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은 페르디키온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것도 그 향기 상자의 효과인가?’
잠시 생각한 룬은 납득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까도 내가 까겠다, 인가…….”
“뭐?”
페르디키온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하지만 룬은 자신이 떠올린 결론에 나름대로 납득했다.
‘들은 적이 있지. 형은 자기 동생을 괴롭히기 일쑤지만, 남이 동생에 대해 안 좋은 말 하면 무척 기분 나빠한다고.’
누구한테 들었어?
당장 룬만 해도 흑미가 활약할 때 초치는 소리 하는 놈이 있으면 기분 좋지는 않을 테니까.
그 사이,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페르디키온이 말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일 줄은 정말 몰랐다.”
페르디키온이 영 못마땅한 눈을 해보였다.
“굳이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둥, 이럴 거면 뭐 하러 여기 왔는지 모르겠다는 둥. 별 이상한 소리만 안했어도 그냥 넘겼을 것을.”
나름대로 제 의동생을 두고 어이없는 소리를 하니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룬이 속으로 생각했다.
‘좀 충동적이었긴 한데, 상자의 효능까지 적용된 상태라면 그럴 만 했지. 내 이야기를 그냥 넘길 수 없었을 테니까.’
충성심 강화가 여러모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룬은 대견해하는 시선으로 페르디키온을 보았다.
“?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나름 챙겨주려 한 건 고마워서.”
페르디키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룬을 봐 왔지만, 룬의 속내를 읽을 수는 없었다.
‘페르디키온 녀석, 씩씩하고 자질도 좋은 데 말이지.’
양심이 살짝 찔려왔다.
룬 역시 많은 걸 해주었고, 앞으로도 잘 대해줄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이래저래 휘말리는 녀석에겐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차라리 향기 상자의 효능에 대해 사실대로 말 해줄까.’
그렇게 생각한 룬이 잠시 허공을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만 들어갈래? 밖에 오래 있는 것도 이상하고, 이쪽 일 해결부터 하자.”
“알겠다.”
룬의 제안을 수긍한 페르디키온과 함께 둘은 다시 아만다의 집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포근하고 달달한 데다 머리가 맑아지는 향이 퍼져있었다.
룬은 향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고 아만다와 그의 모친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셨수?”
아만다의 손을 잡아주던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불편한 호흡은 상당히 진정되어 있었고, 표정도 꽤 편해보였다.
“두 분…… 외모를 보니 인간인가 보구려.”
그리움과 반가움 섞인 시선.
즉시 아니라고 하려던 페르디키온에게 아만다의 시선이 꽂혔다.
인간이라고 해줘
그녀의 입모양이 그렇게 움직였다.
룬이 의아해하는 사이 아만다의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여겼건만…… 내가 두고 왔음에도. 이리 보니 반갑구먼…….”
긴 호흡을 천천히 내쉬며 노인의 얼굴이 편안하게 웃음을 띠웠다.
그리고는 시선을 옮겨 다시 주황 머리 엘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름진 손을 들어 아만다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사랑하는 아만다야. 언젠가 너와 인간이 사는 대륙에 다시 갈 수 있어야 할 텐데…….”
“응, 그렇게 될 거야.”
노인의 입에서 긴 숨이 다시 한 번 느리게 내쉬어졌다.
몇 번 가슴을 다독여주자 잠이 들어 버린 노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 소녀가 눈짓을 보냈다.
룬은 상자를 챙기고 페르디키온과 함께 먼저 방 밖으로 나갔다.
한참 뒤 방문 밖으로 조용히 나온 아만다가 물끄러미 룬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와요.”
새침해 보이지만 그늘진 얼굴이 묘하게 성숙해 보였다.
문득 룬은 그녀가 혼혈이긴 해도, 엘프라는 점이 떠올랐다.
‘누워있던 노인에게 엄마라고 불렀으니 보이는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았겠지.’
적어도 엄마라 불린 여성이 노인이 될 정도로 나이를 먹었으니 마냥 어린 소녀는 아닐 터였다.
“앉아있어요. 차를 내줄 테니.”
아만다의 안내로 원목 테이블이 있는 거실에 도착한 룬과 페르디키온은 각자 의자를 골라 자리에 앉았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와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왠지 한가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룬은 기다리고 있을 일행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형, 일단 우리가 어디 있는지 설명 해 둘게.”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게 좋겠군. 모코지석을 쓸 셈이냐?”
“응.”
모코지석을 꺼낸 룬은 누구에게 알릴까 고민하다가 제드를 선택했다.
<제드. 형 찾았어. 우리가 있는 곳은 하프 엘프 거주지역이야.>
<아니, 진짜요?>
흥미로운 소식이었는지 제드가 부지런히 글자를 보냈다.
<캬! 흥미롭네요. 생전에 들은 적은 있지요.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긴 하지만 타 종족과 피가 섞인 엘프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따로 있다더니, 거길 가셨군요?>
나름대로 숨겨진 지역인 모양이었다.
본래 순혈을 중시하는 엘프 문화 특성상 어찌 보면 예상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나름 엘프들이 치부처럼 여기는 이야기 일 텐데. 제드 녀석, 생각보다 이것저것 알고 있었네.’
자잘한 지식은 왕성한 호기심의 결과 일 터.
생각보다 쓸 만하다 생각하며 룬이 다시 모코지석을 두드렸다.
<맞아. 어쩌다 보니 어떤 하프 엘프 집에 초대 받았어. 지금은 차 대접 받고 있으니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넵! 안 그래도 크리스티나 님께서 룬 님 행방을 물어보셨는데, 그렇게 전하겠습니다요!>
<그래.>
문자를 마무리 짓고 모코지석을 도로 집어넣자 페르디키온이 물었다.
“이야기 끝난 거냐?”
“응. 크리스티나에게도 전달 해 주기로 했어.”
룬이 대답에 화룡족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차가 완성 되었는지, 작은 엘프 소녀가 쟁반을 들고 그들이 있는 쪽으로 왔다.
소녀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찻잔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이건 사과차, 이건 박하차야.”
아만다는 박하차를 페르디키온 앞에, 사과차를 룬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룬이 슬쩍 차를 바꾸었다.
“잘 마실게.”
박하차를 가져간 룬이 감사를 표하며 찻잔을 입에 대었다.
잠깐 룬을 본 페르디키온이 점잖은 얼굴로 말했다.
“크흠. 박하차도 상관은 없었다만. 그래도 아우가 나에게 챙겨 준 것이니 잘 마시겠다.”
“?”
따끈한 사과차를 든 페르디키온은 무척 태연하게 차 맛을 음미했다.
룬은 페르디키온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박하향 맡더니 눈초리부터 달라지던 녀석이 무슨.’
생각이야 그랬지만 룬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진실을 덮어두기로 했다.
아만다는 시선을 떨구며 옥빛을 내는 차를 내려다보았다.
“우선 고마워요. 엄마 편하게 해 줘서.”
말문을 연 그녀는 차를 마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저 찻잔을 손으로 감싸며 가만히 온기를 느낄 뿐.
룬은 그녀에게 나름대로 불편하지 않은 어조를 골라 상황을 설명 해 주었다.
“편해보여서 다행이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지만.”
룬의 말에 아만다는 씁쓸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역시 그렇겠지요.”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엘프는 결국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페르디키온의 붉은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그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 그냥, 내가 멋대로 기대를 했어요.”
기운은 없어보였지만 맑은 차 향 덕분인지 주근깨가 박힌 얼굴에 깃든 표정은 부드러웠다.
“당신의 동생이라면 엄마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막상 실제로 보니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에 그만…… 좀 욱해서 안 좋은 말을 했어요.”
아만다의 눈이 룬에게로 향했다.
“정정할게요. 충분히 훌륭해요. 엄마가 저런 편안한 얼굴을 한 건 오랜만이거든요.”
그러자 페르디키온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우가 잘나긴 했지.”
한편, 룬은 가만히 아만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만다. 내가 엄마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유가 뭐야?”
“네?”
“좀 더 정확하게는, 언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은데.”
아만다는 즉답하는 대신 눈을 깜빡여보였다.
찻잔을 입가에서 떼어 낸 페르디키온이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야, 세계수를 되살린 때 아니겠나. 아우님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그건 굉장한 광경이었으니.”
가볍게 차를 한 모금 머금던 룬이 대답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잔의 손잡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만다가 어색하게 물어왔다.
“으음, 걸리는 거요?”
룬은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실제로 보니’ 엄마를 살릴 수 없겠다는 걸 알았다며. 그 말은, 직접 보기 전엔 살릴 거라고 기대했다는 말이잖아.”
“!”
페르디키온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아만다에게 시선을 던진 룬이 말을 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거고. 세계수와 엘프를 회복시키기 전부터.”
세계수 회복은 숲의 인장을 얻은 뒤, 룬과 안면이 있는 소수만 아는 계획.
그걸 세계수 북쪽 끝에 있는 혼혈 엘프 소녀가 알고 있었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미리 예측하거나, 기대할 만한 소식조차 돌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알고 기대를 가졌냐는 거지.”
“어, 어. 그게.”
눈에 띄게 당황한 주근깨 엘프 소녀가 긴장된 듯 몸을 굳혔다.
페르디키온의 눈초리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말해라.”
날 선 기세를 풍기며 압박하자 깜짝 놀란 아만다가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그녀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설마, 거짓으로 우릴 기만하려 든 거냐?”
헉, 소리를 낸 아만다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야!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어요!”
불의 장로 후계자의 기운은 평범하게 살아온 하프 엘프가 버티기엔 너무 강했다.
결국 두려워진 아만다가 외쳤다.
“마, 말할게. 그러니까 진정해!”
“그래, 형. 마음은 알겠지만 이러다 쟤 숨넘어갈지도 몰라.”
차분한 룬의 제지에 페르디키온이 혀를 찼다.
영 못마땅한 얼굴이긴 했지만, 화룡족 소년은 기운을 다시 갈무리 했다.
그 와중에 아만다는 자신의 안위보다 방 안을 더 신경 쓰이는지 계속 안쪽 방 쪽을 힐끔 거렸다.
그 모습을 눈여겨 본 룬이 생각했다.
‘제 어미를 신경 쓰는 걸 보면 도망가지는 않을 거야. 느낌이지만 악의가 있어보이지도 않고.’
겨우 한숨 돌린 아만다가 팔을 마구 문질렀다.
“으아…….”
팔에 닭살이 돋아있었다.
진정한 소녀가 페르디키온을 새초롬하게 노려보았다.
“그, 그렇게 겁박부터 하려들면 어떻게 해요! 강한 드래곤 족이면서!”
“뭐.”
당연히 페르디키온에겐 우습지도 않은 소리였기에, 그는 아만다를 한 차례 노려보았다.
룬도 그것까진 말리지 않았다.
‘페르디키온은 일단 내 보호를 위해 같이 있기도 하고.’
엘프왕의 장례식 때 벨리아누스의 소개로 드래곤 족임은 알았을 터.
하지만 룬이 어린 해츨링이란 사실까진 말 하지 않았다.
이를 모를 아만다야 억울할 지도 모르지만, 페르디키온의 대처는 이정도면 무난한 편이었다.
분위기가 더 험해지기 전에 룬이 재차 물었다.
“누구한테 들었어? 우리 계획.”
아만다가 고개를 대각선 아래로 내리며 중얼거렸다.
“자세히 들은 건 아니에요…… 계획이랄 정도로 거창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고요.”
적어도 내부에서 허술하게 굴어 빠져나간 정보는 아니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