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242)

“시간 끌 생각 말고 빨리 말해라.”

페르디키온의 성마른 재촉에 아만다의 손가락이 창문 밖을 가리켰다.

사람이라도 있나 했더니, 아무리 봐도 창 밖에는 거대한 거목, 세계수뿐이었다.

“세계수?”

“맞아요.”

룬의 말에 아만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내렸다.

당신이 처음이니까.

룬은 할 말을 잃고 아만다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페르디키온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룬?”

“잠깐만.”

페르디키온이 룬을 불렀지만, 룬은 그를 제지하고 벨리아누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엘프왕의 자질은 오직, 세계수의 예언을 들을 수 있는 자인가. 그뿐이요.

즉, 룬이 바라보고 있는 이 평범한 주근깨가 박힌 하프엘프가 여왕의 자질을 가졌다는 말이었다.

‘페르디키온은 아직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한 모양인데.’

잠시 고개를 돌려 페르디키온을 바라본 룬이 전음을 보냈다.

[형, 벨리아누스가 말한 엘프왕의 자질 기억나?]

그제야 눈치 챈 페르디키온이 아만다를 다시 보며 되물었다.

[설마, 이 혼혈 엘프가 예언을 들을 다음 대 엘프왕이란 말이냐?]

[맞아.]

룬의 말을 들은 페르디키온이 아만다에게 이체 섞인 시선을 던졌다.

그 사이 룬은 나름대로 계산을 마쳤다.

‘마침 상자의 효과도 있으니, 어지간한 건 물어도 부담 없이 대답해 주겠지.’

어느 정도 개인적인 질문까지는 괜찮으리라 짐작한 룬이 말문을 열었다.

“나에 대해서 세계수가 언제 말 해줬어?”

아만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얼마 안됐어요. 어제 밤이었으니까.”

엘프들의 미래라는 거시적인 예언이 아닌 거야 그렇다 쳐도, 약 반나절 후의 일을 예언해 준 거라면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시간을 두고 성장하는 능력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아직은 확신하기 어려운 부분이므로, 룬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세계수 목소리는 자주 듣는 편이야?”

“그 동안은 들린 적 없었어요.”

아만다의 대답에 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만다가 말을 알아들을 시기에는 세계수가 한창 마기에 오염되어 있었겠네.’

순혈 엘프보다 짧다지만, 하프엘프도 천년 가까운 수명을 사는 자들.

외견으로 보아 아만다의 나이는 50살 정도는 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4, 50년간은 엘프왕이 마족의 목소리를 세계수의 목소리라 한창 착각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세계수가 원래대로 돌아온 이상 앞으로도 계속 예언을 듣게 될 테지.’

귀인이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판단한 룬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처음으로 들은 거야? 용케 세계수의 말을 신뢰했네.”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 졌다 느꼈는지, 주근깨 엘프소녀는 머뭇거리면서도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야 하나뿐인 엄마를 살리고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장례식에도 간 거예요. 아니면 엘프왕의 장례식에 갈 생각도 안 하죠.”

룬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엘프왕은 순혈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종족 피가 섞인 혼혈족이라며 하프엘프는 아예 같은 엘프로 보지도 않던 자.

그러니 본래라면 차별받아온 그녀가 엘프왕의 문상에 갈 마음이 들 리 없었다.

단지 어머니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차별의 시선을 각오하고, 처음으로 들은 세계수의 목소리가 진실이길 바라며 찾아갈 정도로 간절했을 터였다.

그녀의 상황을 이해한 룬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맘고생 많았겠네. 대견하기도 하고.”

덤덤하게 건넨 말이 예상 밖이었던지, 아만다는 룬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돌리며 한쪽 볼을 부풀렸다.

“흐, 흥. 말이라도 고맙네요.”

아만다는 칭찬이 어색했는지 볼을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분위기를 환기할 겸, 룬은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의문스러웠던 점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혹시 이 마을은 그런 일 없었어? 전염병 때문에 고생한 일이라든가, 부정한 일이 생겼다든가.”

주근깨 엘프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염병이라니, 전혀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다 이내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지 눈동자가 왼쪽으로 도르륵 구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아……! 생각해 보니 소문은 들었어요. 순혈 엘프들이 많이 힘들어했다죠.”

검지를 들어 볼에 댄 아만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지만 하프엘프들은 그런 일 없었어요. 우리가 너무 작은 마을이라 그런가?”

이쯤 되자 페르디키온도 뭔가 흥미로웠는지 자세를 바로 했다.

룬은 부담스럽지 않게 아만다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혹시 식수나 식량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어?”

아만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쩌긴요. 우린 순혈 엘프들과 같은 우물 못 쓰는데. 사막으로 사냥을 나가거나 오아시스를 찾은 원정대가 식수를 가져오곤 해요.”

아만다는 이 불공정함이 못마땅한 모양이었지만, 엘프왕으로 인해 생긴 비극을 목격한 룬은 속으로 탄성을 터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차별이 하프엘프들의 생명을 유지시킨 꼴이 되었으니까.

‘흥미롭네.’

세계수가 택한 하프엘프라!

하지만 지금의 아만다는 여왕이 되기보다는 엄마의 안위를 염려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뿐, 이 녀석은 미래에 큰일을 할 엘프야.’

긴 생을 살아온 신수로서의 감이었다.

지금 베풀어 둔 작은 호의가 미래에 큰 열매를 맺을 터.

잠깐 고민해 본 룬은 손을 테이블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손만 본체화 하여 까만 비늘 하나를 톡 뽑았다.

“이거 받아둬.”

“뭔데요?”

엉겁결에 손을 내민 아만다에게 룬이 자신의 비늘을 건네주었다.

“블랙 드래곤 족의 비늘.”

눈이 커진 아만다가 불빛에 비늘을 비춰보았다.

“세상에, 이거 엄청 귀한 거 아니에요?”

까만 비늘은 투명한 광택을 내며 고고한 빛을 흘렸다.

묘한 매력을 지닌 검은 비늘을 보며 아만다가 ‘신비롭게 생겼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룬은 인간의 손으로 되돌렸다.

“귀하지. 어둠 일족은 나 말고 없으니까.”

“으, 역시. 이런 거 저 줘도 되는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룬이 입을 열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너는 엘프와 세계수를 이을 자질을 가지고 있거든.”

푸하! 소리를 내며 아만다가 웃었다.

“와, 지금 건 조금 웃겼네요. 퍽이나 순혈 엘프들이 믿겠어요.”

농담이죠? 라며 어색하게 웃는 아만다에게 룬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농담 아니야. 세계수의 의지를 읽는 능력을 두고 그럴 수도 없고. 어쩌면 미래에 너는 엘프들의 길잡이가 될지도.”

아만다는 룬과 페르디키온에게 한 번씩 시선을 던졌다.

이어 진담임을 깨달았는지, 주근깨 엘프 소녀는 웃음을 그쳤다.

“솔직히 안 믿겨요. 혼혈아라고 없는 취급이나 안 하면 다행인데.”

삐죽이는 입술을 해 보인 아만다가 비늘을 소매에 갈무리하며 살짝 웃어보였다.

“그래도 이건 감사히 받아둘게요. 내가 귀하다고 말해준 건 우리 부모님 외엔 당신이 처음이니까.”

룬도 마주 웃어주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게 잘 간직해 둬. 언젠가는 필요할거야.”

차분한 어조에 담긴 진심을 느낀 아만다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룬이 말을 이었다.

“만약 네가 엘프 왕궁에 갈 일이 생긴다면 ‘벨리아누스’를 찾아가서 보여줘. 그는 네 말을 믿어 줄 테니.”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여긴 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형.”

“이제야 끝난 거냐.”

페르디키온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하며 기지개를 켰다.

“응. 크리스티나도 기다릴 텐데 우리도 이제 돌아가야지.”

문을 나서기 전, 룬은 아만다에게 세계수의 열매를 몇 개 더 건네주었다.

“순혈 엘프에게만 나눠 줄 것 같아서 손 못 댔었는데. 고마워요. 음…… 룬.”

아만다의 인사에 룬이 고개만 돌려 대답했다.

“별 말을 다. 혹시 몰라 말 해두지만, 세계수의 말을 듣는다는 건 함부로 발설하지는 말고.”

그녀의 일상이 무너질지도 모르기에 재차 당부한 룬은 그가 소생 언령을 하며 만든 음식도 나눠주었다.

효능에 대해 들으며 아만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이는 룬에게 있어 투자에 가까웠다.

‘어느 세계든 예언자는 늘 귀했지. 순혈 엘프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날이 기대되는군.’

다른 누구보다 먼저 만난 기연이다.

좋은 인연으로 기억되어 나쁠 건 없었다.

***

“룬 님! 페르디키온 님!”

한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며 흑미가 둘에게 쪼르르 다가왔다.

“식사에 늦으실까 봐 걱정했어요! 오늘 크리스티나 님께서 엄청 맛있는 걸 준비하셨댔거든요!”

“?”

안 그래도 테이블 위에 초코파르페에 마카롱, 푸딩 등 다양한 간식거리가 올려져있었다.

“설마 저거?”

앗, 하고 돌아본 흑미가 뭔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아니요! 저건 크리스티나 님이 너무 걱정 말라면서 간식을 따로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 흑미에게서 초코와 딸기, 부드러운 카스테라 향이 풍겼다.

“너무너무 행복한 맛이에요! 룬 님이랑 같이 먹고 싶을 정도로요!”

여우꼬리를 강아지처럼 흔들며 말한 흑미가 룬의 허리께를 꼭 끌어안았다.

“삐약!”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백야도 룬의 주위를 맴돌았다.

페르디키온은 그 모습을 훑어보곤 코웃음을 흘렸다.

“네 권속들도 걱정이 많군. 내가 함께 갔는데 널 위험하게 두었을 리 없잖나.”

그 말에 흑미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역시, 페르디키온 님 완-전 믿음직해요!”

“당연하다.”

새삼 흑미의 친화력에 감탄한 룬이 혼자 생각했다.

‘쿵짝이 잘 맞는데? 그래도 사제지간 이라고 은근 잘 통하는 건가.’

그 사이 룬의 머리에 털 찐 백야가 푹 내려앉았다.

“삐약! 뺙뺙뺙.”

룬의 검은 머리위에 둥지를 틀 셈인지, 배를 깔고 앉는 모습에서 묘한 어리광이 느껴졌다.

철컹! 철그럭!

-아이구, 룬 님 오셨습니까요?

듀라한의 경례와 방정맞은 제드의 목소리까지.

크리스티나의 레어에 귀환한 듯 기분이 묘했다.

-크리스티나 님께서는 요리 준비한다며 벨리아누스님과 부엌으로 가셨습죠! 참, 룬 님께서 오시면 전하라신 말씀이 있었는데요.

“뭔데?”

룬의 물음에 제드는 헛기침을 하더니 가느다랗게 목소리를 바꾸며 말했다.

-룬, 돌아오면 이 뒤로는 밖에 절대 나가지 말렴. 가능하다면 창 밖으로 모습을 내비치는 것도 자중하고.

“…….”

혼신의 연기를 담은 간드러진 목소리는 크리스티나의 고상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전혀 드러내지 못했다.

- 어떻습니까! 아주 똑 닮았죠?

‘엄청 구렸다만…….’

룬은 권속을 위하는 마음을 담아 진실을 말 해주었다.

“제드…… 너 다시는 크리스티나 흉내 내지 않는 게.”

-에잉, 처음이라 그렇지 이 정도면 꽤 비슷한데요.

룬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페르디키온조차 진지하게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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