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은 몇 초의 침묵 뒤 입을 열었다.
“나 잠깐 형 찾아보고 올게.”
그러자 흑미가 꼬리를 세웠다.
“흑미도 도와드릴게요!”
-그러게요. 혼자 보다는 같이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요?
흑미와 제드의 말에 룬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혹시 여기로 올 수도 있잖아. 나랑 엇갈려서 형이 도착하면 모코지석으로 알려 줘.”
“알겠숩니다!”
철컹!
흑미는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인사 했고, 듀라한도 묵묵히 상체를 숙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에헴!
그때, 갑자기 제드가 기척을 냈다.
-룬 님. 제 촉으로는 말이죠, 생각보다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
뭔가 알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룬은 제드가 깃든 파라리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드, 아는 게 있으면 이야기 해 봐.”
-어휴, 뭐 대단한 걸 본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요.
능글능글한 어조로 제드가 목격담을 풀어냈다.
- 룬 님이 딱! 그 디단이란 엘프와 대화 중이실 때 말이죠. 상자를 들고 있던 페르디키온 님이 웬 어린 엘프랑 이야기를 나누시다 자리를 뜨시더라고요.
의아한 눈이 된 룬이 되물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봤어?”
-세계수에서 북쪽으로 가시던 거 같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저도 잘 모릅니다요.
엘프 하나 보고 오는 거라면 제드의 말대로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뭔가, 평소 같은 상황이 아닌 게 마음에 걸리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룬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직 해츨링이라지만 페르디키온은 제법 강했다.
어린 엘프가 아닌 다 큰 성년 엘프가 와도 별 걱정 할 필요 없을 정도로.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녀석은 아니긴 한데…….’
룬은 예전에 향기 상자를 처음으로 실험 해 본 날.
처음으로 향기에 취한 페르디키온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아우님. 내가 아우님을 진정한 형제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
그래, 분명 그런 말을 했다.
-오늘따라 네 모습이, 나의 아버님보다도 멋있게 보이는군.
“…….”
어지간해선 빠르게 답장하는 페르디키온이 어째 대답이 없다는 것도 어쩌면.
‘혹시라도 그 따위 말을 어디서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일이 진짜로 일어나는 경우는 심심찮게 있는 법이다.
‘진짜라면?’
소름이 쫙 끼쳤다.
취한 페르디키온이야 기억도 잘 못 할 테지만 룬은 수치스러움을 그대로 느끼게 될 터였다.
당시에는 룬이 직접 제지해서 더 이상의 헛소리를 막았지만, 지금은 다른 엘프들에게도 상자가 사용 된 직후였다.
‘불길하다.’
목에서 비늘이 돋는 기분에 룬은 손으로 제 목을 문질렀다.
“역시 안 되겠다. 내가 직접 가볼게.”
마음을 정한 룬은 검은 토끼 가면을 착용했다.
그러자 제드가 흥미를 보였다.
-그 가면은 언제 봐도 굉장하군요. 룬 님의 모습이 흐려 보이는 느낌까지 드는 게 한 번쯤 연구해 보고 싶을 정도네요!
속내가 제법 투명했다.
룬은 제드가 원하는 답을 해주었다.
“네 몸을 만들 재료도 구했겠다, 나중에 직접 만져볼 수 있게 해 줄게. 대신 여기 잘 보고 있어.”
화색을 감추지 못한 제드가 냉큼 말을 받았다.
-아이구 아무렴요! 이 제드, 신용 하난 아주 기가 막히잖습니까? 맡겨주십쇼!
역시 무기가 되어도 탐욕에 솔직한 놈이었다.
이쯤 되면 죽어도 변치 않는 성정을 지녔다는 점이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어떤 의미에선 믿을 만한 구석이라 생각하며, 룬은 제드에게 말했다.
“크리스티나가 묻거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도 해주고, 모코지석으로 연락해.”
-예이! 살펴 다녀오세요, 룬 님!
비굴한 건지 싹싹한 건지 모를 대답을 등 뒤로하고 룬은 혼자 방을 나섰다.
일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기에, 최대한 엘프들이 덜 모이는 길을 택해 북쪽으로 쭉 이동했다.
***
‘여긴 분위기가 좀 다르군.’
주변을 둘러본 룬은 왜 다른지 금세 유추해 내었다.
우선 철과 쇠로 된 도구들이 존재했다.
엘프들이 입고 다니는 옷도 뭔가 달랐다.
‘저거 동물 가죽으로 된 옷 아냐?’
보통 엘프들은 마력을 품은 거미줄이나 작물을 엮어 만든 실로 제작된 의류를 입었다.
한데, 이곳 엘프들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흰색이나 자연스러운 색을 추구하는 것과 달리, 이 곳 엘프들의 옷은 다양한 색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특징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귀였다.
분명 엘프인데, 룬이 봐온 엘프들 보다 조금 작고 기울어진 각도도 달랐다.
심지어, 귀가 둥근 인간들도 존재했다.
룬은 단번에 여기가 어딘지 눈치챘다.
“하프 엘프 거주지군.”
특히 인간과 피가 섞인 하프 엘프들이 사는 곳이 틀림없었다.
“장례식에는 거의 안 간 건가? 분명 피해가 있었을 텐데.”
다행히 은신해 있는 룬을 인지하지는 못했기에 룬은 편히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룬은 어렵지 않게 페르디키온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여기였군.”
상자에서 나오는 향기가 이어진 집.
문은 닫혀있었다.
기척을 살핀 룬은 가면을 벗고 노크를 했다.
똑똑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룬과 키가 비슷하고 주근깨가 귀여운 주황머리 엘프 소녀가 나왔다.
“누구세요?”
하프 엘프인 주황색 머리의 소녀가 눈을 깜빡였다.
룬은 문 너머를 보며 용건을 말했다.
“빨간 머리 형 여기 있지? 난 그 형 동생이야.”
아하, 하고 알겠다는 얼굴을 한 소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소녀를 따라 카펫이 깔린 내부로 들어서자 허브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엄마! 손님!”
큰 소리로 외친 소녀가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침대에 누워 얕은 숨을 내쉬는 노인과 페르디키온이 있었다.
“뭐해, 형.”
“결국 온 거냐?”
룬은 못 말릴 녀석이라는 눈으로 그를 봐오는 페르디키온을 보며 생각했다.
‘말도 없이 혼자 자리를 뜬 건 너잖아.’
그런 의미를 담아 지그시 바라보자, 페르디키온이 개의치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왠지 너라면 이런 일에 끼어들 것 같기는 했다만.”
“이런 일?”
룬이 되묻자 페르디키온이 침대에 누운 노년의 여성과 엘프 소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보다시피.”
룬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둘을 향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노쇠해진 몸.
나이가 든 그녀는 숨을 힘겹게 잇고 있었다.
페르디키온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 주근깨 꼬마가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
그 말에 룬은 놀라움을 드러냈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룬이 직접 사용해 봤지만, 아이들 장난감 가면 같은 외형과 달리 은신 효과 하나만큼은 정말 좋았다.
그런데 어린 엘프가 은신하고 있던 페르디키온을 찾아내다니, 무척 뜻밖이었다.
“……아니.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가면이라 중간에 살짝 뺐더니.”
“아하.”
‘그럼 그렇지.’
그제야 룬은 페르디키온이 들킨 이유를 이해했다.
모인 엘프들은 눈앞에서 세계수가 회복하는 기적을 체험했고, 죄책감과 회복 속에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페르디키온이 가면을 잠시 뺀다고 쉬이 눈치 채기 어려웠을 터.
그렇다 해도, 주황 머리 소녀의 눈썰미가 제법 좋았던 모양이었다.
“너 이름은 뭐야?”
내심 감탄을 한 룬이 그들을 지켜보는 엘프 소녀에게 물었다.
“전 아만다예요.”
눈을 깜빡인 소녀가 대답했다.
“다른 분들은?”
허브다발과 직접 짠 듯한 천이 걸려있는 방을 슥 둘러본 룬의 물음에 아만다가 고개를 저어보였다.
“엄마랑 저 둘 뿐이에요. 그런데 엄마가 아파서요.”
정황상 엄마라고 불린 침대 위의 노인은 수명이 다해가는 인간이었다.
룬과 페르디키온은 빠르게 눈짓을 교환했다.
‘형, 이야기 좀 해.’
‘알겠다.’
룬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세계수의 열매를 하나 꺼내 <어둠에 물든 향기 상자>에 넣었다.
“아만다. 장례식장에 왔으니 이 열매 뭔지 알지?”
“알아요.”
어리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 아만다에게 룬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상자에 담긴 열매가 통증을 줄어들게 할 거야. 절대 건드리지 말고, 엄마랑 같이 있어.”
“그럴게요.”
주근깨 엘프 소녀가 침대 옆 삼각 다리 나무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답했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 엄마의 주름 진 손을 잡았다.
“엄마, 조금만 참아. 알았지?”
쌔액- 쌔액-
목에 뭔가 걸리는 듯 숨을 쉬었지만, 아만다의 엄마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보였다.
룬과 페르디키온은 청력이 발달한 엘프임을 감안해서, 아예 집 밖까지 나왔다.
먼저 입을 연 건 룬이었다.
“아무리 봐도 수명이 다해가는 거…… 맞지?”
“그런 것 같다.”
머리를 대충 쓸어넘기며 대답한 페르디키온이 못마땅한 얼굴을 해 보였다.
“상황이나 확인해 보려 했더니, 설마 이런 일일 줄은.”
영 불퉁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페르디키온을 보며 의문이 든 룬이 말했다.
“왜 혼자 여기 와 있었어?”
딱히 탓을 한 건 아니었지만, 페르디키온은 약간 머쓱한 눈치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룬, 네가 기껏 엘프들을 회복시켜주고 있지 않았나.”
“그랬지.”
룬의 대답을 들은 페르디키온이 미간을 구겼다.
“그걸 본 저 아만다라는 녀석이 와서 말하더군. 룬, 너라도 제 엄마는 살릴 수 없을 거라고.”
페르디키온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무시받기라도 한 양, 기분 나빠 보였다.
“그 말을 들으니 왠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
룬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아해했다.
‘기분 나쁠 게 있었나? 내가 의료의 신도 아니고, 딱히 틀린 말은 또 아닌 듯한데.’
룬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페르디키온은 헛기침을 하곤 말을 맺었다.
“뭣도 모르는 어린 녀석 말이라지만. 네가 열심히 엘프들을 살렸는데 나중에 회복 안 된 놈이 튀어나오는 게 싫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직접 와본 거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