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은 그가 생각하는 점을 짚었다.
“나는 숲의 인장을 잘 다루도록 도움을 받고 싶은 것뿐이야. 다른 건 필요 없어.”
“포부가 좀 커도 될 텐데.”
농담처럼 던져오는 그 말에 룬은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포부는 무슨. 애초에 내가 그린 드래곤도 아닌데, 숲의 일족 장로 후계를 인정받아서 뭐해.”
상체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던 란드가 찬찬히 룬을 바라보았다.
“상관은 없어. 내 뜻을 이어받을 자이기만 하면 돼.”
“…….”
가벼운 말투였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숲의 인장은 생장의 힘.
그를 다룰 힘의 원천과 숲의 일족을 계승하는 일이 공짜일 리는 없었다.
“편히 생각해 꼬마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며 란드가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하지만 룬의 생각은 달랐다.
짧은 침묵 뒤, 룬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란드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눈치가 좋네. 크리스티나의 말 대로.”
심계가 깊은 아이였다.
어둠 일족들은 어딘지 모르게 그랬다.
속을 알 수 없는 고요한 어둠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쉬이 내비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하나만 대신 해 주면 돼.”
“뭔데.”
빙긋 웃은 란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어서, 룬은 한참이나 후에야 대답해 주었다.
***
회상을 마친 룬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란드 자식, 두고 보자.’
그가 맡긴 일은 나중에.
지금은 당면한 일부터 해결할 차례였다.
“……우리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자 특별히, 그간 애써주었던 분께서 와 계시오.
마침 벨리아누스가 입을 열었다.
페르디키온과 잠시 룬이 마주쳤던 룬은 은닉 효과가 있는 검은 토끼가면에 손을 올렸다.
‘내 차례군.’
룬은 속으로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드래곤 일족, 룬 님이시오.”
벨리아누스의 소개가 끝날 때, 룬은 가면을 벗었다.
동시에 엘프들이 볼 수 있는 큰 나무 뿌리 위로 이동마법을 사용했다.
웅성웅성
모인 엘프들이 불안한 눈으로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한 호흡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엘프들도 이상하다 여겼는지 눈을 들어 세계수 뿌리 위에 있는 룬을 보았다.
거기에는 흉포한 드래곤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하지만 일부는 룬과 백야를 알아보며 수군거렸다.
“어린 불사조 백야의 주인…….”
“성에서 일하는 경비들과 요리사들이 저 드래곤 덕분에 살았다고 했어.”
“저 먼 곳에 있는 저수지도 정화해 주셨다고…….”
드래곤족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엘프들이었지만, 요 며칠간 퍼진 소문과 백야의 활약 덕분에 룬에 대한 평가는 꽤 좋은 편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룬은 벨리아누스에게서 미리 받았던 확성 마도구를 들었다.
그리고 태연히 입을 열었다.
“긴 말 하지 않을게. 나는 죽어가는 세계수를 살려줄 거야.”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그들이 가장 의지하고 따르는 어머니 세계수.
한눈에 봐도 늙은 고목 같은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기에,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룬은 거대한 나무기둥에 손을 대었다.
파앗!
숲의 인장이 나무와 룬 사이에 녹음을 품은 채 떠올랐다.
거기에, 타이밍 좋게 크리스티나의 축복마법이 발동했다.
룬과 세계수를 둘러싸며 빛의 고리가 생겨났다.
그를 감싼 금실과 빛 알갱이가 주변을 유려하게 돌기 시작했다.
절로 시선을 빼앗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예쁘다…….”
대다수의 엘프들이 빛에 이끌려 시선을 위로 올리는 순간.
드드드드드!
세계수가 낡은 껍질을 떨쳐냈다.
그리고 고목이 아닌, 하얗고 뽀얀 본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화악
크리스티나의 축복과 숲의 인장. 그리고.
“<소생하라.>”
속삭이는 룬의 언령.
마기에 파 먹혀서 죽었던 속살과 세포가 숲의 향기와 언령에 이끌려 새롭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저걸 봐!”
멍하니 빛을 따라 위로 고개를 든 엘프가 검지로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열매야. 세계수의 열매!”
“열매라니…… 생전 처음 봐!”
나무에서 은은한 숲 향이 감돌더니, 넘치는 생명력이 담긴 커다란 열매가 주렁주렁 넘게 달렸다.
“헉!”
엘프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룬은 그가 지닌 모든 속성들과 소생의 능력까지 조합한 결과물.
세계수의 열매를 보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좋아.’
열매의 향이 너무나 달콤해서, 엘프들 중 일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
정말이지 향기만으로도 몸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무 위로 흑미가 쏙 얼굴을 내밀었다.
“흑미 준비 됐어요!”
“좋아. 하나씩 던져 줘.”
“네에!”
쪼르르
흑미가 여우 꼬리를 흔들며 다람쥐처럼 나뭇가지를 타고 달렸다.
그리고, 큰 열매가 맺힌 아래쪽 가지에 도착해 코를 실룩이며 냄새를 맡았다.
“흐앙. 맛있겠다아.”
흑미가 빠르게 열매 하나를 잡아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던질게, 라한아!”
철컹!
어느 새 커다란 그물채를 든 듀라한이 나무 아래에 대기하고 있었다.
흑미가 열매를 똑 따고는 듀라한이 있는 곳에 던졌다.
“얍!”
휘익-
출렁!
듀라한은 안정적으로 거대한 열매를 하나씩 받아냈다.
그리고 큰 광주리마다 열매를 쌓기 시작했다.
룬이 엘프들을 돌아보았다.
“이 열매는 당신들의 세계수가 엘프들을 위해 만들어 낸 거야.”
엘프들은 긴 귀를 쫑긋거리며 귀담아들었다.
안 그래도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의 효과로 룬의 말은 무척 설득력 있게 들렸다.
룬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살길 바라는 세계수의 의지가 담겼어. 그리고 그 맛과 효과에도.”
철컹 철컹
듀라한이 열매로 꽉 찬 광주리를 가지고 엘프들에게 다가갔다.
시커먼데다 거대한 듀라한은 빈 말이라도 호감을 주는 편은 아니었다.
심지어 두려움을 안겨주는 풍채에 뒷걸음치게 했다.
그럼에도 엘프들의 긴장을 풀리게 만든 건 룬의 먹어보라는 권유.
그리고 바로 듀라한의 등에 걸린 무기에서 들리는 말 때문이었다.
- 자자! 싸다 싸요! 공짜도 급이 다른 공짜에요! 만병통치약을 거어져 주는 거지 이게! 거, 그쪽 누님 얼른 와서 잡숴봐요~
뭔가 굉장히 정신없는 무기였다.
- 이게 참 좋은데 말로 설명을 다 못하겠는 초대박 열매! 이런 거 어디서 구하지도 못하는데 여기 온 엘프분들이 아주 운이 좋다니까요?
과묵한 기사가 거대한 손으로 열매를 하나 쥐어 턱 건네자, 멋모르고 받은 엘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어?”
얼빠진 소리를 낸 그를 보는 수십 쌍의 눈.
묘한 압박감을 느낀 엘프에게 룬이 은근하게 종용했다.
“안 먹어봐?”
“아, 아뇨…… 먹어보죠 뭐…….”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 엘프가 열매를 베어 물었다.
하압!
“흐으으읍!”
입 안 가득 퍼지는 과실즙과 과육 씹히는 맛이 달콤했다.
천계에 피는 꽃향기와 열매를 한 번에 맛본 기분에 그는 환상에 젖어들었다.
‘어? 저기 있는 레나는 어릴 때 내 짝사랑인데…… 그런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서 키스를?’
홀린 듯 입술을 쭉 내민 엘프가 눈을 떴을 때.
“헉!”
첫사랑의 입술이라 여겼던 열매는 꼭지만 남기고 몽땅 입 안으로 사라져있었다.
“어, 언제 다 먹었지?”
두 손에 남은 열매의 향기만이 흔적을 증명할 뿐이었다.
묘하게 힘이 솟고, 피부까지 탱글해지는 기분에 남성 엘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그런 엘프는 그 혼자가 아니었다.
“나, 나도 모르게 다 먹어버렸어!”
“흑……. 으흑. 뭐, 뭔가. 내 안의 뭔가가 용서받는 기분이야…….”
슬픔과 추모의 자리이자, 누군가를 해친 죄책감을 가진 이들.
그들 모두가 룬에게서 열매를 나눠받아 먹고는 각자 마음에 담긴 아픈 것들을 위로받았다.
누군가는 죄책감.
누군가는 깊은 슬픔.
또 누군가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는 마음을.
엘프들을 살리고자 하는 세계수의 의지와, 마음을 다친 그들을 위한 힘이 모아 만들어진 열매의 힘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수확
그것은 기적이었다.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마음에 온기가 깃드는.
회복되는 몸과 함께 슬픔이 녹아내리는.
어느 순간부터 잊고 있었던 맛이었다.
“우리가 왜 이 맛을 잃어버리고 있었을까.”
분명 처음으로 맛보는 세계수 열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리운 기분이었다.
타향살이를 하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맛본 집 밥처럼, 무척 따뜻했다.
그때였다.
“억지로 사는 게 사는 건 줄 알아?”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을 한 남자가 열매를 꽉 쥐었다.
“이런 걸 먹어도 되는 거야?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냐고!”
비탄에 빠진 남자의 목에 마족화의 흔적인 검은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디단!”
면식이 있었는지 벨리아누스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디단은 주변을 보며 외쳤다.
“죄를 지었어. 같은 동포의 피와 살을 찢어먹고 살아남았다고. 이런 더러운 놈이 살아봐야 뭐해!”
그 말은 살아있는 엘프 중 일부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벨리아누스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며 주먹을 쥐었다.
그는 하이엘프 중에서도 촉망받던 엘프 귀족.
별다른 일이 없다면 왕성에서 고귀함을 칭송 받으며 살았을 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초췌하게 마른 얼굴.
악에 받혀 충혈된 눈.
관리 되지 않은 긴 손톱이 과육 안을 파고들었다.
룬은 디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 될 게 뭐 있어.”
특별한 것 없다는 듯 무심하고 태연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누군가 너희가 살길 바란다는데.”
타박 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