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242)

“그 엘프가, 세계수의 말을 들을 줄 안다더라고.”

오랜만이네

“……어머나.”

크리스티나가 얌전한 감탄을 드러냈다.

벨리아누스는 먹던 음식이 후두둑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눈을 크게 떴다.

“세, 세계수의 말을 듣는다는 건!”

룬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응. 세계수의 예언을 들을 수 있는 엘프라는 거지.”

식탁 위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감탄 후 생각에 잠긴 이들.

혹은 룬을 바라봐오는 시선들.

다양한 시선 속에서 룬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알려주기 전에 물어 볼 게 있어.”

룬이 벨리아누스를 바라보았다.

“엘프들은 지금의 체제를 이어갈 건지, 새로 개편할지 말이야.”

좀 전과 다른 의미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벨리아누스는 살며시 미소를 띠었다.

“이거 룬 님께서 저를 시험해보시는 건가 싶소.”

허리를 꼿꼿이 세운 벨리아누스가 주름 진 손을 포개어 테이블 위에 두었다.

“말씀 드려왔던 대로 할 생각이오. 모두 내가 왕이 되어 할 일이 지 않겠소.”

역사에 사실을 기술하는 것도.

폐쇄적으로 갇혀있던 엘프들의 문화를 조금씩 열어가는 일도.

그가 죽기 전, 마무리하고 갈 업이었다.

“알겠어.”

벨리아누스의 의지와 결심을 고스란히 느낀 것으로 충분했다.

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만난 그 엘프는 아직 어려. 나보다도 나이가 적을걸. 심지어 혼혈인 하프 엘프이기까지 해.”

“하프 엘프……?”

의외의 존재였기에 벨리아누스는 탄성을 터트렸다.

이제껏 세계수의 예언을 들은 자들은 순혈 엘프들이었으니, 이는 충분히 놀랄 일이었다.

반응을 확인한 룬이 의뭉스럽게 말을 이었다.

“응. 한데, 엘프들은 순혈을 중시하니까 지금 여기 오면 너무 고생할 거 같아서.”

속내를 숨긴 룬은 천진한 말투로 말을 맺었다.

벨리아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소. 이쪽도 준비가 충분히 된 후에 모셔야겠구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벨리아누스가 안심시키려는 듯 룬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혼혈이라 해도, 출신이 어떻다 해도. 심지어 예언에 모든 것을 의존하지도 않을. 그런 엘프들의 나라를 만들 터이니.”

상황을 지켜보던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눈치로 크리스티나 역시 빙긋 웃어보였다.

그러자 벨리아누스가 다시 잔잔한 얼굴로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실은, 이 나이 든 엘프에게도 부탁이 있소.”

시선의 끝에는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빛의 여제시여.”

“어떤 부탁인가요?”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를 알아챈 벨리아누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조만간 저의 대관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때 세계수 회생에 도움 주신 분들의 축하를 받고 싶습니다.”

겸손하게 청했지만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중요한 일이었다.

순한 눈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룬이 생각했다.

‘하이 엘프들 고집도 꽤나 강해보이던데, 휘어잡으려면 위세를 떨칠 필요가 있긴 하지.’

영리했다.

룬의 지지를 받는 모양새로 왕에 오른다.

그건 룬에게 몰린 관심을 통해 민심을 살 기회이기도.

불안이 남아있는 엘프들의 지지를 벨리아누스에게 고스란히 가져올 수도 있는 훌륭한 퍼포먼스였다.

크리스티나 역시 그 의중을 읽었다.

“좋은 생각이군요. 조금 후 아이들의 상황을 봐서 말씀드리지요.”

“감사드립니다.”

허락이나 마찬가지였다.

룬과 다른 일행들이 원치 않는다면 거절하겠다는 뉘앙스를 담았을 뿐.

만족한 벨리아누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우선 세계수와 소통하는 엘프 이야기는 비밀로 해 주시겠습니까? 때가 되면 제가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벨리아누스의 부탁에 룬이 대답했다.

“응, 안 그래도 그 엘프에게 말 해두었어. 세계수와 이야기 할 줄 아는 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정말 현명하시오.”

벨리아누스는 흐뭇한 시선으로 룬을 바라보았다.

이어진 룬의 말은 그 시선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내 비늘을 맡겼으니, 때가 되면 자연스레 만날 수 있을 거야.”

혼혈인 하프엘프에, 룬보다도 어린 엘프.

이만한 힌트를 들었으니, 이름을 굳이 묻지 않아도 찾는 것이 어렵진 않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 블랙 드래곤 족의 비늘은 강력한 증거가 되어줄 터였다.

‘빛의 여제께서 말씀하신대로 참 영특한 분이시군.’

크리스티나와 대화하며 룬의 업적을 들은 벨리아누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룬이 엘프족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었다.

‘나 역시 하이 엘프들과 다를 바 없군. 알면 알수록 탐나는 분이니.’

왕이 되려는 그로서는 당연한 마음이었다.

훌륭한 조력자이자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는 많을수록 좋은 법.

하지만 실현 할 수 없었으므로, 벨리아누스는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

시간이 흘러, 벨리아누스의 대관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은 룬과 일행들은 각자 바쁜 시간을 보냈다.

페르디키온은 아버지인 파시야스와 연락을 취하거나 엘프 여성들의 흠모를 받곤 했다.

흑미와 백야는 성을 들락거리며 정화에 도움을 주고 귀여움을 받았으며, 크리스티나는 벨리아누스와 란드와 함께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그리고 룬은.

“뀨후우.”

‘이게 휴식이지.’

듀라한마저 엘프 장병들에게 무투를 봐주러 간 지금.

룬은 최고의 휴일을 만끽 중이었다.

통통한 배와 꼬리를 내밀고 뒹굴 거리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로 콧숨을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룬, 일어났어?>

모코지석이 깜빡였다.

물의 일족 아멜리아의 연락이었다.

“뀨?”

‘이 녀석도 수면기가 끝났나.’

바다의 정령인 돌고래와 함께하던 푸른 인어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응. 너도 지금 일어났나 보네.>

마침 한가했으므로, 룬은 모코지석을 가져와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꽤 빨랐다.

<맞아…… 네가 일어날 때쯤엔 깰 줄 알았는데. 늦잠을 잔 것 같아서 부끄러워.>

‘이 정도면 늦잠이랄 것도 없는데.’

룬은 쑥스러워 하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별로 늦은 것 같지 않은데. 잘 자면 좋은 거고.>

해츨링에게 숙면은 성장의 질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특히, 앞으로 물의 일족을 책임져야 할 아멜리아에게 숙면은 필수라 해도 과연이 아니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자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그건 다행이네.>

아멜리아는 잠에서 막 깨어나선지 궁금한 게 많아보였다.

<룬, 요즘은 뭐 해? 또 수련?>

<지금은 쉬는 중이야. 잠깐 거기 들려도 돼?>

룬은 마침 수확한 세계수의 열매도 줄 생각으로 방문 의향을 물었다.

<혼자?>

잠깐 생각한 룬은 가볍게 대꾸했다.

<응. 흑미랑 백야도 불러줄까?>

<아앗.>

그 뒤로 한참이나 후.

<괜찮아. 혼자 와도 돼.>

“…….”

저 짧은 답을 보내는 데 꽤 긴 시간을 소모한 게 마음에 걸렸다.

‘뭐…… 정말 싫었다면 말 했겠지?’

처음 만났을 때야 정말 말을 못하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 데면데면하진 않을 터.

‘잠깐 보고 오는 건데, 문제 있겠어.’

콧숨을 쉰 룬은 침대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이네. 이걸 쓰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며 룬은 <마력 열쇠>를 꺼내들었다.

슈르륵.

허공에 마력의 문이 생기기는 동안 룬은 간단한 메모를 남겨두었다.

[물의 레어에 다녀올게.]

다들 아멜리아와 연락 가능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다.

물론, 이건 룬의 오산이었지만.

***

‘오.’

물벽 너머를 보며 룬은 내심 감탄했다.

심해에 저편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정화된 산호초, 안정감이 보이는 몬스터화 된 해양 생물들.

아멜리아가 얼마나 애를 썼을지 가늠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타박타박.

느긋하게 물 벽으로 다가간 룬은 거침없이 벽 너머로 몸을 밀어 넣었다.

촤악!

‘몸이 엄청 가벼운데?’

룬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물 속을 헤엄쳐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룬의 몸은 심해의 압박을 훨씬 잘 견뎌내고 있었다.

‘물의 인장 덕분도 있겠지만, 비늘이 더 단단해진 덕이군.’

자는 동안 성장한 부분을 발견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는 마침 보이는 눈 돌아간 심해 생선에 눈길을 두었다.

‘우럭같이 생겼네.’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것이, 제법 실했다.

룬은 우럭 몬스터에게 가볍게 시비를 걸었다.

‘야. 와 봐.’

괜한 시비에 걸린 생선이 룬에게 성질을 부리며 달려들었다.

캭! 캬악!

룬은 앞발을 쭉 내밀어 놈의 주둥이를 툭툭 쳐냈다.

우럭처럼 생긴 몬스터는 어떻게든 손을 물어뜯으려고 이를 드러냈다.

그걸 가볍게 튕겨내자 강철같이 단단한 꼬리로 수 번 꼬리치기를 했다.

‘간지럽지도 않은데?’

심드렁한 룬에게 생선 몬스터는 온 힘을 다해 분노를 터트리며 덤볐다.

도끼눈을 하고 몸통 박치기를 해 온 생선은.

룬의 주먹에 정통으로 맞고 타격을 입고 말았다.

‘애쓴다.’

룬은 아련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몬스터화 하여 심해까지 내려온 놈인데, 뭘 해도 살살 건드리는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룬은 생선 몬스터의 몸통을 툭 쳤다.

‘그만 가라.’

하지만 생선이 룬의 깊은 뜻을 알리 만무했다.

‘가라 할 때 가.’

룬은 생선 몬스터를 쥐고 빠른 해류에 태워 보냈다.

키약!

퍼덕퍼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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