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 때 내 레어 주민이었으니 충고 해두마. 그런 짓을 했다간 자던 드래곤이 벌떡 일어나 꼬리로 후려칠 수도 있다.”
-에엥 그렇게까지!? 이 제드, 소싯적에는 흉내 한번 내 주면 다들 자지러졌는데요.
“어이없고 웃겨서 아니야?”
룬의 필터 없이 튀어나온 감상에 제드는 서운해졌는지 무기 주제에 입이 댓 발 나온 분위기를 풍겼다.
-아아니이! 저의 필살의 연기가 그럴 리가요!?
이대로 두면 제드의 구시렁거림이 길어지리라 예감한 룬이 급히 말을 잘랐다.
“그건 그렇고, 크리스티나가 왜 외출하지 말라고 당부했는지 알아?”
아하, 하고 깨달은 듯 탄성을 터트린 제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 듯 은근하게 말했다.
-룬 님, 오시는 길에 엘프들 꽉꽉 차 있지 않든가요?
“그랬어.”
-그 엘프들이 다 룬 님을 찾아서 그렇습죠!
“?”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룬에게 제드는 설명을 시작했다.
154화 올 게 왔군
-세계수 열매를 먹은 엘프들이 회복되고 나서, 어떻게든 룬 님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며 모인 겁니다요.
어쩐지 오는 길에 엘프들이 모여 있다 싶더라니, 그 인파가 모두 룬 때문이었다는 말이었다.
‘이동 마법으로 움직인 게 다행이었네.’
안 그래도 왕이 죽어서 혼란에 빠진 엘프들이다.
다행히 이 대기실로 삼은 건물에는 벨리아누스도 있으니, 그를 만나러 올 자들이 많으리란 짐작은 했다.
일부, 룬에게 감사 정도는 하러 왔으리란 예상도.
하지만 새 떼처럼 몰려있는 모두가 룬을 보러 왔으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밖이 저 모양인데, 용케 잘 돌아오셨네요.
문득 떠오른 듯 말하는 제드에게 룬이 대답했다.
“다행히 란드가 만들어준 ‘은신 가면’ 성능이 꽤 좋았거든.”
껄껄 웃는 목소리로 제드가 추켜세웠다.
-이야! 그거 잘 하셨네요. 아마 평범하게 정문으로 오셨다면 그대로 잡혀서 여기 돌아오지도 못하셨을 겁니다요. 흑미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듀라한 옆에서 뭔가 부탁하던 흑미가 돌아보며 적극적으로 수긍했다.
“맞아요! 저한테도 룬 님 어디계신지 묻고 그랬어요.”
-그렇죠? 그나마 벨리아누스 님이 진정시키긴 했는데, 도무지 돌아갈 생각은 않더라고요.
제드는 천만 다행이라며 요란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다.
상황을 좀 더 파악해야 할 듯싶어, 룬은 이유를 물었다.
“저 엘프들이 날 굳이 찾는 이유가 뭔데?”
그러자 진작 떠오른 이유가 있었는지, 즉답이 돌아왔다.
-이 제드가 보기에, <불안감> 때문인 듯했습죠. 특히 미래에 대한 불안이요.
“!”
룬의 마음에도 짚이는 것이 있었다.
“혹시 그거야? 미래를 아는 자가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
자신의 생각을 터놓는 룬에게 제드가 호우! 하며 과장된 허밍을 날렸다.
-그렇지요! 제가 손이 있었으면 박수를 쳐드렸을 건데 아쉽습니다요. 어찌 보면 당연하긴 한데, 아무래도 엘프들은 미래를 예지하는 존재가 왕이었잖아요?
“그럴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조금 과한데.
룬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룬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은 제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룬 님, 이 제드가 상업을 하면서 꽤 성공한 이유가 뭔 줄 아십니까?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질문이지만 느낌이 남달랐다.
갑자기 저런 질문을 한 연유가 있으리라 여긴 룬이 적절하게 호응해주었다.
“뭔데?”
-그건 바로 상점을 이용하는 이들의 마음이죠! 조금이라도 편하고 싶은 마음. 불안을 가라앉히고 싶은 본능. 소유하고 싶은 욕구! 뭐, 실질적인 용도는 기본이고 말이죠.
“흐음.”
상황에 다 들어맞지 않는 지점이 있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할지는 짐작이 되었다.
가벼운 감탄으로 대꾸하자, 제드가 설명을 이어갔다.
-자, 보세요. 룬 님께서는 치료가 불가능했던 엘프들을 고칠 약과 음식을 베푸시고, 마족을 쫒아내신 데다 세계수까지 회복시키셨습니다요.
팔짱을 낀 룬이 입을 열었다.
“그야…… 내가 한 일은 맞지. 하지만 엄밀히 말해, 나 혼자의 힘은 아니었어. 평범한 엘프나 다른 이들도 함께였다고.”
-이런! 겸손하시긴!
호우호우, 하며 드워프 특유의 흥을 탄 제드가 극적인 어투로 단어들을 끌어냈다.
-기적을 행하는 자! 숲의 인장을 가져 세계수를 읽는 자! 캬아. 그야말로 엘프들의 모든 바람을 충족시켜 주셨지요? 이 말은 뭐냐, 바로 엘프왕과 예언자를 대체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거지요.
룬은 미간을 구겼다.
세계수와 연관된 자라는 사실이 이런 귀찮은 일을 물고 왔을 줄이야.
희망을 본 엘프들의 마음이 이해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룬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탐탁지 않았다.
‘저들끼리 잘 뭉쳐서 살면 되는걸.’
엘프 왕국이야 엘프들이 잘 번성시켜가야 할 일.
룬은 그저 란드가 받아들여지도록 돕고 엘프왕국에서 나올 이득만 챙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아예 여기 머물러달라고 단체로 부탁 받게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 열이 좀 식겠지.”
다 한 때의 열기다.
그렇게 확신한 룬이 이야기하자 페르디키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룬. 이건 내 생각이다만, 그건 힘들지도 모른다. 네가 세계수 열매를 맺게 한 건 긴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으니.”
화룡족 소년의 말에 제드가 긍정했다.
-그렇지요, 역시 페르디키온 님! 이건 한 때의 열기로 치부하기엔 너무 큰일이란 말이죠. 엘프의 삶을 화악 바꿨으니까요!
몸이 있었다면 손을 삭삭 비비며 말하지 않았을까.
룬은 제드가 매일 아침 혀에 기름칠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룬의 생각을 모르는 제드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구요? 엘프들 말을 들어보니, 룬 님 힘에서 단순한 숲의 마력이 아닌 아주 특별한 숲의 힘이 느껴졌다 합디다!
“!”
그 잠깐 힘을 쓴 사이에 거기까지 파악한 엘프가 있다니.
내심 놀란 룬과 달리 제드는 꽤나 즐거워 보였다.
-뭐라더라. 죽음과 가까운 어둠 일족이 쓴 숲의 인장, 즉 생장의 힘이라 이룬 쾌거라던데요.
어디를 가나 실력이 고여 버린 녀석 하나쯤은 있는 법.
어떤 엘프인지는 모르지만, 룬이 감탄 할 만큼 훌륭한 통찰력이었다.
‘어둠 일족의 특성과 숲의 힘이 잘 어우러졌다는 점을 파악하다니.’
여기까지였다면 예사롭지 않은 발상을 해 낸 녀석이라며 넘어갔을 터.
하지만 제드의 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 콧대 높은 하이 엘프들 몇몇이 아주 혀를 내두르면서, 룬 님을 명예 엘프로 맞이해야 한다더라고요?
엄청난 제안이긴 했다.
당사자가 바라지 않을 뿐.
룬은 다소 덤덤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부 엘프들이 숲의 마력에 아주 민감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소생 언령은 룬만이 가능한 능력.
그래서 숲의 인장 능력으로 보이기 위해 란드에게 수업까지 받았건만, 꽤나 눈 좋은 녀석이 알아본 것이다.
“……이렇게까지 되리라고 예상한 적은 없었는데.”
듣고 있던 페르디키온이 반쯤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룬을 보며 말을 얹었다.
“이런 말 하면 어찌 들릴지 모르겠다만 룬. 내가 엘프였더라도 무조건 관심이 갔을 거다.”
“…….”
룬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예언을 알려줄 수 있는 엘프왕의 부재.
치유의 기적을 믿고 싶은 마음.
세계수를 살리고 열매를 맺게 하는 숲의 마력을 가진 존재.
이 중 하나만 충족해도 탐이 날 텐데, 저 셋이 다 룬을 가리켰다.
‘크리스티나가 굳이 식사를 준비한 건 이 상황을 의논하기 위함도 있겠지.’
룬은 그녀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보호자로서 룬에게 쏟아지는 엘프들의 관심이 어떤 영향을 불러일으킬 지 신경 쓰였을 게 틀림없었으니까.
또 한편으론, 무척 든든했다.
‘그래봐야, 누가 골드 드래곤 장로의 결정을 바꾸겠냐만.’
마음속으로 생각을 마친 룬이 결론을 내렸다.
“벨리아누스도 식사에 오겠지? 그때 의논하는 게 좋겠어.”
-그러게요. 저기 서 있는 엘프들을 어찌 할 지도 궁금하네요.
제드가 맞장구를 치며 흥미로워했다.
그 때, 흑미가 듀라한의 목에 올라 목마를 타고 창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어보더니 말했다.
“으왕. 저기 있는 엘프들이 다 룬 님 보고 싶다고 와 있는 거구나.”
눈을 깜빡이며 창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보던 흑미가 귀를 쫑긋 거렸다.
“아까보다도 더 많아요. 다들 머리색이 다양해서 색색별로 빛나는 은하수 같아요.”
표현이 제법 귀여워서 그렇지, 일이 갈수록 커질 듯싶었다.
그 때 방문이 열리며 란드가 들어왔다.
“꼬맹이들, 식사 시간이다.”
“와아!”
흑미가 얼른 듀라한에게서 내려와 앞서나갔다.
이어 듀라한과 제드, 페르디키온 역시 방 밖으로 나섰다.
룬 역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시선을 느끼고 란드를 올려다보았다.
란드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 감사를 전해 달라더군. 엘프들이.”
살짝 흔들리는 갈색 머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내게도.”
느른한 녹빛 시선이 묘한 이체를 품고 룬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그가 들은 건 아주 평범한 인사였다.
감사하다는 말.
고생했다는 말.
미안했다는 말.
오래전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앞으로 듣지 못하리라 여긴 말들.
그 말을 듣고 난 후, 마음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작은 소란스러움이 너무 다양해서.
란드는 자신이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이 눈앞의 작은 해츨링 꼬마 덕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잘됐네.”
룬이 짧게 축하의 말을 돌려주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란드는 더 이상 사막에 버려진 갈색 드래곤이 아니다.
앞으로는 축하할 일도, 기뻐할 일도 더 늘어갈 터였다.
***
긴 응접실 식탁 위에 온갖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엘프들의 식성을 고려한 샐러드와 달콤한 꿀을 발라 구운 흰 빵과 과자.
양송이버섯 마리네이드와 라따뚜이.
소금버터빵과 에그타르트, 생크림 플레인 스콘과 옥수수 스콘.
신선한 치즈와 버터, 딸기잼.
달달한 포도주에 재운 과일을 구워내 풍미를 살린 꼬치.
양파 스프와 감자 스프.
토마토 샐러드 등, 눈으로만 봐도 싱그럽고 맛있어 보였다.
물론 고기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통후추와 허브를 넣어 구운 마블링 선명한 토마호크 스테이크.
훈제한 새 고기와 담백하게 삶아낸 육전, 샌드위치도 있었다.
내심 룬은 감탄스러워 했다.
‘크리스티나가 신경 많이 썼네.’
심지어 음료까지 대 여섯 종류로 다양해서, 식탁 위는 축제처럼 흥겨워보였다.
“차림이 어쩔지 모르겠네요. 입맛에 잘 맞으면 좋겠는데.”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설마 빛의 여제께서 직접 한 음식을 먹게 될 줄은.”
벨리아누스의 대답에 꽃망울처럼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크리스티나가 손을 펴 보였다.
“좋아요. 그럼 식사부터 해 볼까요?”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모두를 둘러보았다.
벨리아누스가 간단히 축언을 하고,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우으응! 너무 맛있다아!”
오랜만에 먹는 풍족한 고기요리를 입 안 가득 문 흑미가 양 볼을 꼭 쥐고 꼬리를 쭉 치켜세웠다.
란드는 크리스티나가 만든 꼬치를 들어 입에 물어보곤 미묘한 표정을 해보였다.
“……놀랍네.”
그 감탄을 끝으로, 란드는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벨리아누스 역시 양송이버섯 마리네드를 먹어보고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운 맛이군요. 최근 먹어본 식사 중 가장 훌륭합니다.”
우아하게 나이프와 포크로 샐러드를 건드리던 크리스티나가 답했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예전부터 엘프들의 재료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식사는 무척 즐겁고, 입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 식사의 목적을 잊은 자는 없었다.
룬이 버터롤빵과 스테이크를 거의 다 먹을 즈음, 크리스티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룬. 좀 전에는 어딜 다녀왔던 거니?”
‘올 게 왔군.’
입 안에 남은 스테이크 조각을 목 안으로 삼킨 룬이 대답했다.
“형이랑 어떤 엘프를 만나고 왔어.”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룬의 말에, 크리스티나가 가볍게 탄성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