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 담긴 순수한 시선을 마주하자 벨리아누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참으로 상냥하시오. 차마 좋은 상황은 아니나, 괜찮소. 사실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기도 하지만…….”
슬픔이 묻어나는 중년 엘프의 눈가에 근심 어린 주름이 잡혔다.
“드래곤 족 입장에서 이 이상 엘프들의 일에 함께하는 것이 과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오. 너무 괘념치 마시오.”
룬은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니 세계수에 아래 묻힌 엘프들도 꽤 많았지.’
마기와 전염병이 휩쓸고 간 뒤.
많은 엘프들이 밖으로 나와 일상을 즐겼지만 이제 겨우 호흡을 트고 음식을 먹기 시작한 이들도 상당했다.
그리고 룬은 마침, 좋은 방법을 떠올린 참이었다.
‘역시 그냥 넘어가는 건 안 되겠어.’
심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그 조차 힘겨워하는 엘프들.
동족의 신체를 먹은 죄를 견디지 못하고 공황에 빠진 얼굴.
그를 곰곰이 생각해 본 룬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최선의 방법이 떠올랐는데, 굳이 외면하는 건 신수가 할 짓이 아니니.’
덕 쌓던 제 버릇 남 못준다더니, 참말이었다.
룬은 벨리아누스를 불렀다.
“나한테 생각난 방법이 하나 있는데.”
어두운 표정의 중년 엘프가 고개를 들어보였다.
“어둠의 후계께서 무슨 묘안이라도 있는 것이오?”
룬의 설명이 이어졌다.
“골자는 이래. 죽음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생을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
반문하는 벨리아누스의 얼굴에 미미하게 화색이 돌았다.
“그런 것이 가능하오?”
추가로 이어진 설명을 들으며 벨리아누스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룬의 말에 동의했다.
“알겠소. 그렇게라도 삶의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그 후의 일은 우리가 택할 일일 테니.”
듣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동참의 뜻을 밝혔다.
“란드와 이야기를 해봐야겠구나. 빛의 축복과 조율은 내게 맡기렴.”
페르디키온은 다소 못마땅한 눈치였다.
“순한 놈 같으니라고.”
“그런가?”
의뭉스럽게 대꾸하는 룬을 보며, 페르디키온은 투덜거렸다.
“불의 장로 후계를 형으로 두고 이렇게 써먹는 놈은 너 밖에 없을 거다.”
말은 그래도 결국 거부하지는 않는 페르디키온이었다.
“역시 형밖에 없다니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룬은 눈치 빠르게 그를 추켜 세워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룬 님! 흑미도 열심히 도울게요!”
의욕 가득한 얼굴로 흑미가 씩 웃으며 눈을 빛냈다.
“당연하지. 너랑 듀라한이 빠지면 안 된다고.”
“히히, 좋아요!”
룬의 당부에 흑미가 씨익 웃으며 손으로 V를 만들어 보였다.
그를 지켜본 벨리아누스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이 들어서 참 주책이군, 이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그는 묘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연륜이 쌓이고, 수많은 고난을 선봉에 서서 헤쳐 나온 벨리아누스.
하지만 믿었던 왕에게 느낀 실망과 심적으로 무너진 엘프들을 보며 요 며칠 막막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최근 그는 엘프들이 그를 의지해 오는 눈빛이 무겁다고 느꼈다.
그 무게를 외면한 적 없는 강한 정신력을 소유한 그였건만, 왠지 이 한참 어린 해츨링에게 의지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군. 위대한 어둠과 불의 후계라 하나, 아직 다 크지 못한 이들인 것을…….’
문득 벨리아누스는 한창 젊었을 때.
치열한 마족과의 전쟁 중, 드래곤 일족을 본 일을 떠올렸다.
‘그때 왔던 이는 여성체였지.’
그녀는 엘프들이 묻힌 이 세계수에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들렀다고 했다.
-종족도 다른데, 굳이 추모를 하겠다는 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자 차가운 인상을 가진 그녀는 긴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안식을 기도하는 일에 종족을 가를 이유는 없어.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한 법이니까.
잊혔던 기억을 떠올린 벨리아누스가 룬을 다시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까.
룬 위에 그 여성체 드래곤이 묘하게 겹쳐보였다.
“벨리아누스?”
정체모를 묘한 아련함을 읽은 룬이 그를 불렀다.
그 부름에 먼 기억에서 빠져나온 벨리아누스가 허허, 웃음을 흘렸다.
어느 새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이제 보니, 룬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조금씩 닮은 눈을 하고 있었다.
벨리아누스가 옅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장례는 본래 모두의 슬픔이었을 거요. 허나.”
시선이 모두를 한 번씩 새기듯 옮겼다.
“어쩌면…… 이젠 그대들의 도움 덕분에 새로운 삶을 줄 수 있겠구려.”
“장로 후계로서 품위를 지켰을 뿐이다.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지.”
페르디키온이 대꾸하자 크리스티나가 작게 웃음을 띠었다.
“그런 말을 하게 되다니. 정말 많이 컸구나, 펠.”
“물론입니다. 저도 곧 성체가 될 텐데, 이 정도쯤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룬은 페르디키온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처음 봤을 때 생각하면 정말 잘 크긴 했지.’
고개를 갸웃, 하며 일행들을 본 흑미가 손으로 제 머리를 톡톡 건드려보았다.
“흑미도 많이 컸어요?”
질문을 받은 룬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런 편이지. 벌써 꼬리도 두 개가 됐고.”
“아항! 맞아요, 흑미 꼬리!”
천진난만하게 몸을 빙글 돌리며 흑미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들을 보며 벨리아누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참으로 신기하군.’
그동안 그는 엘프들의 일은 오직 엘프들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받는 일에 종족을 구분 하지 않는 룬을 보며, 그 모습을 닮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이번 일이 끝나면, 폐쇄적이었던 엘프의 문화를 조금은 바꿔나가고 싶구나. 이 몸의 생이 끝나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 앞으로 엘프들의 삶을 바꿀 생각이 움트고 있었다.
***
다음 날, 엘프들은 모두 세계수 나무 아래에 모여들었다.
집 밖으로 절대 나오지 않으려 했던 엘프들도, 그들의 마지막 왕이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혹은 죽은 가족이나 지인을 향한 기원을 품고 오기도 했다.
기잉.
확성 마도구가 작동하는 소리가 잠시 공간을 울렸다.
그리고 벨리아누스가 단상위에 올랐다.
그는 우울하고 침체된 기운이 가득한 엘프들을 향해 말했다.
“어려운 와중에도 이 자리에 어렵게 모인 엘프들에게 먼저 감사드리오.”
목소리가 진중하면서도 편안하게 울렸다.
인사를 마친 벨리아누스가 추도문을 읊으며 장례가 시작 되었다.
“우리는, 아끼는 형제와 자매의 죽음. 보모와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 슬픔과 아픔을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였소.”
귀에 쏙쏙 들어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한동안 엘프족 전체의 비극을 위로했다.
어느 새 엘프들은 몸을 느슨하게 하고 고른 숨을 쉬거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룬과 페르디키온은 세계수의 가장 낮은 가지 위에 앉아 그들을 살폈다.
“형, 준비 됐지?”
“그래.”
붉은 토끼 가면을 쓴 페르디키온이 대답했다.
그의 손에는 룬의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가 들려있었다.
페르디키온은 제 어깨에 있는 백야를 힐끗 보았다.
“자, 열도록 하마.”
검은 토끼가면을 쓴 룬이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딸각.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백야가 날개를 파득거리며 상자 가장자리에 자리했다.
“삣.”
작게 울기 시작한 백야가 페르디키온이 든 상자 안에 눈물을 툭툭 떨궜다.
안 먹어봐?
백야의 눈물이 담긴 상자를 닫자 치유의 힘이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룬은 란드에게서 받은 그린 드래곤 장로의 비늘을 꾹 쥐었다.
‘기분이 묘한걸. 왠지 좀 긴장되기도 하고.’
룬은 간밤에 성사된 만남을 떠올렸다.
***
달빛이 비치는 엘프 왕성 정원.
밤 산책을 하듯 걸어가던 발 끝.
하얀 기둥으로 된 정자에 갈색 머리의 란드가 앉아있었다.
까닥.
눈이 마주치자 란드가 턱 끝만 움직여 건너편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했다.
룬이 자리에 앉자, 란드는 한동안 깊은 시선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세계수를 회복시킬 테니 숲의 인장을 능숙하게 쓸 수 있도록 해달라, 고.”
인사말 따위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란드의 말에 룬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응. 더불어 엘프들을 위한 일도 하고.”
“흐음.”
느슨한 어조로 콧소리를 흘린 란드가 자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크리스티나에게 듣기는 했다만…… 신기하단 말이지. 숲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어둠 일족이라.”
이체 섞인 눈으로 룬을 보던 란드가 손을 테이블 위에 두고 입을 열었다.
“숲의 인장을 잘 다루고 싶다했던가. 인장부터 꺼내 봐.”
“좋아.”
란드의 말에 룬이 두 손을 모아 숲의 인장을 꺼냈다.
어둠속에서도 녹색으로 빛나는 싱그럽게 피어나는 꽃과 잎, 가지.
그 안에 깃든 작고 강한 힘이 일렁였다.
인장을 잠시 보던 란드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마기를 제거했군. 훌륭한 솜씨야.”
“……고마워.”
칭찬을 받은 것 같은데, 뭔가 묘하게 찜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을 연 란드가 한 말은 룬이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다.
“흐음…… 설마 이런 식으로 내가 후계자를 두게 될 줄은 몰랐는데.”
란드가 비취색으로 은은하게 번지는 빛무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말을 들은 룬은 눈을 깜빡였다.
“후계자?”
룬의 되물음에 란드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숲의 장로 후계였던 내 인장을 가졌으니, 내 후계자가 맞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힘을 다루는 수업정도나 할 줄 알았던 룬에게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룬이 의문을 드러냈다.
“란드. 솔직히 말 해봐. 무슨 생각인지.”
미심쩍은 시선을 회피할 생각도 없는지 란드는 팔짱을 끼고 좀 더 진득한 시선을 던졌다.
“크리스티나에게 듣기로, 색욕과 탐닉의 마족이 네게…… 눈독을 들였다더군.”
“그랬지.”
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하는 룬을 보며 란드가 입꼬리를 비틀렸다.
미소가 되다 만 것 같은 표정에서 란드의 심정을 엿보였다.
“나는 마족을 증오해.”
드래곤으로서의 자신도, 숲의 일족과 엘프들도.
무엇보다 소중했던 아내와 자식까지 마족에게 잃어버린 란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도 아니지.’
깊은 분노가 깃든 녹안에 잘 벼려진 살기가 엿보였다.
란드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건 내 복수이기도 해. 녀석이 가장 탐내는 걸 가지지 못하게 하고 싶거든.”
룬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 방법이 나를 네 후계자로 삼는 거고?”
“그래.”
이미 마음을 정한 눈치였다.
하지만 숲의 인장을 받는 것과, 란드가 정식 후계로 지명한 건 다른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