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태우는 불.
수증기 소리가 살벌했다.
자글자글 끓는 증기가 페르디키온의 불꽃과 바다 사이에 공기층을 만들어 감쌌다.
“건방지군.”
강렬한 불의 일렁임.
달아오른 열기를 고스란히 받은 붉은 눈이 희번득 거렸다.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니야?’
위험을 감지한 룬이 제지하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차.
화르륵!
페르디키온은 공중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손으로 쥐었다.
“멸망을 막아봐라.”
페르디키온의 신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콰광!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자연재해가 격돌했다.
치이익! 치익!
휘둘러진 불길이 날름거리며 방패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마모되어가는 물의 방패를 수복하기 위해 아멜리아가 입술을 꽉 물었다.
“흐으, 윽!”
가느다란 인어의 신음.
살의를 품은 붉은 머리의 소년이 그 모습을 냉혹하게 오시했다.
한쪽 입꼬리가 끌어올려진 얼굴과 살심이 담긴 홍염의 눈.
그 모습은 불의 일렁임에 따라 일순 불에 달궈진 악귀처럼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룬이 생각했다.
‘멈추게 하긴 늦었어.’
룬은 만일의 경우, 어둠의 힘으로라도 둘을 말리기 위한 준비를 했다.
한편으론, 페르디키온의 언령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재능을 가졌다고 느꼈지만.’
이미 백 년 전부터 페르디키온의 재능 있음을 알아보았던 그다.
동시에, 안쓰러운 기분을 느꼈다.
언령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정수.
무엇이든 태우고 불살라버렸던 마음이 품을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원히 멸하리라는 언령을 가지기까지의 삶은 분명 지독한 파괴, 그뿐이었을 터였다.
‘앞으로는 부정한 것을 멸하는 불이 되겠지.’
생각을 마무리 하고, 룬은 시선을 옮겨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냉기 섞인 방패는 갉히고 뜯기면서도 버텨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룬은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맞서 싸워. 아멜리아.’
듣기라도 한 걸까.
아멜리아가 눈을 움찔 하더니 기합을 넣었다.
“하……앗!”
쿠르르르르륵!
방패가 그 두께를 더 단단히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번 멸족의 위기까지 다녀온 그녀는 선명한 살의 앞에서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차가운 물이 가득한 바다임에도 인어의 하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치리리리릭!
콰르르! 콰콰콱!
불꽃과 물이 함께 비산했다.
치열하게 맞부딪힌 멸하는 불꽃과 수호하는 물이 영원히 그 자리에 존재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퍼엉!
“꺅!”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인어의 몸이 튕겨져 나았다.
“형! 아멜리아!”
룬은 빠르게 둘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했다.
페르디키온은 자리에서 버텨냈는지 수증기 너머로 그림자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와 달리, 거대한 망치에 부딪힌 듯 공중을 날다시피 한 인어.
휘익
촤아악!
거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내던져진 그녀는 모래 물결을 일으키며 몇 번이나 더 바닥을 나뒹굴었다.
철푸덕!
꼬리를 추욱 늘어뜨린 아멜리아가 엎어진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멜리아 쪽이 좀 더 피해가 크다고 판단한 룬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룬이 걱정스럽게 묻자, 아멜리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상체를 힘겹게 일으켰다.
“헉…… 하아, 허억. 괘, 괜……찮아……!”
거칠게 숨을 몰아쉰 인어의 몸이 뜨거웠다.
붉은 화상 자국이 드러난 피부.
속으로 탄식을 터트린 룬이 급히 치료 마법을 사용했다.
‘페르디키온 녀석. 적당히 좀 할 것이지.’
아멜리아의 현 상태가 페르디키온의 눈에 완전히 차지 않으리란 건 어느 정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전력으로 부딪힐 줄이야.
‘멀리 보면 능력 있고 마음 맞는 자와 일하는 게 혼자 할 때보다 곱절은 더 큰일을 할 수 있지. 그걸 모를 녀석은 아닐 텐데.’
그뿐인가.
어둠 일족 장로 후계와 물의 일족 장로 후계가 그의 과업에 동참한다는 점도 큰 이점이었다.
룬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제 좀 괜찮을 거야.”
“으, 응…… 하. 고, 고마워…….”
치료가 끝난 아멜리아를 확인하고, 룬은 페르디키온 쪽을 바라보았다.
워낙 강한 녀석이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피해가 없진 않을 터.
차가운 심해인데도 열감과 수증기가 가득했다.
뿌연 김이 물에 쓸려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페르디키온.
그는 용족화 한 팔로 상체를 방어한 채였다.
“형, 몸 괜찮아?”
증기 폭발에 휘말린 붉은 비늘이 조금 상해있었다.
천천히 팔을 내린 페르디키온은 손을 툭툭 털었다.
“이 정도야 별거 아니다.”
에휴, 하고 속으로 한숨을 쉰 룬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보여줘.”
룬을 힐끔 본 페르디키온이 못이기는 척 팔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유난스럽기는.”
말과는 달리, 비늘 몇 개가 덜렁거리는 꼴이 생각보다 피해가 심각했다.
룬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형, 이게 무슨 유난이야. 거죽 뜯겨나가려고 하는데.”
“시끄럽다. 이깟 긁힌 상처가지고.”
“?”
‘긁힌 상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미련한 놈이.’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되뇌인 룬.
그는 흐린 눈으로 페르디키온을 바라보곤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다치지 마, 형.”
‘어린 녀석이 몸을 왜 이리 험하게 굴리고 그러냐.’
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치료 마법을 사용했다.
‘소생하라.’
은근 슬쩍 살을 회복시키는 소생 언령을 속으로 되뇌었다.
말끔하게 나은 페르디키온은 끙끙 거리며 일어나는 인어에게 시선을 던졌다.
“고작 그걸로 드러눕다니. 아직 멀었군.”
“!”
실패를 예감한 아멜리아가 흔들리는 눈으로 페르디키온을 올려다보았다.
룬이 무어라 말 하려던 순간.
“그래도 제법 괜찮았다. 룬이 추천할 만은 하군.”
먼저 입을 연 페르디키온이 아멜리아에게 통과했음을 알렸다.
“그, 그럼……!”
푸른 인어의 말에 팔을 슬쩍 내린 페르디키온이 입을 떼었다.
“과업에 함께 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점이 있으니 숙지해 두도록.”
“!”
인어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심장은 원래 잘 뛰어
아멜리아는 양 손으로 주먹을 쥐고 환하게 웃었다.
“룬! 나, 나……해냈어!”
반짝이는 이체가 감도는 푸른 눈이 룬을 향했다.
제 힘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마음.
기회를 잡았다는 성취감이 배꼽에서부터 뿌듯하게 솟구쳤다.
룬도 아멜리아를 보며 엄지를 추켜세워주었다.
“잘했어. 조만간 같이 다니겠네.”
룬의 말에 아멜리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아이, 아야아.”
데인 손이 아픈지 눈을 찡그리는 아멜리아.
잊고 있던 아픔이 이제야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치료는 했지만, 언령의 힘에 생긴 상흔이다보니 즉시 완치가 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푸른 인어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프, 네……. 아하하.”
웃으면서 눈물방울이 고인 인어의 얼굴을 보며 룬은 피식 웃었으며 말했다.
“진짜 좋은 모양이다.”
“그, 그런……가?”
동작은 작았지만 대답한 인어의 꼬리가 즐거운 듯 위 아래로 흔들렸다.
이로서 룬도 한시름 놓았다.
‘아멜리아가 혼자 수련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딱 필요한 시점에 기회가 와 준 셈이야.’
당장 과업을 수행할 때야 쉽고 적당한 걸 목표로 해도 괜찮아 보인다.
빠르고 쉽고 금방 끝나니까.
하지만 이는 나중에 반드시 후회로 돌아올 터.
다른 드래곤들과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건 상대적으로 별 거 아닌 문제였다.
진짜 문제는 레어 구축과 언령마법 발현에서 생길테니까.
‘언령에 문제가 생기는 건 너무 치명적이지. 레어를 만들 때에도 말이야.’
과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업적, 혹은 힘.
이것들이 부족하면 강한 레어를 만들거나 유지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크리스티나도 균형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강한 업적과 힘을 쌓아온 걸 테지.’
룬의 눈빛이 반짝였다.
생각에 잠긴 사이 일어난 아멜리아가 모래를 털어내며 몸을 정리했다.
“그, 그러고 보니…… 과업은, 어, 언제 가나요?”
아멜리아의 물음에 페르디키온이 대답했다.
“준비 기간 포함해서 반년 정도 뒤로 생각하고 있다.”
마침 다행이라는 듯 아멜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그…… 정도라면 다행히, 느…… 늦진 않겠어.”
그동안 크리스티나가 종종 와서 치료를 도와주기는 했다.
덕분에 블루 드래곤들은 치명적인 상처가 나아진 후론 자력으로 회복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완쾌는 아니었으므로, 아멜리아는 준비 기간을 미리 가늠하고 싶었다.
안심한 아멜리아의 시선이 룬에게로 향했다.
“고마워……룬. 네가 준 세……계수의 열매 덕분……에 시, 시간이 부족하진 않……을 것 같아.”
“별 말을 다.”
룬의 대답에 아멜리아가 살짝 웃고는 호흡을 골랐다.
“후…….”
아직도 소름이 돋고 화끈거리는 피부.
상처는 나았지만, 직전의 감각은 얼얼하게 남아있었다.
멍한 얼굴로 물빛 인어가 입을 열었다.
“왠지, 개운해……. 싸우……는 거, 너, 너무 무서웠는데. 참…… 이상하네.”
그 말에 룬이 적당히 대꾸했다.
“어디서 들었는데, 원래 어릴 때는 조금씩 싸우면서 크는 거라더라고.”
물론 진짜 의미는 좀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어릴 때 멋모르고 심각하게 싸우던 일이 커서 보면 별거 아닌 일이었다는 거니까.
아직 성체조차 되지 않은 해츨링들이 그 의미를 정확히 알 때 까지,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말이란 게 결국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 법이니.’
그렇게 생각한 룬을 바라보며 아멜리아가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웃었다.
“푸훗.”
팔을 휘휘 돌리며 상태 점검을 마친 페르디키온도 말을 거들었다.
“좋은 말을 알고 있군 룬. 그래, 투쟁은 삶에서 꼭 필요한 일이지.”
호쾌한 전투를 한 뒤라선지, 페르디키온은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아닌 건 아닌 법.
룬은 그 아니다 싶은 부분을 짚어냈다.
“형…… 투쟁까지 가면 어린애들 싸움이랄 수 없잖아.”
그 말에 페르디키온이 즉시 코웃음 쳤다.