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242)

“이런 쪽지 하나만 남기고 가면 어떻게 하냐?”

‘유난스럽네. 잠깐 다녀온 것뿐인데.’

룬은 황금 팔찌를 차고 인간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미안. 아멜리아가 마침 깼다기에.”

“어린 녀석이 함부로 돌아다니는 거 아니다.”

불편한 심기를 보이긴 했지만, 가벼운 충고로 마무리되었다.

“그보다 형,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어진 말에 페르디키온이 의문을 드러냈다.

“부탁이라니, 어떤 건데 그러는 거냐.”

룬은 순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형이 과업 수행할 때 아멜리아도 같이 가게 해줘.”

“뭔.”

화룡족 소년이 얼굴을 구겼다.

당장이라도 험한 소리가 나올 것 같은 눈.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룬은 노려보긴 했지만 그저 의중을 살폈다.

잠시 뒤, 화룡족 소년은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말 해봐라, 룬. 과업 수행에 그 인어를 데려가야 할 이유가 뭔지.”

핵심을 바로 물어오는 페르디키온.

룬은 좋은 흐름임을 직감했다.

‘물의 일족을 도왔을 때부터 느꼈지. 같은 드래곤 일족의 위기를 좌시하지 않을 성정이라고.’

룬은 <파도의 던전>을 함께 공략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의형제인 룬의 부탁이 있었다지만, 불같은 성정이라 아니다 싶으면 애초에 동참하지 않았을 터.

당시 같은 장로가 될 자로서 도움을 주겠다는 의향까지 밝힌 바 있으니, 그 점을 언급하면 충분히 아멜리아를 동승시킬 수 있으리라.

“형, 아멜리아도 곧 성년식을 치를 시기가 와. 그런데 형편이 좀 어려워보였어.”

룬은 아멜리아의 부모룡들의 회복이 더딘 점.

이제까지 바깥세상에 발 딛어 본 적 없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자초지종을 들은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상황은 알겠다. 허나, 어차피 다른 일족의 일. 네 부탁이라지만 내가 먼저 함께 해 달라 할 필요는 없는 일이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룬은 페르디키온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멜리아가 직접 부탁한다면?”

그 말에 페르디키온은 미간을 좁혔다.

“그 미숙한 장로 후계가 말이냐?”

의외라는 눈치였다.

화룡족 소년은 오른 손 끝으로 턱 끝을 매만졌다.

“응. 부족한 경험을 쌓을 무척 좋은 기회라면서, 형만 괜찮다면 함께 하고 싶다 그랬어.”

대답을 들은 페르디키온이 흐음, 하며 짧게 시간을 끌었다.

“부족함을 스스로 인지하고 노력하겠다는 자세는 마음에 드는군.”

제법 호평이었다.

룬은 슬슬 낚싯대를 당겼다.

“마침 형도 결심했잖아. 약자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레어를 만들어 보겠다고.”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이번 내 과업의 큰 틀이기도 하지.”

“벌써 어떤 과업을 이룰지 결정했다니. 빠르네, 형.”

“이쯤이야.”

과업에는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었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활동이나 성과를 내기 위한 활동.

세상을 피부로 느끼며 어떻게 살지 생각해보는 경험.

해보고 싶었던 일의 실현.

던전 브레이커나 전투, 연구 등의 업적 달성.

느긋하게 예술 활동이나 여행을 하며 낭만을 쫒는 등 무척 광범위 하다.

가진 힘과 능력. 지원할 이들까지.

어떻게 활용하는지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아멜리아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성체 드래곤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자신의 힘을 쓰는 것도 성년식을 치르는 해츨링의 판단으로 진행되니까.’

좋게 말하면 자유도가 아주 높고, 안 좋게 말하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첫 성년을 맞이할 해츨링의 ‘과업’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페르디키온은 제법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마침 내 과업을 함께 수행하기 좋은 녀석이긴 하군. 어려운 상황에서 용기를 내 뭔가를 개선해 나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룬은 살짝 미소를 띠었다.

“맞아. 마침 형의 과업 수행이 그거라면, 꽤 잘 맞겠다.”

페르디키온은 룬을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며 말했다.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 각오를 보이지 않는 녀석을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으니.”

“물론이지.”

동의 한 룬이 마력 열쇠를 꺼냈다.

우웅!

마력통로를 걸어가며 룬은 빠르게 아멜리아에게 모코지석으로 문자를 보냈다.

<형이랑 가는 중이야. 직접 말 해 보고 결정하겠대.>

정확히는 각오를 보이라는 말이었지만, 그걸 그대로 전했다간 과한 긴장으로 될 일도 안 될 터.

룬은 적절히 아멜리아가 받아들이기 쉬운 단어로 방문 이유를 일러두었다.

<응. 알겠어.>

아멜리아의 답문을 확인한 룬이 물벽 너머로 먼저 몸을 밀어넣었다.

촤악!

이어서 페르디키온이 들어오고, 앞에는 아멜리아가 와서 둘을 맞이했다.

“어, 어서 와요, 페르디키온.”

인어는 의연하게 웃어 보이며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백야의 깃털이 달린 진주장식이 머리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내 과업 수행에 함께 하고 싶다고.”

팔짱을 낀 페르디키온의 어투는 다소 거만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맞아요. 물의 레어도 곧. 안정 될 예정이고…… 페르디키온, 당신……의 과업에 함께, 하면 많은 것을 배울 거라 새, 생각……해요.”

룬은 아멜리아를 내심 기특하게 여겼다.

마음의 준비를 했을 테지만, 말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훨씬 줄었고 침착함까지 느껴졌다.

페르디키온도 변화를 눈치 채고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너와 함께 하면, 내게 어떤 도움이 되지?”

아멜리아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긴장한 손끝이 떨렸지만,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

맞서 싸워!

“나는…… 물의 어린 대리자.”

고개를 치켜든 아멜리아가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갈증……을 적실 물 한 모금이 필요한 순간, 거, 거대한 물이 필요한 때에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고개를 까딱인 페르디키온이 입을 열었다.

“고작 그거인가? 물을 다루는 능력이라면 내 아우도 쓸 수 있다.”

그건 그랬다.

룬 역시 아멜리아의 말을 듣는 순간 예측했던 대답이었다.

아멜리아만큼은 아니지만, 룬도 물의 인장을 지녔으니까.

그뿐인가.

어둠의 인장을 홀로 완성시킨 주인이요 불과 숲의 인장까지.

다양한 속성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은 무시할 수 없는 강함이다.

안타깝게 여긴 룬이 생각했다.

‘그에 비하면 좀 약하지.’

페르디키온이 아우인 룬을 많이 아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예행연습 삼아 데려간다는 이유 외에 룬의 재능과 능력도 포함되어있을 터였다.

아멜리아 역시 긍정하며, 말을 덧붙였다.

“마, 맞……아요. 하지만 나는 정화의 언……령도 쓰, 쓸 수 있어요.”

생각보다 아멜리아는 잘 해내고 있었다.

실제로, 해츨링 시기에 언령을 터득할 정도면 충분히 감탄할 만한 재능이었다.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탐탁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특색은 있다만, 정화 능력은 전투에 도움이 되는 편은 아니지. 게다가 언령이라면 나 역시 쓸 수 있다.”

그 말에 아멜리아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페르디키온의 다음 말에 다시 긴장하고 말았지만.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닌데, 좀 더 명확한 이유를 대라.”

문득, 룬은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페르디키온의 언령은 본 적이 없네.’

사실 놀랍기도 했다.

페르디키온에게 재능이 있는 건 알았지만, 벌써 언령을 깨우쳤을 줄이야.

이 후에도 아멜리아에게 룬의 생각보다 까다로운 질문들이 이어졌다.

‘보고 있기만 하는데도 불안한걸.’

전생에 왕의 질의응답 시간에나 볼 법한 압박.

이어진 질문에 대한 답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페르디키온은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이따위 지루한 대답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페르디키온이 작게 혀를 찼다.

룬도 긴장하며 생각했다.

‘설마 실패하나?’

성년이 될 해츨링이 가진 가능성을 시험 하고 힘을 얻을 기회인 과업.

까다롭게 구는 것도 이해되지만, 처음으로 이런 상황을 겪는 아멜리아에게는 무척 곤혹스러울 터였다.

입술을 꾹 깨문 인어는 궁지에 몰린 눈치였다.

“!”

순간, 뭔가를 느낀 아멜리아가 고개를 휙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룬이 있었다.

“?”

의아한 얼굴을 하는 룬.

그를 보는 인어의 시선은 무척이나 또렷했다.

필사적으로 돌파구를 찾아내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드디어 물빛 눈이 무언가 깨달은 듯 살짝 커졌다.

“룬……을 지켜줄게요.”

그 어느 때 보다 또렷한 목소리.

“……?”

룬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당황스러워 했다.

저게 될 리가.

그렇게 생각한 룬이 뭐라도 해야 하나 생각할 때.

“증명해 봐라.”

의외로 페르디키온에게서 처음으로 긍정적인 신호가 나왔다.

“좋……아요.”

대답한 아멜리아가 오른손을 뻗었다.

촤악!

하얗고 가녀린 손앞에 거대한 물의 방패가 생겨났다.

파도의 문양이 물결치듯 움직이는, 해양의 힘을 담은 방패.

콰르르륵!

해룡의 힘이 담긴 물의 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소용돌이의 압축이었다.

‘묘하게 압도되는 기분인데.’

룬이 그런 생각을 하며 보는 사이, 페르디키온은 미간을 꿈틀거리며 물의 방패를 주시했다.

“페르디키온, 당……신의 히, 힘으로…… 이 방패를 고, 공격해요.”

절대적인 수호를 다짐하는 그녀의 의지가 담긴 말.

하지만 페르디키온은 팔짱을 끼며, 무척 어이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바다 속에서 물의 일족의 방패를 깨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결국 네 영역의 힘이나 과시하려던 거냐.”

한심하게 여기는 화룡족 소년의 시선에 아멜리아는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언령을…… 사용……해요. 페르디키온.”

“!”

콰르르르!

셋의 침묵 속에서 거대한 물이 소용돌이치는 소리만 울렸다.

우레 같은 소음을 뚫고 빛나는 푸른 시선.

아멜리아는 각오가 담긴 얼굴로 페르디키온을 바라보았다.

“다, 당신이 사용하……는 언령을 내…… 힘이 겨, 견뎌낸다면 충……분히 증명…… 될 거예요.”

떨리는 말투와 달리, 그녀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는 방패는 자연이 압도하는 힘 그 자체였다.

쿠르르륵!

거대한 소용돌이가 인어의 푸른 머리카락도 헝클어뜨렸다.

거친 파도가 치는 방패를 들고, 아멜리아가 살짝 미소마저 띠웠다.

“서, 설마…… 거절……하나요? 혹, 혹시……도망치고 싶은 마음이든……다면.”

하, 하고 기가 찬 헛웃음을 흘린 페르디키온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물러나라, 룬.”

화룡족 소년의 눈에서 사나운 불꽃이 튀었다.

룬이 말릴 틈도 없었다.

손을 든 페르디키온이 바다를 가로로 그었다.

[영멸하라.]

화륵!

그어진 불꽃의 수평선.

언령에 이끌린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불이 하얗게 타올랐다.

치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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