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42)

룬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엘프들이 길을 조금씩 비켜주었다.

겉모습은 분명 어렸지만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봐 온 초연한 얼굴.

그리고 시선에 담긴 굳건한 의지가 절로 엘프들의 걸음을 움직였다.

많은 엘프들의 시선 속에서 룬이 입을 열었다.

“죽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순간이겠지만. 하늘 보기도 부끄럽고 창피하고 죄스럽다지만.”

타박.

금빛 과즙 한 방울이 엘프의 손을 따라 흘러내렸다.

아슬아슬하게 손끝에 매달린 방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 세계수가 지켜보는 앞에서 네 삶을 포기할 생각이야?”

룬의 시선은 한 순간도 디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크……윽!”

볼이 움푹 들어간 엘프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바로 앞에서 룬의 깊고 붉은 눈을 마주하자 몸이 떨려왔다.

‘무슨 어린 몸으로…… 저런 기운이.’

소문으로 들었던 드래곤 피어는 아니다.

그저 강력한 의지가 눈을 통해 느껴졌을 뿐.

검은 머리에 루비처럼 붉은 눈을 한 아이는 디단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죽고 싶다 말하는 건 살아서 죄책감을 마주하지 않고, 비겁하게 회피하다가 스스로 죽겠다는 말일 뿐이야.”

엘프들을 살릴 수 있는 열매를 맺은 세계수와, 그 나무를 등진 작은 소년.

엘프 디단은 손에 든 과일을 저 얼굴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디단은 으르렁거리듯 말을 뱉어냈다.

“제 정신 아니었을 때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네 까짓 게 알아!?”

저 태연해 보이는 얼굴을 짓이겨서라도, 보란 듯이 세계수에 욕을 해서라도 증명하고 싶었다.

죄악감에 휩싸인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미칠 수 있는지.

룬은 그 악의를 선명하게 읽어내고 감상을 읊었다.

“살아서 그걸 감당하는 것보다 죽는 게 더 쉽다, 라.”

비틀린 저의에 공감해 줄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분명 이것도 레파논이 원하는 결과 중 하나겠지.’

마족화가 되어 엘프인 동족을 죽이는 것도, 혹은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것도.

모두 마족인 레파논이 원할 결말이었다.

‘저자의 목을 보니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의 효과와 마족의 사념이 싸우고 있군.’

검은 핏대가 올라온 디단의 목을 지그시 본 룬이 작게 호흡을 들이켰다.

“그 열매를 먹고 생각해 봐. 적어도, 너희를 태어나게 한 나무가 준 거잖아.”

“하! 이런 열매 하나가 내 생각을 바꿀 거라고 여기나?”

빈정거림 섞인 이죽임에도 룬은 차분하게 턱짓을 해보였다.

“먹어봐.”

디단은 손을 떨었다.

왠지, 그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이 고통스럽게 그의 죄악을 소곤거렸다.

“시, 시끄러워! 먹어도 소용 없다는 걸 보여주면 될 거 아냐!”

콱!

송곳니가 남아있는 디단이 열매를 씹었다.

과즙이 주르륵 흘렀다.

“……!”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진한 애정.

삶에서 이런 느낌을 또 경험 할 수 있을까.

축복을 받는다면 이런 느낌이리라 생각되는 감각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는 홀린 듯이 과일을 먹어치웠다.

머릿속을 휘저어대던 찐득한 것들이 제 힘도 못쓰고 사라져갔다.

“어……어.”

탁한 증오로 차올랐던 눈이 조금씩 맑아졌다.

“난, 나는…….”

디단은 고개를 들어 룬을 보고, 그 뒤의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하얗게 빛을 내며 회복한 세계수가 싱그러운 열매를 맺고 거기 있었다.

털썩!

정신없이 열매를 먹은 그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아무 조건도, 대가도 없는 생명의 힘과 축복이 그의 몸 안을 채웠다.

갓 태어난 아이가 조건 없이 사랑받았다면 이런 느낌이리라.

그는 위대한 신목을 바라보았다.

선명히 느껴지는 세계수의 의지는 살육으로 야생 짐승처럼 사납게 날 섰던 마음을 정화시켰다.

“흐으. 흐어어.”

부푼 풍경이 흔들리더니 눈물이 흐르며 선명해졌다.

“허어, 엉…….”

디단은 꺽 꺽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다른 엘프들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룬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벨리아누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해도 될 것 같아.’

룬의 뜻을 읽은 벨리아누스가 곡소리와 울음바다가 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제는 슬프고 끔찍했던 시간에 안녕을 고할 때였다.

“우리는 우리의 왕과, 형제자매들의 참담함을 위로하고 충분히 슬퍼해야 할 거요. 그리고…….”

목이 멘 벨리아누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하나하나 단어는 만들어 내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서로 다독이며 위로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쓰러져 울고, 혼절할 듯 몸을 뒤집는 엘프.

분함을 삼키며 조용히 고개 숙인 이들.

죽은 엘프들과 엘프왕의 장례식은 이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

은닉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토끼 가면을 쓴 룬은 미리 의논한 대기실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흑미와 듀라한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수고했어.”

“네! 룬 님도요!”

철컹!

듀라한이 투구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이어 제드가 입을 열기 전에, 룬이 먼저 말했다.

“세계수에 깃든 마기를 대부분 흡수하느라 고생했어.”

덕분에 열매를 무사히 맺히게 할 수 있었다고 말을 맺자, 흑미가 눈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라한이랑 저는 재미있었는데, 제드 아저씨가 엄청 엄살 부렸대요!”

메롱 하고 혀를 쏙 내미는 흑미에게 제드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흑미 님. 제가 생각보다 섬세하다고요! 저는 그 마기에 찔끔 닿아도 엄청나게 위험하다니까요? 절 어찌 해보려고 아주 혓바닥 내미는 뱀 같이 굴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후. 그렇게 징그럽게 생긴 기운은 제 생전 처음 봤지 뭡니까요.

진짜로 찔끔 마기 좀 닿는다고 그 정도로 다치진 않는다.

한마디로 제드의 말은 너무 과장된 이야기였다.

‘그래봐야 징그러운 벌레가 팔에 닿는 느낌 정도였겠지.’

란드가 만들어 준 정화에 탁월한 진주 장식도 있고, 듀라한이 위험하게 직접 마기에 무기를 댔을 리도 없었다.

룬은 예측을 툭 던져보았다.

“신기해서 감각을 열었다가 진짜 데일 뻔한 게 아니고?”

보나마나 뻔하다고 확신한 룬의 말에 제드가 앓는 소리를 냈다.

-크허헉! 아이고, 룬님 말에 저 베여 죽어요!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강 건널 뻔한 제드를 노려본 룬이 한숨을 쉬었다.

‘정답이네.’

어쨌든 결과적으로 룬은 만족스러웠다.

마기를 잘 흡수한 흑미와 듀라한은 강해졌고, 세계수의 열매 또한 잔뜩 얻어 아공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아무리 룬이 드래곤이라지만, 직접적으로 세계수에 손을 댈 기회가 결코 흔치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수확이네.’

심지어 세계수 열매는 룬이 지금까지 본 어떤 식재료보다 뛰어났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앗! 룬 님 입꼬리 요렇게 올라갔어요!”

양 쪽 검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흑미를 본 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긴 하니까.”

게다가 룬이 얻어낸 건 세계수의 열매 뿐 만이 아니었다.

하얗게 되살아난 세계수의 가지와 잎, 나무수액을 넘치도록 얻어낼 터였다.

‘숲의 인장이 정말 쓸 만했지.’

인장이 지닌 생장의 능력은 살아있는 세계수의 가지를 잘라도 다시 자라게 만들 수 있었다.

신목인 세계수는 물론이고, 앞으로 룬이 얻을 귀한 약초나 허브, 풀이나 밀 같은 것들도 잔뜩 얻을 수 있을 터.

이건 황금을 복제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기적인 힘이었다.

‘물의 인장과 빛의 힘, 그리고 소생 언령을 함께 다룰 수 있어서긴 한데…….’

걸어 다니는 숲, 혹은 곡창지대가 따로 없었다.

손에 떨어질 걸 생각하면 룬의 드래곤 하트가 다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가끔 세계수의 관리 명목으로 엘프 마을에 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엘프 마을은 세상에 다시없을 룬의 농장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앞으로 엘프들의 삶이긴 하다만.’

룬은 이번 일이 잘 끝난 것이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 덕이라 여겼다.

그 많은 군중들을 일일이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 아니었다면, 그가 세계수를 잘 살렸다 한들 디단 같은 엘프가 더 생겼을 테니까.

‘효과가 영구적이진 않겠지만…… 당장의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지.’

이 후는 벨리아누스와 상의 한 대로, 엘프들이 이겨내야 할 터였다.

그때였다.

세계수 가지 위에서 엘프들을 모두 보고 있던 흑미가 물었다.

“나무 위에서 보는데, 다들 너무 슬퍼 보였어요. 이제는 다들 괜찮겠죠?”

혹여 엘프들이 돌발 행동이라도 할까 내려오지 않도록 가지 위에서 내려오지 말라 일렀기에 그들의 모습을 모두 보고 있었다.

룬이 대답해주었다.

“한동안은 그럴 거야. 나중에는 스스로 살아가겠지.”

“그렇게 슬퍼하는 걸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흑미가 한 손으로 정령들이 든 루비 브로치 아래를 꼬옥 눌렀다.

“여기가 조금 아파왔거든요.”

여우귀를 뒤로 살짝 접은 흑미가 룬을 바라봐왔다.

“너무너무 속상해요. 안 아팠으면 좋겠어요.”

어린 여우 수인은 가슴을 토닥이며 꼬리를 늘어뜨렸다.

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 정도는 교육은 하는 게 맞겠지.’

조금은 이야기해 두는 게 좋으리라 여긴 룬이 팔짱을 끼었다.

“살면서 한 번도 안 아플 수는 없어. 가끔은 치료하기 힘든 상처가 나기도 해.”

“정말요?”

“응.”

눈을 깜빡인 흑미가 후웅, 하고 아쉬운 허밍음을 흘렸다.

룬은 그런 흑미를 잠시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그럴 때 네가 뭘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그 방법을 찾아봐. 그럼 네 주변 누군가가 아파할 때 도와 줄 수 있을 거야.”

백미의 죽음으로 미욱했던 이무기 시절의 그가 결국 후회했듯이.

‘백미 녀석이 속상해 했던 일이 생각나네.’

이무기 시절의 그가 좀 더 능숙했다면, 속상해 하던 녀석을 더 신경 써 줄 수 있었으리라.

“알겠숩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흑미가 귀를 다시 쫑긋 세웠다.

그리고는 문득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맞다. 룬 님! 페르디키온 님은 언제 오세요?”

“?”

상자를 들고 있던 페르디키온이야, 이쯤 되면 할 일도 마쳤으니 슬슬 돌아와야 할 때긴 했다.

“그러고 보니 좀 늦는데…….”

어째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까도 내가 까겠다

[형, 어디야?]

룬이 모코지석으로 연락해 봤지만, 페르디키온은 답이 없었다.

‘그냥 있으면 오지 싶긴 한데.’

하지만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페르디키온은 종종 향기 상자만 맡으면 애먼 소릴 하고 다녔으니까.

“설마 아니겠지……?”

“뭐가요?”

흑미의 반문에 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말문을 떼며 룬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형이 그 상자에 취해서 이상한, 아니 나에 대해 자랑 아닌 자랑을 했었거든.”

그 말을 직접 들을 때 마다 페르디키온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디 가서 모르는 엘프한테 그러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아니겠지? 라는 부정을 원하는 눈빛이 명백했지만 흑미는 룬을 보며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그럴지도 몰라요! 페르디키온 님은 룬 님을 엄청 아끼니까요!”

‘……!’

촉이 왔다.

그것도 불길한 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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