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242)

-숲의 인장을 가진 드래곤 놈이 수호자라며 있는 바람에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만 했다. 다만 전부터 눈에 봐둔 아주, 어리석은 엘프가 있었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나무동굴을 울렸다.

페르디키온은 뭔가 직감한 듯, 눈빛이 달라졌다.

“설마, 엘프왕이냐?”

-그렇지. 그 놈은 세계수의 예언을 맹신하는 왕관을 쓴 멍청이였어.

내가 속삭이는 말을 세계수의 목소리라 믿을 정도로 말이야.

그 뒤로 아주 시시하고 적당히 무료한 가운데 즐겁게 작업을 했다며, 레파논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몇 마디만 속삭이면 일개미처럼 잘도 움직였지.

갑자기 레파논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성별을 특정할 수 없으나, 왠지 모르게 홀리게 만드는 목소리가 동굴을 메웠다.

-나의 아들아, 승리에 취해 가까이 있는 저 이 종족을 경계하지 않다니. 드래곤이 엘프를 위해 영원히 헌신하겠느냐?

언젠가 네 딸과 낳은 자식이 왕이 되고, 순혈의 엘프가 아닌 드래곤의 자식이 엘프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마치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실체를 이미 알고 있는 룬은 절로 미간을 구겼다.

“잘도 그런 짓을 했네.”

-이 껍데기가 된 놈은 세계수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욕구를 조금 건드리는 건 일도 아니었지.

분개한 페르디키온 역시 입을 열었다.

“네 놈, 그따위 이간질로 란드를 쫓아낸 거냐!”

-보다시피. 지금 말한 것 보다 더한 것들도 있었지만.

레파논은 어깨를 으쓱이며 일부러 팔을 크게 벌려보였다.

그 과장된 몸짓이 이 순간 무척이나 역겨워보였다.

“더러운 새끼.”

결국 룬이 거친 말을 뱉자, 레파논은 서운하다는 듯 말하며 웃었다.

-너무 하는군. 귀한 혼에 걸맞은 배려를 해주고 있다만.

순식간에 룬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

“됐어. 영혼 없는 헛소리 하지 말고.”

룬은 그가 이해한 다음 상황을 대략적으로 간추렸다.

“네 속삭임을 세계수의 말이라 착각한 엘프왕이 너와 계약도 하고, 숲의 인장을 바치고 란드도 쫒아낸 거군.”

덤으로 엘프들에게 란드를 적대하도록 시키기까지.

팔과 엘프들의 혼을 이용해 알차게도 해먹은 걸 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적어도 엘프왕이 어리석지만 않았어도. 아니, 엘프들이 폐쇄적으로 살지만 않았어도…….’

룬이 여기 온 게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소리 소문 없이 전염병에 물들어 죽은 엘프들의 혼을 양분삼아 세계수까지 삼켰으리라.

그때였다.

“삐약!”

결계 밖에서 작은 새 소리가 들렸다.

성난 눈을 한 하얀 새는 추적마법이 걸린 발찌를 달고 있었다.

룬은 속으로 씨익 미소 지었다.

‘드디어 왔군.’

시간을 끈 보람이 있었다.

“삐이야악!”

백야가 결계 밖에서 자그마한 발톱을 세웠다.

결계를 긁어내려는 동물의 본능적인 행동이었으나, 턱도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비키렴.

크리스티나의 전음이 룬과 페르디키온의 머릿속에 울리고.

쿠와아아!

성난 눈을 한 백야의 뒤에서 거대한 빛이 터졌다.

와장창!

결계가 단숨에 부서지고, 강력한 빛이 음침한 기운 가득했던 동굴 안을 채웠다.

레파논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미하게 구겨졌다.

-이런…… 영악한 짓을 했구나. 어린 짐승아.

슬쩍 미소를 띤 룬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레파논이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포악한 광녀같으니.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얼굴이 동굴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

범접할 수 없는 맹수의 목울음이 천공을 울렸다.

브레스 한번이면 세계수를 태울 거대한 골드 드래곤.

이미 몸 주변에 빛으로 된 창들이 돌고 있었다.

살의를 담은 사나운 푸른 눈동자가 동공을 세로로 좁혀 레파논을 보았다.

-이 더러운 마족 놈!

퍼엉!

콰콰콰콰콱!

눈부심이 터져 나오고, 룬과 페르디키온의 옆을 거대한 빛의 창이 내리꽂혔다.

쏴아악!

바람이 날카롭게 갈리는 소리.

눈부심에 눈을 감았던 룬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빛에 노출된 레파논의 피부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비식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거의 부서진 대리자 가면을 앞에 소환했다.

콰작!

가면은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하지만 레파논은 그 사이 보호막을 두르며 몸을 피한 뒤였다.

-‘지옥을 부르는 절망’은 여기 두고 가도록 하마.

마검의 이름을 알려준 그가 느리게 손을 흔들었다.

-후일을 기대하지.

레파논의 몸이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크리스티나의 일갈이 터졌다.

크르릉!

-감히…… 어딜 도망가!

거대한 입이 벌어지며 안에서 태양이 쏟아졌다.

콰아아아!

엄청난 빛의 폭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해치웠나……?”

페르디키온의 말을 들은 룬은 이미 늦었음을 직감했다.

역시나 브레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크리스티나가 세계수 밖에서 몸을 한차례 떨었다.

-이 놈……!

크리스티나가 인간의 모습으로 동굴에 내려섰다.

그녀는 룬과 페르디키온을 한 명씩 바라보고는 둘의 상태를 살폈다.

“해를 입은 것 같진 않구나. 잠시만 기다리렴.”

빠르게 레파논이 사라진 자리로 뛰어간 크리스티나는 마족의 자취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제야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젖히며 하, 하고 탈력감 섞인 한숨을 쉬었다.

“아무 탈 없이 넘어가다니. 기적이나 다름없군.”

“정말이네.”

물론, 룬은 여기 오기 전부터 큰 일 없이 넘어가리라 예상했었다.

레파논이 무척 강하기는 했으나, 크리스티나가 이미 강력한 타격을 입힌 후였다.

즉사에 가까운 공격을 고작 3일 만에 회복하기엔 너무 치명적이었을 터.

‘심지어 그녀가 여기 머물고 있기까지 하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어 곤란했겠지.’

세계수를 피로 더럽히고 엘프왕의 혼을 통해 숲의 인장을 이용하려던 레파논.

만약, 룬이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엘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족화가 된 이상, 엘프들은 레파논의 노예로 전락했을 터.

그들을 회복시키고 지켜줄 세계수의 부재까지 더해, 실컷 부림당하다가 크리스티나의 손에 전멸했으리라.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크리스티나가 엘프들의 피로 손을 더럽혔겠지.’

엘프가 그녀의 손에서 살아남았다 한들 레파논의 낙원에 끌려들어가 지옥의 일부가 되어 평생을 마족의 노리개가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 놈이 내 혼을 탐내서 이걸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사실, 룬에게 닥친 진짜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이번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려나.’

***

“룬 님!”

책상에 앉아 깃펜을 끼적이는 모습을 본 흑미가 달려왔다.

“엄청 엄청 이상한 놈 만났다면서요. 괜찮아요?”

“괜찮아.”

경쾌한 발놀림과 달리, 룬은 기운 없는 얼굴로 열심히 종이에 뭔가 적기만 했다.

얼굴을 쏙 내민 흑미가 종이 위에 적힌 글을 읽었다.

“다시는…… 무모하게…… 나쁜 놈들과…… 함부로 약속 하지…… 않겠습니다?”

“…….”

룬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미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혹시 이게 먹이 준 거예요?”

“먹이라니, 그게 뭔데.”

룬의 물음에 흑미가 검지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으음. 제드 아저씨가 가르쳐 줬어요! 원래 나쁜 놈들에게 먹이를 주면 안 된다구요!”

“후우.”

제드다운 말이었다.

룬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기가 섞인 숲의 인장을 흡수했다는 걸 안 크리스티나는 진노보다 걱정부터 했다.

몸에 이상은 없는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당한 건 아닌지 철저하게 확인당하고 온 참이었다.

‘입 안에 크리스티나의 힘이 섞인 사탕을 계속 물고 있다는 말을 하고서야 겨우 끝났지.’

룬과 페르디키온이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은, 만약의 경우 정신적인 충격을 보호해 주는 사탕이었다.

빠른 대처에 기특해 하면서도, 결국 엄청나게 혼난 둘.

엘프왕의 장례식에는 참여하겠지만 외출금지.

거기에 반성문까지 제출해야 했다.

‘차라리 화를 한 번 내는 게 나았을지도.’

그녀의 진노는 무서웠지만, 그래도 그 한번이 지나가면 상대적으로 더 혼나진 않았더랬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걱정과 염려 때문에 아주 조금의 이상이라도 있을까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그 점이 못내 죄책감을 건드려와서, 크리스티나를 볼 때마다 영 맘이 편치 않았다.

언제 먹겠다고?

옆에서 함께 반성문을 쓰고 있던 페르디키온도 투덜거렸다.

화룡족 소년은 불퉁한 눈으로 작성한 반성문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만 하고 있으려니 영 좀이 쑤시는군.”

룬은 그런 페르디키온을 보며 생각했다.

‘그런 것치곤 무척 정성스럽게 쓰고 있는데.’

심지어 생각보다 명필이었다.

불만스러운 듯 말하면서도 순순히 룬과 함께 반성문을 적어간 페르디키온.

그 역시 크리스티나에게 혼남과 동시에 미안함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분위기를 전환할 생각인지 페르디키온이 지금까지의 작업을 확인했다.

“그래도 20장째긴 하다. 룬, 너는 어떻지?”

“나도 그래. 앞으로 10장만 더 쓰면 끝나.”

팔랑

룬은 대답하며 종이를 새로 교체했다.

페르디키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쓰던 종이에 다시 깃펜을 대었다.

룬은 고개를 돌려 흑미를 보았다.

“어쨌든,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니 세계수 조사는 다 끝낸 모양이네.”

크리스티나는 마족의 흔적을 조사할 목적으로 엘프들의 집정관인 벨리아누스와 함께 조사대를 꾸렸다.

그 과정에서 마기에 대항 가능한 흑미와 듀라한이 함께 하게 되었다.

둘은 세계수의 마기를 제거하는 작업에 제법 큰 활약을 하는 중이었다.

“아직 흑미랑 라한이 할 거 많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

눈치를 살피며 까만 여우귀를 쫑긋 거리던 흑미가 웃으며 두 손을 모으고 살짝 몸을 꼬았다.

“고생한다면서 상 주신다고 하시기에 크리스티나 님한테 부탁한 게 있어요.”

반짝이는 분홍 장밋빛 눈이 룬을 바라보았다.

“흑미가요, 마기 청소 열심히 했더니 성도, 마을도 조금씩 예뻐지고 있어요! 그래서 돌아가기 전에 다 함께 기운 나는 바비큐라도 먹고 싶다고 했어요!”

순수하게 웃는 얼굴로 흑미가 작은 주먹을 꼬옥 쥐었다.

“모두 함께 고기 먹으면 다들 기운 나겠죠? 벨리아누스 아저씨는 하게 된다면 아들이랑 딸도 데려온대요!”

“누가 기운 없어 보이기라도 했나보네.”

룬의 말에 흑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네에. 란드 님이 특히 힘들어 보이구요.”

천진하게 웃고 있지만, 역시 아이의 눈에도 이 미묘한 기류가 보인 모양이었다.

뭔가 떠올리는 눈으로 흑미가 말을 이었다.

“크리스티나 님은 가아끔 무서운 얼굴 하거나 룬님을 걱정 하구…… 벨리아누스 아저씨도 이-렇게. 심각한 눈 하고 다녔어요.”

흑미가 양 쪽 검지를 세워 자신의 눈을 쭉 늘였다.

입을 꾹 물고 흉내 내는 얼굴이 눌린 찐빵 같았다.

“크흡.”

페르디키온이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가 룬과 흑미의 시선이 동시에 옮겨지자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크흠. 당연히 다들 심란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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