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난……부족해. 책임을……. 지는 만큼, 성숙하고…… 너와 페르디키온처럼. 한 일족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데.”
부족한 면을 입에 올리는 것이 조금 쑥스러웠다.
심지어 그녀보다 훨씬 어린 해츨링에게 말 하려니 더욱 그랬다.
얼굴이 화끈했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사실이었고, 그래서 변하고 싶은 거니까.
“그, 그래……도. 나도 성장……제대로 하고 싶어.”
의지를 담은 물빛 눈이 강하게 룬을 바라봐왔다.
‘좋아. 미끼를 잘 물었군.’
속으로 생각한 룬이 슬쩍 웃어 보이며 그 말에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못할 게 뭐 있겠어. 좋아.]
순순히 나온 대답에 아멜리아가 살며시 웃었다.
“고, 고마워.”
하지만 이내, 눈을 도르륵 굴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사실……과업을 해낼 만큼 내, 내가 경험이나, 힘이 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다른 종족들……을 본 적도 어, 없는걸.”
아멜리아의 말에 룬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부족하면 배우면 되지.’
현재 아멜리아는 집안이 어려워 서당을 제대로 못 다닌 아이와 같았다.
간접적으로 듣고 보기야 했겠지만, 당연히 직접 몸으로 부딪혀보는 게 최선.
룬이 꼬리를 바닥에 탁탁 쳤다.
“뀨!”
힘차게 소리 낸 룬.
터덥.
그는 양 쪽 앞발을 내밀어 아멜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물빛 소녀는 눈을 깜빡이며 룬을 바라보았다.
“뀨뀨.”
[아멜리아. 다른 걱정 말고 꼭 해내야한다는 마음으로 부모님에게 부탁해 봐. 너는 물의 일족 후계자잖아.]
“!”
일족을 이끌 장로 후계.
그 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 내가 해내야……하는 일.”
책임은 부담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눌렀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피하지 않을 터였다.
룬 일행과 물의 지역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그녀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몬스터들을 정화시켰다.
함께 한 일행들을 지켜냈다.
“응!”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인어가 고개를 굳건하게 끄덕였다.
룬은 만족스러워했다.
‘좋아, 눈빛이 살아있군.’
아멜리아의 의지를 확인한 룬이 모른 척 정보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페르디키온 형이 곧 성인식 때문에 과업을 치러야 한다던데……. 나보고 같이 가자고 그랬거든.]
‘페르디키온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익이 되면 됐지 해가 될 리는 없으니까.’
룬이 보기에 이는 필요한 일이었다.
페르디키온의 과업 수행에 함께 한다면 아멜리아에게 도움이 될 터.
심지어 룬은 페르디키온을 설득시킬 자신도 있었다.
‘그 녀석이 생각보다 의롭고 착하단 말이지.’
언행이 거칠 때가 있지만, 의외로 눈에 걸리는 꼴을 그냥 두지 못했다.
‘거참, 잘 키웠다니까.’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감춘 룬은 슬슬 밑밥을 깔았다.
[같이 간다면 과업을 수행하기 전에 경험을 쌓을 기회가 될 거야.]
까만 해츨링 앞발 안에 있는 인어의 하얀 손이 움찔했다.
“페, 페르디키온……의 과업을?”
<파도의 던전>을 수복할 때 본 페르디키온을 떠올린 인어는 당황한 눈치였다.
‘첫 만남이 좀 안 좋긴 했지.’
그녀의 반응이 이해되지만, 이 이상 좋은 기회가 없었다.
‘아멜리아가 이 기회를 놓치면 성년식 과업을 수행할 시기까지 다른 기회가 없어.’
크리스티나도 룬을 보호하는 것이 일 순위.
룬이 부탁한다 한들, 아멜리아의 성인식 과업을 돕는 데에 한계가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블루 드래곤들이 물의 레어를 비우기도 어려운 상황.
만약 한다면 과업을 최대한 쉬운 것으로 정하고 다녀오는 것인데, 과업을 통해 이름을 완성하는 드래곤 족 특성을 고려하면 좋지 않은 일이었다.
‘과업은 드래곤 족으로서 어떤 사명과 이상을 가지고 살지 결정하는 일. 대비 없이 치를 만큼 간단히 생각해선 안 되지.’
성년식 과업
룬은 인어의 손을 쥐었던 앞발을 풀며 말했다.
[혼자 해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걱정돼? 아니면…… 형이랑 맞지 않아서?]
앞발에 감싸였던 손에 남은 온기.
제 손을 잠시 만지작거린 아멜리아가 다시 룬을 바라보았다.
“음……페, 페르디키온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맞닥……뜨려야 하는 게 두려워.”
해 본적 없는 일이 주는 막연한 두려움. 불안감.
그를 상상해 본 아멜리아가 얕게 한숨을 들이키고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혼자…… 인 건 익숙해. 하지만 내, 내가 뭔가를 직……접 해 본 경험……은 적으니까.”
“뀨우.”
[그럴 수도 있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룬은 아멜리아의 말에 공감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린 해츨링인 내가 말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아멜리아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데.’
좋은 생각을 떠올린 룬은 바다 속을 유영하는 어류 몬스터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형한테 말은 해보겠지만, 사실 나도 진짜로 동행을 허락 해 줄지는 모르겠어.]
못내 염려 된다는 어조로 나온 말.
아멜리아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
거절당할지도 모른다.
쓰린 기분을 느낀 인어의 입에서 작은 공기방울이 새어 나갔다.
순한 얼굴을 하고 룬이 말을 이었다.
[우리 형 성격 알지? 거절당하면 나라도 엄청 민망할 거야.]
“으, 응…… 그렇긴, 해…….”
공감대 형성에는 역시 뒷담이다.
물론 페르디키온을 나쁘게 말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멜리아가 느낀 염려를 알아주는 수단일 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아멜리아를 보며, 룬은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이 일이 네게 도움이 된다면, 결과가 좋든 나쁘든 말해 볼 생각이야. 왜냐하면.]
그저 시도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법.
그 문턱을 조금이라도 낮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좋았다.
[잘 되면 너에게 무척 좋은 일이 될 거라 생각하거든.]
그 말에 아멜리아가 가만히 룬을 바라봐왔다.
‘아멜리아는 나한테 물의 인장까지 나눠준 녀석이다. 강해질수록 좋아.’
떠올린 생각은 다시 마음 한 켠 에 접어두고, 룬은 앞발을 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부담스럽다는 거 알아. 그래도 해서 좋을 일이라면 한번 도전 해 봤으면 해.]
“…….”
아멜리아는 잔잔한 시선으로 눈꺼풀을 깜빡였다.
차가운 심해에 익숙한 그녀지만, 언제나 룬과 일행들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따뜻했다.
‘나는……’
룬의 말에 깔린 속뜻을 생각해보며, 아멜리아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용기를 내서 너를 위한 선택을 해봐.
그 선명한 의미가 차가운 심장을 가만히 건드려왔다.
하면 좋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
무언가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았던 인어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행복을 빌어주는 이들을 기억하기로, 결심했어.’
가슴 앞에 살짝 주먹을 쥔 아멜리아가 말문을 열었다.
“나……정했어.”
“뀨.”
인어의 물빛 눈망울이 대답을 기다리는 룬을 응시했다.
동글동글한 까만 몸체에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
어린 생명체의 귀여운 면모와 달리 속 깊은 시선이 거기 있었다.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디키온이 괜찮다고……하면, 나도 하, 함께 가고 싶어.”
“!”
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뀨!”
[잘 결심했어, 아멜리아.]
제안은 했지만 결국 아멜리아가 용기를 내 결심해야 할 일.
룬은 기특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제 페르디키온을 설득해야 겠군.’
그때였다.
-모콕!
룬의 모코지석이 반짝였다.
<룬! 쪽지만 남기고 혼자 블루 드래곤 레어에 간 거냐?>
페르디키온의 문자였다.
‘마침 잘 됐네.’
내용을 확인한 룬은 바로 모코지석을 통해 답문을 보냈다.
<응. 나 아직 아멜리아의 레어에 있어. 형도 올래?>
<당연하지.>
페르디키온의 답문이 꽤나 빨랐다.
‘성격도 급하네.’
룬은 모코지석에서 눈을 떼고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형이 불러서 잠깐 나가봐야겠다.]
“으, 응.”
얌전히 대답한 아멜리아를 보며 룬은 문득 생각난 눈치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돌고래 정령은?]
당황한 눈치로 아멜리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 라멜은 그, 혹시 네, 네가 불편해 할까봐…….”
축약되긴 했지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는 데엔 충분했다.
“뀨우.”
[괜찮아. 널 따르는 정령이라 그런 걸 테고.]
돌고래 정령 라멜과 아멜리아의 모습은 주인과 강아지 같은 모양새였다.
제 주인에게 위협이 될까.
혹은 관심을 가져갈까 싫은 티를 내는 강아지.
“으,응. 이제 부모님……의 정령이 아닌데도, 그러네.”
아멜리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으나, 룬은 여러모로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내 힘이 아멜리아 일가를 힘들게 한 근원이었으니. 그걸 알아본 걸지도.’
굳이 말 해본 적은 없지만, 룬은 이 추측에 제법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어둠 일족의 힘은 오랫동안 블루 드래곤 일족과 바다의 생물, 정령들을 괴롭힌 힘.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게 당연했다.
룬은 가볍게 입을 떼었다.
“뀨뀨.”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너무 걱정 하지 마.]
인어가 한숨을 포옥 쉬자 기포가 보글보글 생겨났다.
“그러면 조, 좋겠는데…….”
어깨를 으쓱여 보인 룬은 <마력 열쇠>를 만들며 말했다.
“뀨우.”
[일단은 잠깐 다녀올게.]
“으응.”
열쇠로 문을 열고 통로를 빠져나가자, 방에서 쪽지를 들고 있던 페르디키온이 보였다.
룬은 태연히 앞발을 흔들었다.
“뀨우우.”
[나왔어, 형.]
미간을 구긴 페르디키온이 대번에 잔소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