랜 수족이었기에 마기가 진하긴 하지만, 너라면 괜찮겠지?

“응. 상관없어.”

‘어차피 봉인해서 처박아 둘 생각이고.’

레파논이 큭큭, 웃음을 흘리더니 숲의 인장을 손 안에 띄웠다.

본래는 싱그러운 나뭇잎 색이었을 숲의 인장.

마족의 손길이 닿은 탓에 거뭇한 마기의 흔적이 느껴졌다.

-자, 여기 있다.

레파논의 거대한 손에서 숲의 인장이 던져졌다.

룬은 능숙하게 인장을 잡았다.

빛이 깜빡이며 녹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게 숲의 인장…….’

되찾은 숲의 인장은 어딘가 지친 빛을 띠고 있었다.

하나만 묻자

룬에게 넘어와서 망정이지, 꼼짝없이 마족의 소모품으로 소진되어 흑화했을 게 뻔했다.

‘엘프왕의 혼에 매여 억지로 힘을 쥐어 짜인 게 틀림없어.’

룬은 마기와 숲의 인장을 모두 몸 안에 흡수했다.

“괜찮은 거냐?”

페르디키온이 걱정 섞인 물음에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화는 필요하겠지만, 더 이상 마기에 물들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아.”

잠깐의 침묵 후, 페르디키온은 말을 정정해주었다.

“……숲의 인장 말고, 너 말이다.”

염려의 주체가 자신일 거라 미처 생각지 못했던 룬이 뒤늦게 대답 했다.

“어, 나야 괜찮지.”

긴장을 했을 뿐 어디 다친 곳도 없고, 마기에 오염된 곳도 없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영 못 믿을 얼굴로 룬을 살폈다.

“룬. 인간의 어린애도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숲의 인장이라지만 마기가 그렇게 덕지덕지 묻은 걸 덥석 흡수하면 어쩌란 거냐.”

말만 들으면 불량식품 잔뜩 먹은 애 보는 듯했다.

룬은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고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이유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자식도 과보호가 되 버렸잖아.’

아련한 시선을 던진 룬이 재차 괜찮다며 넘겼다.

무엇보다, 아직 레파논이 남아있었다.

“하나만 묻자.”

엘프왕의 얼굴이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무엇이 궁금하지?

“언제부터 계획했어? 세계수와 엘프들을 마족화 시키려던 것.”

세계수의 마기는 아주 긴 세월 마족의 피를 조금씩 물들여 오염시킨 것이었다.

룬은 이 점을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

-어린 짐승이 마족의 생각을 잘 읽어내는군.

“대답부터 해.”

-재촉하긴.

심기가 불편할 법도 하지만, 레파논은 그 당돌함을 즐겼다.

상대가 저항할수록, 영리하게 굴수록 혼을 얻었을 때의 성취감이 더 커지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엘프들을 살육하는 맛은 충분히 좋았지. 하지만 귀찮은 드래곤 녀석이 끼면서 상황이 피곤해졌어. 그래서.

후웅!

거대한 마족의 팔이 도드라진 핏줄을 드러내며 휘둘러졌다.

-이 팔 한쪽을 뜯어 패배한 것처럼 검과 함께 여기 심었지. 내가 뽑지 않는 한 결코 움직일 수 없도록 해서.

그 과정에서 그간 사냥했던 엘프전사들의 혼을 반이나 썼다며, 불길한 웃음을 흘렸다.

“엘프들은 세계수의 자식이니…… 이미 마족의 힘에 물든 엘프의 혼을 세계수에 침투시켰던 거군.”

-호오. 말 귀를 잘 알아듣는군.

레파논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했거든. 세계수는 숲의 힘을 가진 신목. 마족의 피에 쉽게 물들 나무가 아니니까.”

엘프들을 자식처럼 키우고 먹이며 살게 한 어머니, 세계수.

그 자식들의 혼으로 만든 마법과 마족의 피를 삼키고 점점 오염되어갔을 터였다.

세계수는 엘프들의 혼을 외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품었다.

그 과정에서, 세계수의 신목에는 엘프의 피와 섞인 마족, 레파논의 피가 조금씩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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