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룬과 페르디키온이 세계수에서 마족과 대화하며 알게 된 진실을 전해준 날.
란드는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 내 아내와 자식의 혼까지 마족에게 거두어졌다는 소리구나.”
그 말을 끝으로, 란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리아누스도 비슷했다.
“엘프왕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구료. 나 역시 그렇고 말이오.”
그 말을 남긴 뒤 크리스티나와 란드, 벨리아누스는 서로 묵묵히 할 일만 챙겼다.
따로 자리를 가진 것 같지도 않았고,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았다.
논란이 될 만한 일도, 그럴 말도 꺼내지 않는 어른스러운 행동.
능숙한 처신이라 볼 수 있었다.
그 후 고작 하루.
각자의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기엔 너무나 빠듯한 시간이었다.
‘모두가 함께 하는 식사라.’
룬이 쓰던 문장을 마무리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축하하거나 응원의 의미로 하는 식사라지만, 내일은 엘프왕의 장례식이 있는 날.
가능할 리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룬은 흑미에게 확인 차 물어보았다.
“그럼 그 바비큐는 언제 먹겠다는 건데?”
그러자, 흑미가 어? 하고 눈을 깜빡였다.
“앗! 그걸 못 물어봤어요. 어쩌죠?”
“…….”
흑미가 당황해서 발을 동동 거렸다.
그 모습을 본 룬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엘프 지역에서는 안 하겠군.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
아이의 순수한 염려와 힘을 냈으면 하는 마음에 하는 말임은 안다.
하지만 엄숙한 추모를 해야 할 시기에 바비큐라니.
이건 건의할 일도 아니었다.
‘흑미에게는 조금 어려운 생각이었나.’
자칫 무례한 행동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 룬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설명해 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 앞에서 열심히 반성문을 작성하는 중인 페르디키온이 지나가듯 말했다.
“내 레어의 드워프들은 화장을 하고나면 그 친지들과 술과 음식을 나누며 고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한다. 엘프들의 장례문화는 다른 걸로 알긴 하지만.”
문득, 그 말을 들은 룬은 움직이던 깃펜을 멈췄다.
‘가만, 식사?’
뭔가 마음에 걸렸다.
잔치를 할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흑미의 아이디어는 다른 부분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구석이 있었다.
“형.”
페르디키온이 룬의 목소리에 즉각 반응했다.
“왜 그러냐.”
눈은 종이 위에 있지만 귀는 세우고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룬.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말했다.
“그 바비큐 굽는 거, 해도 되는지 물어보러 갈 건데 같이 갈래?”
“너 또 뭔가 꿍꿍이가 있군.”
이젠 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생각인지 말 해봐라. 듣고 대답하마.”
룬은 생각한 바를 말했고, 페르디키온은 제 턱에 오른손을 대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필요하겠군. 함께 제안해 주마.”
“앗, 그럼 흑미가 앞장설게요!”
두 개의 꼬리를 흔들며 가볍게 뜀뛰기를 한 흑미가 먼저 움직였고, 깃펜을 다시 원래 자리에 둔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세계수 근처로 가자 크리스티나와 벨리아누스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룬과 일행들이 다가가자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크리스티나가 먼저 다가왔다.
“애들아, 여긴 위험한데. 무슨 일이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얼굴을 본 세 아이들.
먼저 입을 연 것은 흑미였다.
“흑미가요, 룬 님이랑 페르디키온 님한테도 힘이 나게 같이 바비큐 먹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언제 할지 정하는 걸 깜빡해서 같이 이야기 하러 왔어요.”
“그랬구나.”
꼬리를 세우고 씩씩하게 손을 들고 말한 흑미에게 대답한 크리스티나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룬과 페르디키온 쪽을 향했다.
“너희들도 바비큐 파티를 하고 싶어서 온 거니?”
크리스티나의 물음에 대답한 건 룬이었다.
“응. 반성문도 거의 다 써가고, 함께 준비해보고 싶어서.”
룬과 페르디키온의 눈은 진지했다.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여긴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돌려 벨리아누스 쪽을 보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먼저 작업 하고 있도록 해요.”
“그러겠습니다. 천천히 하십시오.”
정중한 대답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간이로 만들어진 의자에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가 함께 앉았다.
“그렇게나 바비큐가 먹고 싶었던 거니? 지금은 때가 아니란다. 내일은 엘프들에게 무척 슬픈 하루가 될 텐데 외부에서 온 우리가 취하기 적절한 행동은 아니지.”
언 듯 들으면 안타까운, 혹은 실망스러운 기색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기야, 그녀가 보기엔 흑미의 바비큐 이야기를 듣고 철없이 들떠서 온 모양새로 보일법도 했다.
크리스티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페르디키온이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엄밀히 말해, 이건 축하를 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마족들에게 피해를 입은 엘프들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 말에 크리스티나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마주한 것은 성체인 드래곤들도 몇이나 살해한 마족이야.”
한숨 섞인 목소리가 아이들을 타일렀다.
“엘프는 물론이고 이 땅에 사는 생명체를 수 없이 죽게 만든 괴물이란다.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엘프들에게 고기를 권하는 건 자칫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거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격을 받았지 않겠냐며 걱정스러운 말을 이은 크리스티나.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은 룬이 입을 열었다.
“응. 나도 그 이야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어. 평소라면 그 말이 맞을 거란 생각도 했고.”
또박또박 말을 잇는 차분한 시선이 크리스티나의 푸른 시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계수의 오염 때문에 많은 엘프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몸이 상했어.”
한 호흡.
생각을 담을 짧은 시간을 두고 룬이 말을 이었다.
“이 상황에서 슬픔에 잠겨 식음을 전폐하기라도 하면 진짜 위험할 거란 생각이 들었지.”
드워프들과 달리, 엘프들의 장례 문화에는 딱히 식사를 하는 것이 없었다.
또한 그들은 동족의 죽음을 슬퍼하며, 대개는 굶거나 수목장 근처에서 기도를 종일 올렸다.
평소라면 며칠 굶는 것이 삶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전염병으로 심신이 상한 이들에게 슬픔으로 인해 먹을 것을 거부한다면.
‘행운의 달 조각이나, 백야의 눈물이 섞인 요리로 몸을 치료하는 자들이 며칠이나 식사를 끊는다면…… 위험하지.’
최악의 경우, 마족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던 엘프는 슬픔과 부정적인 감정까지 결합되어 마족화가 다시 진행 될지도 몰랐다.
룬의 말을 들은 크리스티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 역시 뭔가를 깨달은 눈치였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룬이 말을 이었다.
“백야랑 나도 여기에 오래 있을 건 아니잖아.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 마침, 나도 요리를 좀 하니까.”
페르디키온도 말을 거들었다.
“흠, 아우의 요리를 저도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맡겨 주실 만은 할 겁니다.”
페르디키온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여기서 진실을 말 할 수 없었기에 룬은 가만히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이건…… 벨리아누스와 말을 해봐야겠구나.”
푸른 시선이 룬과 흑미, 그리고 페르디키온에게 각각 옮겨졌다.
“말 해줘서 고맙구나. 잠시만 기다려주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금빛 머리를 흔들며 벨리아누스에게 달려갔다.
‘됐다.’
룬은 주먹을 쥐고 기합을 넣고 싶은 마음을 참고 살짝 미소 지었다.
“흑미 잘 한 거죠?”
흑미는 자신이 말 하고도 돌아오는 호응이 애매했던 걸 떠올리는 눈치였다.
기특함을 담아 룬이 아낌없이 칭찬 했다.
“물론이지. 아주 잘했다, 흑미.”
우연이라지만 큰 문제로 번지기 전에 한 번 더 돌아보게 해 준 건 흑미 덕이 컸다.
칭찬을 받은 흑미가 행복한 듯 눈웃음을 지었다.
“다행이다아.”
룬이 손으로 까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흑미가 눈을 감았다가 뜨며 기분 좋은 얼굴을 해 보였다.
나중에 흑미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 해 주어야겠지만,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길을 찾아낸 점은 훌륭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
벨리아누스와 크리스티나가 함께 룬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의 안색은 영 좋지 않았으나, 꽤 진중했다.
잠시 룬을 바라본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숙여보였다.
“큰 문제가 될 일을 미리 알려준 것에 감사 할 따름이오.”
인사를 받은 룬이 잠시 기다렸다가 물었다.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한데. 말 해줄 수 있어?”
그러자, 벨리아누스가 난색을 드러냈다.
“특수한 상황이니 식사를 반드시 챙기도록 성명문을 발표하려 하오. 산 자는 살아남아야 하니. 다만…….”
“다만?”
룬의 되물음에 벨리아누스는 염려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다, 이는 마음의 문제라 제대로 모두 따라줄지.”
주름진 중년의 엘프가 한숨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엘프들은 생각보다 더 안좋은 상황이오. 평소라면 응해주리라 믿겠소만, 지금은…….”
난감한 기색으로 말하며 벨리아누스가 손으로 제 미간을 눌렀다.
답답함을 타파해 보고 싶었는지 페르디키온이 다른 방도를 언급했다.
“누군가는 목숨이 걸렸지 않나. 다들 회복 할 때까지 장례식을 미루어도 시원찮을 마당에.”
고개를 끄덕인 벨리아누스가 긍정했다.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겠지. 다만…… 사실 정말 큰 문제는 다른 것이라오.”
벨리아누스는 세계수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마족에게 깊게 세뇌되었던 엘프들의 상황이 영 좋지 않소.”
점잖던 벨리아누스가 욕지기를 하며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혹시 성에서 본 메린과 켐벨을 기억하시오?”
그들은 요리사 부부를 도왔던 엘프 병사들이었다.
“응, 기억해.”
룬이 대답하자 벨리아누스가 시선을 옮겼다.
“그럼 잘 알고 있을 거요. 그들을 처음 봤을 때, 살해를 즐기고 고기를 삼키도록 세뇌되어가던 중이었다는 걸.”
함께 있던 흑미와 페르디키온 역시 그 때를 떠올리며 표정을 굳혔다.
벨리아누스가 그런 일행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세뇌에 더 깊게 빠져든 자도 있었소. 그들은…….”
차마 어린 모습을 한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없었는지,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에 올리기도 힘든 짓을 같은 엘프들에게 저질렀다오.”
룬과 페르디키온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눈빛이 가라앉았다.
‘동족을 해쳤군.’
둘의 눈빛에서 생각을 읽은 벨리아누스가 씁쓸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들은 죄악감에 시달리며 식사를 계속 거부하고 있소.”
죽지 못해 사는 자들.
혹은, 모멸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시도 했을 것이 자연스럽게 상상되었다.
“생에 미련이 없다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며 심하게 자책하곤 한다오.”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이라며 벨리아누스가 침통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문득, 룬은 요 며칠사이 안 그래도 마른 체형인 벨리아누스가 더 말랐다고 생각했다.
‘고생이 많았겠군.’
약이 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엘프들이 정신적인 문제로 먹지 못하는 상황.
이는 노력으로 해결 될 일이 아니었다.
벨리아누스가 어떤 방법을 택하든 차선, 혹은 차악일 뿐.
무엇도 최선은 아닐 터였다.
“그대들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원래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니.”
침묵이 흐르자, 벨리아누스는 해츨링들이 마음을 쓰고 있다 여겼다.
“엘프들의 일에 이만큼 손을 내밀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오.”
그러자 흑미가 가슴에 두 손을 살포시 얹으며 물어왔다.
“벨리아누스 아저씨, 그래도요. 저희가 도울 일 정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